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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아리다 Oct 07. 2023

황야의 이리_헤르만 헤세

무의식 방에 초대된 인간 내면의 수많은 자아


너는 <인간이 된다>는멀고도 힘겨운
고난의 길을 가야 할 것이고,
너의 이원성을 다원화하고, 
너의 복합성을 훨씬 더 고도화해야 할 것이다.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p91



인간의 존재 이유가 아닌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묻는 소설

� 황야의 이리처럼 야성적인 본성은 감추거나 억눌러져 있다. 무의식과 인간 내면의 수많은 자아를 그려낸 책으로 읽다 보면, 억눌렀던 인간 내면의 수많은 욕망과도 직면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면서 인간임을 인정하는 순간, 좀더 인간다워질 수 있다.



� 독서See너지

▶ 도서 : 헤세로 가는 길_정여울, 낯선 여인의 편지_슈테판 츠바이크

▶ 음악 : Wolf_콜드, 철부지 Childlike_존박 (늑대소년 OST), 누구없소_이하이 (feat. B.I of iKON)






헤세의 작품들은 대체로 자아 성찰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만, 이<황야의 이리>는 자아 성찰이라기보다 고찰에 가깝다. 인간의 존재 이유가 아닌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를 묻는 듯 하다. 인간의 내면에는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수천 개의 무수히 많은 자아가 존재하지만, 사회 속에서 점차 규격화되고 표준화 된다. 황야의 이리처럼 야성적인 본성은 감추거나 억눌러져 있다. 하리 역시 그런 인물이었다. 



심지어 하리처럼 지극히 복잡한 인간을 인간과 이리로 소박하게 나누어 설명하려는 것은 가망없는 유치한 시도이다. 하리는 두 개의 존재가 아니라, 수백 수천의 존재로 이루어져있다. 그의 삶(모든 사람들의 삶이 그렇듯이) 이를 테면 본능과 정신 같은 두 개의 극단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수천의, 무수한 쌍의 극단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다.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p82



Wolf_콜드



이 사내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처럼 끔찍이 사교성이 없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는 정말이지- 점차 그렇게 불리게 되었듯이 - 한 마리 황야의 이리였다. 낯설고 거칠고 그러면서도 수줍어 하는 존재,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였다. 그가 이러한 기질과 천성 때문에 얼마나 깊은 고독 속에서 살았는지, 또 이 고독을 얼마나 자신의 운명으로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물론 그가 여기 남겨놓은 수기를 보고서야 알았다.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p10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내면 아이. 똑바로 직시하지 못했던 그 아이의 모습은 어쩌면 가장 동물적인 본능을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동물로서라기보다 동물이 아닌 오롯이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기에 어느 한 구석에 웅크린 아이를 외면하는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감정의 많은 문제들이 어릴 적 해소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 그것이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우리는 어른인 척 살아가지만, 평생 철부지 아이를 껴안고 살아가는 동물이면서 인간이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그제서야 좀 더 인간다워지는 것이 아닌가.



Childlike (철부지)_존박 (늑대소년 OST)



융은 아픈 사람들의 무의식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의 무의식을 연구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심리학이 '질병의 진단'으로서만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개성과 인격이 발달하는 과정 전체를 조망하는데 있어 필수적임을 이해한 것이다.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는 성공 뒤에 가린 헤세의 기이한 내면의 꿈틀거림을 이해했다. (...) 

헤세는 작가뿐만 아니라 시민으로서도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츠바이크는 헤세의 눈빛에 알 수 없는 분열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겉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지만, 여전히 방랑을 꿈꾸고 우울함을 느끼며 광기를 분출할 공간을 찾는 헤세의 내면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p389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스테판 츠바이크는 헤세와 친분이 있었다. 그는 <낯선 여인의 편지>에서 사랑 이야기인지, 기억에 관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소설을 쓰는데,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토대로 글을 썼다는 단서로 이해해 보면, 프로이트와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의 방으로 독자들을 초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였기에 헤르만 헤세가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마음의 가면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황야의 이리> 역시 그러한 무의식과 인간 내면의 수많은 자아를 그려낸 책으로 읽다 보면, 억눌렀던 인간 내면의 수많은 욕망과도 직면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전 누군가에게 얽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언제라도 자유롭게 남아 있고 싶었습니다. 내면 가장 깊은 곳, 제 무의식 속에 어린 시절의 꿈이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겁니다.

<낯선 여인의 편지> 스테판 츠바이크



누구 없소_이하이 (feat. B.I of iKON)



우리 황야의 이리는 감정에 있어 - 복합적인 존재가 다 그렇듯이 - 때론 이리로 때론 인간으로 살았지만, 그가 이리일 때는 그의 내면에 있는 인간이 항상 바라보고 판단하고 조종하면서 잠복해 있었고, 그가 인간일 때에는 이리가 똑같이 그런 짓을 했다.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의 소설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나 <데미안>,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처럼 인간 내면의 두 자아가 대립하거나 동양 사상을 기반으로 이를 성찰하는 소설들이 많다. 이와 달리,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라든가 <황야의 이리>는 결이 다른 느낌을 받는다. 그 밑바탕에는 헤르만 헤세 자신의 무의식에 담긴, 억눌린 감정들을 소설을 통해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것이 한 개인의 이야기라기보다 열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누구나 갖고 있는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일 수 있기에 그의 소설이 오랜 시간 읽혀지고 사랑받는 것이 아닐까.



