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에는 영화 <바르게 살자>에 대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 어디까지나 영화의 만듦새에 대한 평론이 아닌, 영화에서 다루는 ‘경찰’의 모습에 대해 해학적 시각으로 써 내려간 글이니 가볍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도만아. 제발 유도리 좀 갖고 살자
요령이라곤 없는 교통과 순경 정도만(정재영 배우). 그는 자신이 소속된 삼포경찰서로 새로 부임하는 경찰서장 이승우(손병호 배우)를 교통 단속하면서 서장의 눈에 들게 된다.
마침 삼포경찰서는 관내에서 연이은 은행강도 사건이 터지던 상황. 삼포서장은 대외적으로는 은행강도 근절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어필하고, 내부적으로는 느슨한 수사 진행에 대한 단속을 하기 위해 색다른 은행강도 모의 훈련을 구상한다.
바로, 아무런 대본이나 절차를 정하지 않은 '실제' 모의 훈련.
그러나 서장의 가장 큰 실수는, 은행 강도 역할로 정도만을 지목했다는 점이다.
경찰 영화를 볼 때 재미있는 부분은, 경찰관이 보았을 때 '이걸 표현하려고 이런 장치를 뒀구나!'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장면이다. 한 마디로, 내부인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정보를 잘 고증했다는 뜻이다.
이 영화는 개봉 이후 경찰청에서 경찰관을 대상으로 상영회를 열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고증을 철저히 했거나 제작 단계에서 경찰청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좋은 관계를 맺었단 뜻이다. 경찰관에게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다는 감독의 자신감이 드러난다.
이 장면에서, 왼쪽에 서있는 삼포경찰서장의 계급장을 봐주시길 바란다. 무궁화가 3개인 '경정' 계급이다.
서울강서경찰서 조직도에 따르면 경정보다 한 단계 위인 '총경' 계급이 경찰서장 업무를 담당한다고 되어 있다. 영화 속 장면도, 이 조직도에 대한 설명도 틀린 말은 아니다.
'경찰법'으로 통칭되는 '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조직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30조에 '경찰서장'에 대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제30조(경찰서장)
1. 경찰서에 경찰서장을 두며, 경찰서장은 경무관, 총경 또는 경정으로 보한다.
해당 법률에 따르면 경찰서장은 경무관, 총경, 경정 모두 가능하다. 요즘에는 대부분의 경찰서장 계급이 '총경'이고, 관내 인구가 많거나 규모가 큰 경찰서의 경우 '경무관'으로 보하는 추세다.
대표적인 경무관 서장 경찰서로는 서울송파경찰서, 창원중부경찰서, 청주흥덕경찰서, 대구수성경찰서 등이 있다.
경찰서장의 계급만 봐도 경찰서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즉, 삼포서장의 계급이 '경정'에 불과하다는 건 그만큼 삼포경찰서의 규모가 작고 치안수요도 얼마 없는 한가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까지는 3급지 경찰서에 경정 서장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근래에는 거의 없어지는 분위기다.
모르고 보면 그냥 지나가겠지만, 알고 보면 참 재밌는 요소다.
은행 강도를 잡을 대책을 강구하는 회의에서, 삼포서 소속 형사들은 강도의 활동 범위가 점점 넓어져 삼포서의 관할을 벗어나고 있으니 이대로 두면 우리 관내에서 은행 강도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웃는다.
은행 강도가 100건이 일어나도 우리 관내에서만 발생하지 않으면 안전 지역이 되는 아이러니. 관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찰서 치안 상황에 강력한 펀치를 날리는 장면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인 정도만은 요령 하나 없이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수행한다. 너무 정직하게 수행해서 문제다.
주어진 강도 역할도 최선을 다하는 그를 보고, 동료들은 묻는다.
도만아.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말. 공무원이 가장 듣기 힘든 질문이 아닐까 싶다.
민원인은 공무원에게 왜 이것밖에 안 해주냐고 소리 지를 뿐,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말은 도통해주질 않는다.
일을 많이 할수록 책임질 일만 늘어나는데, 상관이라고 부하 직원의 책임을 덜어주지 않는다.
민원대에 근무하는 친구가 난처한 민원인을 만났을 때, 소속 팀장이 책상 밑에 숨어있다가 발견되었다는 일화를 듣고는 실소가 났다. 그게 공무원 사회의 민낯이다.
열심히 일할수록 동료들은 일거리 늘어난다고 투덜대고, 대충 마무리 짓고 돌아서자고 푸념한다.
영화 끝자락에서 정도만이 인질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인질이 도만을 칭찬하는 장면이 있다. 오늘 강도 역할을 누구보다 잘했다며 칭찬하는 인질의 말을 듣고 도만이 중얼거린다.
참 이상하네. 내가 경찰일 때도 늘 최선을 다했는데.
경찰관일 때 최선을 다 한 결과는 수사과에서 교통과로의 강제 발령이었지만,
강도일 때 최선을 다 한 결과 전국방송에 송출되고 굵직한 언론 인터뷰까지 줄을 이었다.
왜 이것밖에 안 해주냐는 질문 대신,
왜 이것밖에 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이유를 고찰할 때가 아닐까.
2007년에 개봉된 영화지만 지금 봐도 웃을 거리,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