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82] JTBC <나쁜 엄마>의 영순의 모성
"근데 엄마는 왜 좋아하는 거 못하게 해요? 왜 엄마 마음대로 해요?"
마침내 항변했다. 억울한 남편의 죽음을 딛고, 홀로 아이를 키워낸 엄마 영순(라미란)과 아들 강호(이도현)의 이야기를 담은 JTBC 드라마 <나쁜 엄마>. 엄마의 바람대로 검사가 됐지만, 불의의 사고로 7살 아이가 되어 버린 강호는 자신에게 농장 사장이 되라고 강요하는 엄마에게 10회 이렇게 말한다.
비록 7살 아이의 마음으로 한 말이지만, 아마도 평생 마음에 품어왔을 이 말이 나는 무척이나 힘 있게 들렸다. 동시에 드라마의 제목이 왜 '나쁜 엄마' 인지를 잘 설명하는 말이라 여겨졌다.
영순이 '나쁜 엄마'인 진짜 이유를 짚어보았다.
지극하고 강한 모성
영순은 그야말로 지극한 모성을 지닌 강한 엄마다. 어릴 적 화가를 꿈꾸었지만, 부모 형제 모두를 사고로 잃고 혼자가 된 영순은 시골의 한 사료 가게에서 성실히 일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돼지 농장을 하는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린다. 하지만, 영순이 강호를 뱃속에 품고 있을 때, 남편은 억울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또다시 홀로가 된 영순. 하지만 영순은 남편이 남긴 어미 돼지를 보며 이렇게 다짐한다.
"나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어. 딱 하나 가진 게 있다면 이 아이는 절대로 우리처럼 살게 하지 않을 거야. 살아보자. 내 새끼도 니 새끼도 엄마 살리려고 있나 봐. 그러니까 우리 어떻게든 살아보자." (1회)
그 후 돼지 농장을 꾸려가며, 출산을 한 영순은 그야말로 강한 엄마로 살아간다. 아들 강호를 그 누구보다 엄하게 교육시켜 (졸리면 잠이 온다는 이유로 밥을 적게 줄 정도로) 법대는 물론 사법시험에도 수석 합격하게 만든다. 그렇게 강호는 엄마의 바람대로 '힘을 가진' 검사가 된다. 하지만 강호는 살해당할 뻔한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7살의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가 되고 만다.
영순은 다시 한번 강호를 위해 모든 것을 한다. 강호를 먹이고 씻기며 지극히 보살피는 동시에 엄격하게 재활훈련을 시킨다. 자신이 위암에 걸린 후에는 강호가 자립해 살아갈 수 있도록 물에 빠뜨리면서까지 걷게 만들고, 돼지농장 사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일상을 하나하나 가르쳐준다.
영순의 이런 모습은 여린 마음을 엄격함 뒤에 숨기고 자신의 감정마저 희생하고 참아내는 모성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부모를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 강호
하지만 엄마의 이런 지극한 사랑을 강호는 어떻게 느꼈을까. 어릴 적부터 '검사'가 되어 억울하게 살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따라 살아온 강호는 고등학교 시절 미주(안은진)에게 이렇게 말한다(1회).
"난 이름이나 혈액형처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순간부터 미래의 직업이 정해져 있는지 알았어."
이에 "그게 하기 싫으면 하고 싶은 걸 하면 되잖아"라고 조언하는 미주에게 이렇게 답한다.
"내가 하고 싶은 거 그게 뭐지? 그러고 보니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네"
결국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억울하지 않게 살만한 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메시지는 강호 스스로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 삶을 살도록 만들었던 셈이다. 게다가 영순은 '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면서 자신의 힘을 키울 수 있는지조차 강호에게 생각할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영순은 3회 사지마비가 되어 누워있는 강호 앞에서 병원 사람들에게 "저희 아들 서울 중앙지검 검사거든요. 사시 수석합격"이라고 소개한다. 온통 '검사'에만 매몰되어 있는 영순의 이런 태도는 성장하는 내내 끊임없이 강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는 '검사가 되었을 때만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로 강호 마음에 새겨졌을 것이다.