그 자는 황야의 이리다. 그리고 인생의 폐허 위에서 흩어져 사라져가는 의미를 찾고,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에 괴로워하고 광인처럼 살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최후의 카오스 속에서도 계시와 신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자는 또 누구인가?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p53



발췌



27

<사람들은 대개 헤엄을 칠 줄 모르는 동안은 헤엄을 치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위트가 있지 않습니까? 헤엄을 치려고 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물이 아니라 땅에서 살도록 태어난 거지요. 사람들이 사색하려고 하지 않는 것도 당연합니다. 사람들은 생활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지, 사색하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니니까요! 



그의 태도는 공손하고 상냥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 같기는 했지만 거만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정반대였다. 거기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어떤 애원같은 것이 배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곧바로 그에게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

61

우리 황야의 이리는 감정에 있어 - 복합적인 존재가 다 그렇듯이 - 때론 이리로 때론 인간으로 살았지만, 그가 이리일 때는 그의 내면에 있는 인간이 항상 바라보고 판단하고 조종하면서 잠복해 있었고, 그가 인간일 때에는 이리가 똑같이 그런 짓을 했다.


51

그 옆으로 햄릿과 화환을 쓴 오필리아가 걸어갔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슬픔과 오해에 대한 멋진 비유였다.


53

그 자는 황야의 이리다. 그리고 인생의 폐허 위에서 흩어져 사라져가는 의미를 찾고,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에 괴로워하고 광인처럼 살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최후의 카오스 속에서도 계시와 신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자는 또 누구인가?


78

유머만이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들과 통합시킬 수 있다. 세상을 부정하면서 세상에 사는 것, 법을 존중하면서도 법을 넘어서는 것, 소유하지 않는 듯이 소유하는 것, 포기하지 않는 듯이 포기하는 것-자주 인용되고 즐겨 요구되는 이 모든 고귀한 삶의 지혜들을 실현시켜 주는 건 오직 유머뿐이다.


82

심지어 하리처럼 지극히 복잡한 인간을 인간과 이리로 소박하게 나누어 설명하려는 것은 가망없는 유치한 시도이다. 하리는 두 개의 존재가 아니라, 수백 수천의 존재로 이루어져있다. 그의 삶(모든 사람들의 삶이 그렇듯이) 이를 테면 본능과 정신 같은 두 개의 극단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수천의, 무수한 쌍의 극단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다.


86

영혼은 무수하다. 인간은 수백 개의 껍질로 된 양파이고, 수많은 실로 짜인 천이다. 이것을 인식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고대 아시아인이었다.


하리는 높은 교양을 지닌 인물이지만, 마치 둘 이상은 셀 줄 모르는 야만인처럼 군다.


90

행복한 유년을 노래하는, 호감은 가지만 감상적인 그 사내는 자연으로, 순수로,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지만, 아이들도 결코 행복하지 않으며 많은 갈등과 분열과 고민을 겪는다는 것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91

너는 <인간이 된다>는 멀고도 힘겨운 고난의 길을 가야 할 것이고, 너의 이원성을 다원화하고, 너의 복합성을 훨씬 더 고도화해야 할 것이다. 


138

우리처럼 불멸하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법이야. 우리는 즐거움을 좋아하지. 젊은이! 진지함이란 시간의 문제라네. 이것만큼은 자네에게 일러줘야겠네. 진지함이란 시간을 과대 평가하는 데서 생겨나는 거라네. 나도 한때는 시간의 가치를 과대 평가한 적이 있었네. 그래서 백 살까지 살고 싶어했지. 그러나 영원 속에선, 자네도 알다시피, 시간이란 없다네. 영원은 한 순간에 불과한 것이라네. 즐거운 일을 하나쯤 할 수 있는 딱 그만한 시간이지.


198

마리아의 사랑스런 말과 동경에 찬 피어오르는 시선은 나의 심미적 취향에 커다란 틈새를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논쟁이나 회의를 초월하여 숭고하게 보이는 어떤 아름다움, 아주 드문 정선된 아름다움이란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모차르트가 그랬다. 그러나 그 경계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273

우리는 자아의 분열을 경험한 사람에게, 이 분열된 조각들을 어느 때나 마음 내키는 질서로 조합하고 그럼으로써 삶의 유희의 무한한 다양성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다오. 작가가 한줌의 인물들로 드라마를 만들듯이, 우리는 우리의 분열된 자아상들로부터, 영원히 새로운 상황 속에서 새로운 유희를 즐기고 새로운 활력을 지닌 끊임없이 새로운 무리를 형성해 가는 것이오. 자 보시오!


274

"이것이 삶의 기술이라오. " 그가 강의하듯이 말했다. "당신 자신이 인생이라는 판을 마음대로 짜고,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소. 헝클어뜨릴 수도 풍요롭게 할 수도 있는 것이오. 그건 당신 손에 달렸오.


308

언젠가는 장기말 놀이를 더 잘 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 파블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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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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