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찻집] 프롤로그 하나.
학창 시절에 옆동네 남학교 또래 친구들과 북클럽 모임을 했었다. 미리 정한 책과 신문 사설을 읽고 일주일에 한 번 한자리에 모여 비평을 나누거나 입장을 나누어 토론을 했다. 자칫 잘못하면 또래 고등학생들의 사교모임이 될 수도 있었지만 여고생과 남고생들 사이의 자존심 대결 같은 긴장감이 생겨 우리는 지식을 공유한다는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고, 제법 진지한 모임을 했다.
'지기지우(知己之友)' :
서로 뜻이 통하는 친한 벗
내가 나를 아는 것처럼 나를 잘 알아주는 친구
자기의 가치나 속마음을 잘 알아주는 참다운 벗
생각을 나누며 서로를 잘 알아주는 친구들이 되자는 뜻의 이름으로 시작한 모임이었다. 거창한 지식을 공유해보자는 식의 이름이 아니라 함께 모인 친구들끼리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잘 이해해보자는 취지를 담은 이름이어서 썩 마음에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우리의 처음은 좌충우돌이었다. 의견이 격하게 대립해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고, 때로는 대다수의 생각이 비슷해 모임이 밋밋하게 끝나버리기도 했다. 모임에 대한 기대치가 달라 실망한 사람이 생겼고, 끝내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떠나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우리에겐 편안한 벗으로 서로를 대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끝까지 남아 있던 친구들 사이에서 생겨난 정서적 교감이라고 할까.
우리가 바라던 지우(知友)는 단번에 생겨나지 않았다. 서로 싸우고, 대립하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애쓰고, 좋아해 주고, 용납하는 시간을 버티며, 나무가 자라듯, 자라났다. 우리는 서로의 지우가 되어주기로 선택했고, 서로를 견뎠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이 모임은 자연스럽게 해산되었고, 그때 모임을 함께 했던 친구들과는 연락이 끊어져 더 이상 안부를 알 수 없지만 문득문득 그 친구들이 생각난다. 잘들 살고 있겠지. 만일 지금까지 모임이 지속되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장성한 푸른 소나무처럼 든든한 지우들로 성장했을 것 같다.
나만큼 나를 잘 알아주는 존재가 그리울 때가 있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동안, 때로 눈빛만으로도 위로를 얻을 수 있고, 존재만으로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사이, 혹은 그런 존재가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날들이 찾아온다. 어느 순간 문득, 지우와의 교감이 무척이나 그리워지는 때가.
여전히 지우를 만나는 여정 가운데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분주한 일터에서, 또는 한가로이 맞이하는 시간 중에 조우하는 사람들과 지우가 되어가는 중이고, 지금까지 인연을 맺은 지우들과 깊어지는 중이다. 때로는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바다 건너편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하며 서로의 지우가 되어 간다. 나의 지우들은 사방에 있다. 지구 이편에, 저편에, 때로는 반대편에도 있다. 한 해, 한 해를 지나며 지우들과 함께 새기는 연(緣)의 나이테는 자라고 자라 아름드리나무처럼 두터워져 간다.
물질이나 소유에 대한 큰 욕심이 없는 내가 일생 동안 유일하게 부리고 싶은 욕심이라면 그건 사람에 대한 욕심이다. 지우를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고 싶은 욕심. 좋은 것,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하며 소통하고 싶은 욕심. 미래의 어느 날, 생을 마무리하는 순간이 왔을 때, 내 마음속에 한가득 지우들이 들어차 있다면, 아마도 난 이 땅에서의 여행이 그걸로 충분히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예쁜 찻잔에 차를 내리며 지우를 추억하고 기다리는 오늘도 참 설렌다.
글찻집 기획의 변 하나.
[글찻집 : 지우를 기억하는 공간]
지우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며 이곳을 기획했습니다.
지우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추억하기 위해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지우들에게 전하는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기획된 공간입니다.
누구에게나 지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나의 지우인지, 나는 누구의 지우인지 떠올리며
그것 하나로 감사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떠오르는 누군가가 없다면, 괜찮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누군가의 지우가 되어주면 되니까요.
(다음화에 '기획의 변 둘. 괜찮은 글을 만나는 공간'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