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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월 May 02. 2020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페스트』 같이 읽기 2


https://brunch.co.kr/@sep108/35 








215

“바로 그것이죠. 그런데 당신은 하나의 관념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눈에 빤히 보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해선 신물이 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은 살인적인 것임을 배웠습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

(...)



216.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의 위대함이 느껴지는 대목이었어요. 재난 상황이 닥쳐서야 인물들이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금 더 나아가 짐작할 수 있기도 하죠.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선택이 드러나기 때문인데요. 사리사욕을 챙기든,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든, 그게 무엇이 되었건간에 가장 진실한 선택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읽게 돼요.     



251

그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계속 견뎌 내기에 가장 좋은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환상을 많이 품지도 않았고, 또 피로 때문에 품고 있던 환상마저도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 기간 중에 자기가 맡은 역할이 이미 병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역할은 진단하는 일이었다. 발견하고 보고 기록하고 등록하고 다음에 선고를 내리고 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 그는 살려 주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격리를 명령하기 위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 의사 리외는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갔던 인물이었어요. 의사로서의 직분을 책임감있게 수행하면서 페스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모습이 다른 인물들의 다양한 입장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주는것 같았거든요. 다른 분들은 페스트 속 각각의 인물들을 어떻게 느끼면서 보셨을지 궁금하네요.


   

290~304

가장 잔인한 시련조차도 기독교인에게는 역시 이득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여기서 정말로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이득이며, 그 이득이 어떤 점에 있는 것이며 어떻게 하면 그 이득을 발견할 것인가를 아는 데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291)     

그러나 페스트 시대의 종교는 여느 때의 종교와 같은 것일 수 없으며, 비록 하느님은 행복의 시대에는 사람들의 영혼이 안식하고 향락하기를 허용하고 심지어는 바라기까지 하시겠지만, 극도의 불행 속에서는 그 영혼이 과격한 것이 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 혼란과 두려움이 고인 오랑 시에 종교와 신앙이 틈입합니다. 신랄하게 드러나는 맹신과 믿음의 차이가 돋보이는 묘사에서 무릎을 탁-치면서 읽게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313

그래서 결국에 가서는, 비록 불행의 막바지에 이른 경우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을 정말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정말로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어느 순간에도 결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살림 걱정도 안 하고, 날아다니는 파리도 안 보이고, 밥도 안 먹고, 가려움도 안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라든가 가려움이라든가 하는 것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래서 인생은 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타루가 쓴 기록)     


: 11월 하순 경, 316 페이지 이후부터 331 페이지 까지 15페이지 가량 리유와 타루의 대화가 길게 서술돼요. 이 부분에 대한 함의를 읽어보신 분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는 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이 둘의 대화 부분을 서술했을까요?     



319

“간단히 말하자면 리유, 나는 이 도시와 전염병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페스트로 고생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도 이곳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란 얘기죠.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상태에서도 좋다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런 것을 알면서 거기서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어요. 나는 항상 빠져나가려고 했어요. 

(...)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그러나 페스트 환자 노릇을 그만하려고 애쓰는 몇몇 사람들이, 죽음 이외에는 그들을 해방해 줄 것 같지 않은 극도의 피로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지난 4월 이후 발견하지 못했던, 쥐들이 도시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계에는 병세의 후퇴가 표시되고 있었다.       


: 4부의 마지막에는 드디어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페스트가 종말을 맞는 듯한 낌새가 보입니다. 도시에 쥐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거든요. 동시에 작가는 페스트의 발병과 후퇴의 추이에서 한 가지 통찰적 메시지를 던집니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정도는 페스트 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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