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찻집] 프롤로그 둘. 아름다운 사람들을 위한 글
지난 겨울 여행을 다녀온 후로 애지중지하는 물건이 생겼다. 원래는 물건 욕심이 별로 없는 편인데 우연히 발견해내고는 혹시라도 흠이 생길세라, 깨질세라 정성스럽게 손수 포장까지 해서 기내용 가방에 꼭꼭 담아 기어이 모셔 들고 왔다.
첫눈에 딱 들어오긴 했는데, 어딘가 촌스러운 구석도 있고 사용감도 제법 있는 빈티지라 단번에 마음을 정하지는 말자 하고 바닥을 뒤집어 보니, 등록번호와 함께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ENGLAND JUNE 15-1926'
잘은 몰라도 뭔가 사연이 있는 물건 같다. '1926년 6월 15일'이 혹여나 제작일이라면 올해로 90살을 훌쩍 넘긴 물건이라는 것인데 100년 가까운 세월을 참 곱게도 버텨냈구나 싶다.
그러고 나서 다시 보니 핸드 페인팅으로 칠해진 장미꽃의 색깔이 처음엔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손잡이를 타고 오르는 듯하게 장미 덩굴을 그려 넣은 것이 아기자기하고, 아이보리색 몸체에 오돌토돌하게 문양을 찍어 넣은 것도, 은은하게 반짝이는 광택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도 신기하다. 멀리 놓고 보니 레이스로 치장한 신부의 드레스 같다. 보는 것만으로 금세 기분이 환해졌다.
향이 좋은 차를 내렸다. 뜨거운 물을 부어 따뜻하게 덥혔다가 따라 내고 금빛이 나는 찻물을 담았다.
달달한 꽃향이 마치 장미 문양에서 풍겨 나는 것만 같다. 창문을 타고 드는 바람결에 은은한 향이 퍼진다. 한여름 무더위가 잦아들고 어느새 가을바람이 찾아온 것을 차향을 맡다가 알았다.
문득 찻잔의 원래 주인이 궁금해졌다. 이렇게 예쁜 물건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참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었을까. 아직까지도 새것인 것처럼 이렇게 잘 보존해 두었던 사람이라면 아마도 마음이 고운 사람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냥 기분이 좋다. 누군가의 고운 마음을 담은 물건이 지금 나에게까지 전해졌다니 왠지 그 마음까지 갖게 된 느낌이라.
아름다운 것들은 세월을 타고 자연스럽게 전해지고 전해진다. 세월의 아름다운 기억을 담아 전해지며 흘러간 시간을 더욱 값지고 고결한 것으로 만든다. 하여, 시간의 무게를 지닌 것들이 좋다. 물건이든 인연이든 사연이 깃든 것이 좋다. 세월의 부피와 질량을 담은 것들이.
세월을 함께 지고 흘러온 인연들이 있다. 삶의 마디마디를 채워주고, 매듭을 함께 지어주는 사람들. 덕분에 인생의 굴곡마다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거라 믿는다. 난 이들을 아름다운 사람들이라 부른다.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욱더 아름다운 인연으로 남겨지는 빈티지 인연은 그래서 더 값지다.
때로는 흠집이 나기도 하고, 낡아지기도 하는 빈지티 물건처럼, 나의 빈티지 인연 또한 색이 바래고 흠이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금이 가거나 깨어진다. 그래서, 그러므로, 더 애지중지 모시고 아껴야 할 이유가 된다.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켜켜이 쌓인 시간을 섣불리 흩어버리지 않기 위해 조심히 살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원래의 빛은 바래지지만 잘 가꾸어진 빈티지는 시간의 빛을 내고, 그 빛은 가면 갈수록 영롱해진다.
오래된 것들은 그리하여 더욱 아름답다.
글찻집 기획의 변 둘.
[글찻집 : 괜찮은 글을 만나는 공간]
이곳은 찻집에서 차를 우려내듯, 관계의 향과 맛을 글로 우려내는 곳입니다. 천천히 음미하며, 마음으로 마시기에 괜찮은 글차를 내보려 합니다.
*음미(吟味) : 읊조리며 그 맛을 감상함
차(茶)가 종류에 따라 다양한 풍미와 맛을 내는 것처럼 다양한 맛으로 글차를 우려 내보겠습니다. 맛과 깊이는 천천히 점차적으로 나아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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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에 '기획의 변 셋. 누구나 다독여지는 공간'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