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글쓰기란

새벽과 만나는 글쓰기

by 세레인


50이 넘어 글쓰기를 시작했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글을 쓴다고 했던가. 내가 그리 되었다.


첫 시작은 꾸준한 독서의 시간을 새벽으로 바꾸면서부터다. 사실 새벽형 인간이니 심야형 인간이니 그런 말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난 모름지기 자기 좋을 대로 하면 그만이라는 성향이어서 왜 꼭 새벽일까 하는 당위성은 갖지 않았다.


뒤늦게 자기 계발서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대다수의 책들이 새벽을 존귀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지? 새벽이 뭐가 다른데? 단순히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을 떤다는 의미인가?


모른다면 해봐야 했다. 다들 좋다는데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고백하건대 50이 되기 전 새벽기상을 시도했다가 포기하고 다시 도전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새벽에 일어난 날도, 왜 일어났는지 영문도 모른 채 멍한 정신을 가다듬기 바빴고, 몸도 혼란스러웠는지 반항을 하며 하루의 일과는 뒤죽박죽이 되곤 했다.


그러니 며칠 하다가 그만두고, 또 책을 읽으며 동기부여를 받으면 또 해보자는 식으로 새벽과 만나는 경험을 쌓아갔다. 그리고 나의 의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절실함이 없었던 탓인지, 빈약한 나의 의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뭔가 바꾸고 싶다면 내 의지를 믿기보다 환경을 바꿔야 했다. 혼자 힘으로 어렵다는 걸 깨닫고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주변 사람들을 찾았다.


그들과 새벽마다 만나며 인증을 남기면서 나의 새벽은 완전히 공기가 달라졌다. 기록의 힘이었을까? 작은 책임감은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눈이 번쩍 떠지게 만들었고 몽롱했던 정신은 집중하며 독서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그 루틴이 3개월을 넘기고, 6개월이 되었을 때 나는 급기야 새벽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나의 움직임만 느낄 수 있는 고요함, 붉은 적색과 푸른빛으로 뿜어내는 새벽의 찬란한 풍경, 간혹 인사를 건네는 새들의 지저귐, 어떤 날은 달큼함으로, 어떤 날은 비릿함으로 공기 중에 떠있는 새벽의 맛도 다르게 느껴지는 하루하루가 생경함 그 자체였다.


커피 한 잔을 내려 책을 읽는 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졌고 그 시간들이 익숙해질 때 즈음, 문득, 글을 쓰고 싶어졌다.


아마도 책의 끌어당김이 아니었을까 한다. 읽고 사색하는 시간이 이어지자 그 생각을 담아낼 공간이 필요했다. 무작정 노트를 펼치고 두서없는 일기 형식의 글을 썼다. 그게 시작이었다. 또 며칠 뒤에 생각이 나면 또 썼다.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를 읽으면서 내가 쓰고 있는 글이 모닝페이지와 닮았다는 걸 알았다. 그냥 쓰기, 내면의 나와 만나는 시간, 거창하게 창조성을 일깨우는 과정이라고도 한다. 나의 글쓰기에는 나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목적이 컸다. 50이 넘어도 나와 대화하지 않았다면 나를 바로 알고 있다는 건 착각에 불과했다.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로 매일 SNS에 글을 올렸고, 쓰기를 일상으로 가져왔다. 내가 배운 내용들, 새롭게 알게 된 세계, 일상에서 깨달은 소중함, 평범했던 감사와 건강의 가치를 알게 된 건 단연코 글쓰기였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나를 만나며 기록으로 남겨둔 글쓰기는 무료했던 나를 성장으로 이끌어주었다.


태어났으니 사는 삶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상이 더없이 소중했고, 쌓이는 하루가 근사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나의 일상을 점검하게 되고 주변에 더 섬세한 관심을 기울이자 관계도 변해가고 있다. 작게는 가족과 넓게는 직장에서도 지루한 관계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누구나 반드시 배울 점은 가지고 있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왜 모르고 지나쳐 살았을까.


이 모든 것들을 직시하게 된 건 글쓰기다. 새벽과 만난 글쓰기는 때로는 감정과잉을 담아내기도 하지만 그것이 나이기에 돌아볼 수 있고, 덜어낼 수 있어 다시 채울 수 있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지 않아도 모든 이들이 글쓰기를 해야 하는 이유다. 특별한 재주가 있지 않아도 글쓰기를 할 수 있으며 글을 통해 진정 내가 원하는 삶과 조우하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