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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May 21. 2023

'닥터 차정숙'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법

[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81] JTBC <닥터 차정숙>의 정숙

"남편 죽었어요!"


 20년간 주부로 살다 의사로서 새 삶을 찾아 나선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JTBC <닥터 차정숙>. 이 드라마의 주인공 정숙(엄정화)은 3회 동료들과 함께 한 회식 자리에서 "남편은 뭐 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같은 병원에 교수로 있는 남편 인호(김병철)와의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답한 말이었고, 드라마에서도 코믹하게 묘사됐지만, 나는 이 말이 무척이나 '뼈 있게' 들렸다.


 여전히 가부장 문화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결혼한 여성이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 중 하나가 바로 '남편으로부터 정의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돌아보면 정숙은 남편으로부터 규정되던 자아를 버리고 자신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여정을 살아내고 있었다. 정숙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가족 안에서 '도구화' 되었던 자리 


    

▲ 정숙은 가족에게 헌신하지만, 가족들은 그녀를 도구처럼 대한다. ⓒ JTBC


 많이 희석됐다고는 해도, 수 천 년을 이어온 가부장 문화의 전통들은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요소다. 특히, 시가 중심, 남성 중심의 결혼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에서 결혼한 여성들은 쉽게 가부장제에서 부과된 역할들로 정의되곤 한다.


 정숙 역시 그랬다. 1회 정숙은 비혼으로 살며 피부과 의사로 성공한 친구가 "의사면허가 아깝지도 않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하나도 안 아까운데. (...) 애 둘 부지런히 낳아서 키워서 사람들 둘 만들어 놨어. (...) 나처럼 사람 둘 만들어 키우는 것도 미래지향적이고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 것 아니냐."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면 정숙의 말대로 이런 삶 역시 매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일 테다. 그리고 이렇게 '엄마'로서의 정체감에 무게를 두고 있는 여성도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정숙의 가족은 정숙을 '한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는다. 간이식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가족들 걱정이 먼저인 정숙과 달리, 남편 인호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마지못해 간이식을 해주려고 하다, 이내 철회해 버린다. 시어머니 애심(박준금)은 정숙이 보는 앞에서 "내 아들 간 뗄 수 없다"며 대놓고 만류한다.


 우여곡절 끝에 다른 환자의 간을 이식받은 정숙은 새 삶을 얻고 퇴원해 돌아온다. 가족들은 정숙을 환영하는 듯하지만, 곧 물건을 찾아달라, 주스를 만들어 달라, 커피를 바꿔달라 등 온갖 요구들만 늘어놓는다. 이런 가족들에게서 정숙은 자신이 '한 사람'으로 존중받기보다는 '돌봄 제공자'로서만 환대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다 이렇게 질문한다.


 '우아하고 완벽했던 나의 아름다운 가족, 그들에게 난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과한 대상화된 자리에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변화를 시작하지만, 스스로 결정하지는 못하는


▲ 정숙은 자신이 스스로를 존중해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나를 위해 소비하기로 결심한다. ⓒ JTBC


 정숙은 나아가 스스로도 이런 자리를 자처한 면이 있음을 깨닫는다. 2회 정숙은 신용카드를 많이 쓴다고 타박하는 인호에게 "당신 명의 카드 갖고 다니면서 돈 쓸 때마다 감시당하는 기분"이었다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재산 앞에서 초연할 수 있다는 오만함, 내 손으로 번 돈이 아니니 날 위해 쓰는 건 부당한다는 결벽증. 뭐 이런 거 아니었나 싶어. 그런데 그런 게 다 필요가 없더라고. 좀 뻔뻔하게 내 맘대로 살려고."


 이는 스스로가 자신의 가치를 깎아 내려왔다는 자각이었다. 또한, 친구 미희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집에서는 먹이사슬 맨 아래쪽에 있지만, 밖에 나가면 알아주는 대학병원 교수 남편에 우등생 아들, 딸 가진 부잣집 사모님. 비록, 전업주부지만, 나도 알고 보면 의대 출신 엘리트라는 우월감 (...) 근데 죽다 살아나 보니까 다 필요가 없더라."


