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88] 넷플릭스 <너의 시간 속으로> 민주
"저는 존재감이 없는 것 같아요."
상담심리사로 일하면서 내담자들에게 종종 듣는 말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내가 중요하지 않고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 자괴감에 빠져들곤 한다. 나는 이 '존재감'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이들의 간절함이 느껴져 마음 한편이 울리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넷플리스 시리즈 <너의 시간 속으로>에서 '존재감'을 바라던 나의 내담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을 만났다. 바로 1998년의 민주(전여빈)다. 대만 드라마 <상견니>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너의 시간 속으로>는 시간 여행을 통해 비극적인 운명을 바꾸고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려는 준희(전여빈)와 연준(안효섭)의 이야기다. 준희가 시간 여행을 통해 깨어난 인물이 바로 민주고, 민주는 존재감을 갈망한다.
조금은 복잡한 인물들의 마음을 따라가면서 12부작 모두 시청한 후에야 나는 깨달았다. <너의 시간 속으로>는 민주가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가는 이야기임을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민주는 스스로를 바꾸지 않고도 존재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민주는 어떻게 존재감을 가질 수 있게 됐을까. 그 여정을 살펴본다.
존재감이 없던 민주
1998년. 고등학교 2학년인 민주는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의 아이다. 매일 아침 투정 부리는 남동생을 아무 말 없이 깨워주고, 늦잠 자는 엄마의 이불을 덮어주고서야 학교에 간다. 집에서 민주는 티 내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하고 가족들을 돌본다. 학교에서도 민주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말썽을 부리거나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과 살갑지도 않은 민주는 늘 혼자서 조용히 지낸다.
그런 민주에게 청각장애로 인해 홀로 지낸 경험을 가진 인규(강훈)와 그의 '절친' 시현(안효섭)이 다가온다. 민주를 마음에 품고 다가간 건 인규지만 민주는 그런 인규를 돕기 위해 다가온 시현에게 관심을 갖는다. 민주의 일상엔 이들로 인해 약간의 생기가 돈다. 하지만 곧 이런 생기마저 막아버리는 일들이 생긴다.
셋이 함께 등교를 하다 지각을 한 날, 민주의 담임 선생님은 민주에게 이렇게 묻는다.
"야, 넌 몇 반이니?"
이후 민주는 부모가 이혼을 운운하며 부부싸움을 하는 것을 듣게 되는데, 그때 민주의 어머니는 남동생만을 데리고 나가겠다고 한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존재감 없음을 '실제'로 경험한 민주는 시현에게 "매사가 다 그래.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난 존재감이 없는 거야"(2회)라며 괴로워한다. 자신을 '투명 인간'처럼 대하는 사람들 틈에서 민주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낸다.
인기 많고 활기찬 준희
그러던 중 사고로 2023년에 살고 있는 활기차고 당당한 준희의 영혼이 민주의 몸으로 들어온다. 준희가 된 민주는 너무나 다른 대우를 받는다. 밝고 적극적인 준희를 친구들은 모두 좋아하고, 반 대항 농구 시합에서 활약하자 학교 전체의 '인싸'가 되기도 한다. 민주가 좋아하고 있던 시현도 달라진 민주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을 가져준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존재감을 빛내는 준희를 민주의 영혼은 유심히 관찰한다.
드라마에서는 이 장면들을 준희가 1998년의 노래를 들으며 꿈을 꾼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나는 준희의 모습은 민주가 꿈꾸던 자신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민주는 자신이 가지고 싶은 성격으로 바뀐 자신의 모습을 경험하고 이런 자기를 '이상적 자기'로 설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격만 바뀐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 상상하며 준희와 같은 자신이 되고자 열망했을 것이다.
정말로 깨어나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민주는 준희를 연기한다. 거울을 보고 준희처럼 표정 짓고, 웃어도 보며, 준희의 말투를 따라 하며 준희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아무리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민주가 준희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친구들은 예전 민주의 눈빛과 표정들을 읽어내고 민주에게 이렇게 말한다.
"민주 너 무슨 일 있어? 꼭 예전 민주 같다."
"너 성격 바뀐 뒤로 얼마나 좋았는데 그러니까 예전 권민주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
이런 말들은 민주에게 자기 자신을 부정당하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시현마저 민주가 준희가 아님을 알게 됐을 때 민주는 크게 절망하며, 자신은 절대 준희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준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약에 니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오늘 1998년 10월 13일에 내가 누군가한테 살해당한다면 난 그렇게 쉽게 잊혀지지 않을 거야. 내가 한심하다는 얘기도 안 할 거야. 아니 못하겠지." (12회)
살해를 당해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새기고 싶은 민주가 무척이나 안쓰러우면서도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렇다면, 민주야 너 스스로는 너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거니?'
나 자신이 나를 인정해 줄 때
아마도 민주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민주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은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는 건 민주 자신이 아니었을까. 내 성격이 이상하다고,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를 미워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존재감 없다'는 느낌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의 투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마음이 결국 드라마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의 씨앗이 되었다고 믿는다. 스스로를 살해당하게 함으로써, 인규가 죄를 뒤집어쓰고 자살을 하며, 시현이 살해당하는 그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되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 회 준희는 비극적인 미래를 막는 데 성공하는데, 이는 민주가 자기 자신을 수용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잠시 민주의 몸을 빌린 준희는 자신을 보고 있는 민주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그토록 힘들어하고 다 포기하고 싶어 했던 건 네가 나약하고 우울해서가 아니었어. 그건 네가 그만큼 세상에 거는 기대와 희망이 많기 때문이었어. 사실은 넌 온갖 희망들로 가득 차서 이 세상 누구보다 애쓰고 있었어."
이 말은 민주 스스로가 그동안 애써온 자신을 인정해 주는 말과 다름없었다. 이 말을 듣고 병원에서 깨어난 민주는 이제 더 이상 준희인 척하지 않는다. 원래 조용했던 민주로 살아가지만 스스로를 부정하지도 존재감 없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그리고는 인규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나 혼자라고 생각했던 것도 다 틀린 생각이었나 봐. 내가 내 옆을 보지 않아서 누가 있는지 잘 몰랐었나 봐."
이는 민주가 자기 자신을 미워했던 마음과 타인 역시 자신을 그렇게 볼 것이라는 투사를 거둬들이고 스스로를 존중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자신을 수용한 민주의 미래는 분명 준희가 알던 그 비극적인 미래와는 다르게 펼쳐졌을 것이다.
드라마 속 민주만이 아니다. "존재감 없는 성격을 고쳐달라"며 상담실을 찾는 내담자들을 만나면 나는 성격엔 옳고 그름이 없음을 이야기해 준다. 대신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왜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지를 함께 탐색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내담자들은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내가 나를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게 만든 우리 사회가 문제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애써온 스스로를 수고했다며 다독여준다. 이렇게 그토록 못마땅했던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존중해 주는 순간 존재감을 느끼곤 한다.
<너의 시간 속으로>의 민주는 이런 여정을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아닌가 싶다. 지금 '존재감'이 없어 괴롭게 느껴진다면, 민주를 기억하며 다음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어떨까.
'지금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