한편 강호는 엄마의 강한 모습 뒤 여린 마음도 읽어낸다.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찢은 후 이를 테이프로 붙여 놓은 걸 보았을 때, 자신의 밥을 뺏은 후 주방에서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강호는 아버지를 죽게 한 자들이 결국 엄마의 삶마저 빼앗았음을 깨닫는다(9회).
그리고 9회 남긴 편지에서처럼 '그들로 인해 철저히 망가져 버린 어머니의 삶.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평생을 나쁜 엄마로 살아야 했을 그 아픔'에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 '나쁜 검사'의 길을 걷는다. 결국 강호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보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어머니를 위해 스스로를 도구화하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강호가 받아들인 '부모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는 7살 아이가 된 후에도 계속된다. 영순은 강호의 행동을 제한하기 위해 종종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엄마 속상해. 엄마 속상한 거 좋아?"
이에 강호는 순수하게 엄마의 말을 따르지만, 이런 메시지들은 강호에게 '엄마의 감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뿐이다. 나아가 '엄마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나쁜 엄마'가 되지 않으려면
이처럼 영순은 강호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만, 강호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보다는 '도구화'시켜버리는 오류를 저지른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영순이 '나쁜 엄마'일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영순이 '나쁜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이었을까. 바로 아이가 자신과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고, 아이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이를 존중해 주는 태도다. 현실에서도 그렇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뱃속에서부터 한 몸이었던 아이들에 대해 '자신이 다 안다'는 착각을 하지만, 실은 아이는 엄연히 부모와는 다른 독립된 존재다. 부모가 아무리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한다 해도, 아이의 마음속엔 다른 생각과 다른 시각이 자라난다.
당연히도 아이의 이런 관점은 존중받아야 하고, 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아이는 부모로부터 독립된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 아이는 결코 부모를 위한 존재가 될 수 없으며, 부모의 삶을 대신 살아갈 수도 없는 법이다.
하지만, 영순은 강호를 자신의 삶의 원동력이자 남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존재로 받아들인다. 때문에 강호가 자기 자신과 분리된 존재라는 것,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개성을 지닌 존재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물론, 영순이 강호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지극한 사랑으로 강호를 돌보지만, 그 사랑이 오히려 자기 자신과 강호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든 셈이다. 때문에 한 번도 고유함을 존중받아보지 못한 강호는 끝끝내 엄마의 뜻대로만 살며 자신의 삶을 망쳐버린다. 그리고 7살의 순수한 영혼으로 되돌아간 후에야 '왜 엄마 마음대로만 하냐'고 항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회에 강호는 이전의 기억들을 되찾았다. 그리고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온 강호가 이 일들을 끝내고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면 정말 좋겠다.
" **는 뭐로 만들고 싶어요?"
나는 <나쁜 엄마> 영순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종종 들어왔던 이 질문이 떠올랐다. 현실의 많은 부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이 질문에도 아이를 주체가 아닌 부모의 '객체'로 대하는 태도가 배어 있었다. 영순은 어쩌면 이 질문을 극단적으로 실천한 엄마가 아닐까. 그래서 그녀는 엄청난 모성에도 불구하고 '나쁜 엄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가로 키우고 싶어요. 원래 제 꿈이 화가였거든요. 예고 준비하던 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결국 포기했지만 우리 아기도 왠지 나 닮아서 그림을 잘 그릴 것 같아서요."
9회 회상 장면에서 영순이 임신을 축하해 주는 한 이웃에게 건넨 말이다.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이가 이뤄주면 좋겠다는 이 바람이 당연하게 들리는 한 현실의 많은 아이들이 강호와 같은 삶을 면치 못할 것이다. 부디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