 이는 자기 자신을 세속적 시선으로 규정해 왔고 이런 것들이 자신을 주변인으로 만들어왔다는 깨달음이었다.


 이런 성찰 끝에 정숙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대학병원 레지던트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정숙은 드라마 중반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을 온전히 스스로 내리지 못한다. 레지던트 생활을 그만두기를 바라는 남편에게 "계속하게 해달라"고 허락을 갈구하고, 집에서는 총총거리며 자신의 빈자리를 다른 식구들이 느끼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애를 쓴다.


 스스로를 찾아 나섰지만, 자신의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남편에게 의지하고 가족들의 허락을 바라는 굴레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마침내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하다 


 하지만,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후, 정숙은 마침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한다. 인호의 외도 사실을 안 9회. 정숙은 "집을 나가겠다"고 결심하는데, 고3인 딸 이랑(이서연)에게는 양해를 구하지만, 남편과 시어머니의 반대에는 단호하게 대한다. "나랑 어머니 의견은 상관없는 거야?"라는 인호에 말에 명확하게 "어"라고 답하고, "나 혼자서는 이 집 건사 못한다"고 애원하는 시어머니에게도 "도우미 아주머니를 구하시든지, 기준을 낮추시든지"라고 답하며 '허락'을 구하는 대신 '선언'을 한다.


 이후 정숙은 의료봉사에 가서 주부로 살아온 경험을 살려, 환자들을 진심을 돌보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당뇨에 걸린 할아버지의 발을 닦아주고, 음식을 만들어주는 돌봄은 주부로서의 자아와 의사로서의 자아가 통합된 정숙만의 모습이었다(10회). 이렇게 자신만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한 정숙은 이제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을 좌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10회 정숙을 마음에 품은 로이 킴(민우혁) 교수가 남편의 외도에 대해 말을 꺼내자 정숙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저 스스로 찾아볼게요. 그게 교수님이 생각하는 길과는 전혀 다를지 몰라도 제 선택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전 지금 전공의 과정을 잘 마치고 내 인생에 닥친 이 파도를 무사히 건너고 싶은 마음밖에 없어요."


 이는 마침내 정숙이 그동안 자신의 삶을 규정해 왔던 것들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정의하고 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나는 정숙의 이 말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런 마음으로 자기 삶을 성찰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 그 선택이 무엇이더라도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지라도)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정숙은 주부로서의 경험과 의사로서의 정체감을 통합해 고유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다. ⓒ JTBC


 이제 정숙에게 남은 마지막 도전은 바로 '모성'인 것 같다. 정숙은 10회 친정어머니 덕례(김미경)와 한 침대에서 자며 "아빠가 안 미웠냐?"고 묻는다. 그러자 덕례는 "남편은 남편이라서 귀한 게 아니라 애들 아버지라서 귀한 거야"라고 조언한다.


 나는 정숙이 이 부분도 스스로 고민해서 답을 내렸으면 좋겠다. 덕례의 모성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미운 남편도 참아내는 것'이었지만, 정숙의 모성은 이와 충분히 다를 수 있다. 모성의 스펙트럼은 다양하고, 그 방식도 모두 다르다. 덕례의 희생에 정숙이 "나는 엄마 혼자여도 괜찮았는데"라고 답했듯, 아이들도 저마다의 시각으로 모성을 받아들인다.


 그러니 부디 정숙이 '가부장제하에서 정의된' 모성이 아닌 나만의 모성을 찾아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신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여성으로서 가지는 다양한 정체감을 고유하게 통합해내길 바란다. 남자로부터 정의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찾아가고 있는 정숙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정숙과 같은 여정에 있을 현실의 많은 여성들에게도 응원의 마음을 보탠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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