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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Oct 29. 2023

'느린 아이, 빠른 아이' 이 말이 낳은 비극

[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90] ENA  <유괴의 날> 로희가 알려준 것 

 우리는 천재에게 열광한다. 특히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어린이의 모습에 감탄을 하곤 한다. 이런 아이들을 찾아내 보여주는 TV프로그램은 종종 화제가 되고, 출연한 아이들은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최근엔 영재고에 조기 입학했던 한 영재 아이가 자퇴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와 관련된 일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늘 불편함이 밀려왔다. 오직 아이의 능력에만 주목하고 정서적인 면은 간과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어린 시절부터 '능력'으로만 주목받고 자란 아이가 어떤 심리적 경험을 하고 있을지 걱정도 됐다.


 25일 종영한 ENA 드라마 <유괴의 날>을 시청하면서도 내내 그랬다. 정해연 작가의 소설 <유괴의 날>을 원작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아마도 이런 한국적 풍토에서 만들어졌을 테다. 드라마 속 어른들은 아이를 영재로 키워내는 것을 넘어서 뇌를 조작해 천재 아이를 만들어 내려한다. 어른들은 그 아이를 욕망하고, 아이는 희생양이 된다.


 나는 <유괴의 날>의 인물들이 천재 아이에게 투사하는 욕망들이 마치 현실의 증폭처럼 보였다. 그 면면들을 살펴본다.


   

▲ 따뜻한 유괴범과 천재소녀 로희의 이야기가 펼쳐진 드라마 <유괴의 날>의 한 장면. ⓒ ENA


욕망의 수단인 아이


 로희(유나)는 천재다. 아버지 최진태 박사는 그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연구과제인 '천재 소녀 프로젝트' 그러니까 아이의 뇌를 조작해 천재로 만드는 연구를 로희를 통해 완성해 간다. 그러던 중 아내와 함께 살해당하고, 로희는 자신의 딸 희애(최은우)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접근한 명준(윤계상)에게 유괴된다. 명준은 비록 유괴범이지만 로희를 따뜻하게 대하고, 부모를 잃은 로희는 명준과 함께 도망 다니며 살인사건의 전말을 풀어간다.


 그런 가운데 로희를 둘러싼 어른들의 욕망이 펼쳐진다. 최진태 박사의 연구를 도와온 모은선 박사(서재희)는 발달이 느린 자신의 딸을 위해 로희를 간절히 원한다. 로희의 비밀을 알아내 자신의 아이를 구하고픈 은선은 로희를 '인류의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투자가 제이든(강영석)은 돈을 위해 로희를 필요로 한다. 로희를 조직에 넘기고 거액을 챙기는 게 그의 욕망이다. 반면, 로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어른들도 있다. 최진태 박사의 유산을 노리는 로희의 친인척들은 로희가 유괴로 인해 사망했다는 거짓 뉴스가 사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실, 로희를 지켜주려 하는 명준도 처음 로희에게 접근한 동기는 결국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똑똑한 로희는 이를 간파하고 "날 위해서라고? 웃기지 마. 아저씨 딸을 위해서잖아. 난 안중에도 없잖아. 처음 데려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날 걱정한 적 없잖아"(4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드라마 속 인물들은 로희를 이용해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 한다. 아마도 많은 시청자들은 이런 모습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인물들의 모습이 현실의 극단적인 버전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내 아이가 영재였으면, 공부를 잘했으면, 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돈을 잘 버는 직업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지, 그리고 그런 아이를 통해 내가 뿌듯해지기를 바란 적이 없었는지를 말이다. 아마도 아이가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기보다 똑똑하고 공부 잘하기를 바랐던 순간이 더 많았을 것이다.


느린 아이 빠른 아이 그리고 평범한 아이


 그렇다면 왜 이들은 천재 아이를 그토록 바라는 걸까. 드라마에는 그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제이든과 최진태 박사의 유족들이 보여주는 물질에의 숭상, 과학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능력을 증폭시키려는 오만함, 그리고 내 아이가 나은 삶을 살게 하려는 욕망 등이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이 모든 욕망이 '착한 아이'도 '밝은 아이'도 아닌 '천재 아이'를 향하는 걸까?


 나는 그 이유가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바로 '느린 아이 혹은 빠른 아이'라는 표현이다.


 8회에는 은선과 그의 딸 별이의 사연이 나온다. 별이를 영어 유치원에 다니게 한 은선은 유치원 원장으로부터 별이가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다. 은선은 아이가 힘들어한다는 말을 듣고도 "사례를 하겠으니 별이에게 신경을 써달라"고 읍소하고 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느려요." 이에 충격을 받은 은선은 동료 의사에게 별이를 평가받게 하고 "인지능력이 낮고 과잉행동이 나타난다"는 진단을 받는다. 은선은 '느린', '인지능력이 낮은' 이 표현들에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로희 프로젝트를 완수해 자신의 딸을 '빠른', '인지능력이 높은' 아이로 바꾸는 데 집착한다.


    

▲ 모은선 박사는 '발달이 느린' 자신의 아이 별이를 위해서 천재소녀 로희의 비밀을 알아내려 한다. ⓒ ENA


 나는 이 장면이 사람들이 천재 아이에게 욕망을 품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이가 느리다, 빠르다'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 말속에는 아이들의 특징을 '저마다의 개성'으로 보아주지 못하고 비교하고 평가하는 시선이 전제되어 있다. 사실 국가에서 실시하는 영유아건강검진 때부터 우리는 또래 아이들과 비교한 그래프 상에서 자신의 아이의 위치를 파악한다. 이는 교육 현장에서 더욱 확대되고, 그렇게 우리는 아이가 느린지 빠른지를 평가하는 시선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환경 속에서 많은 부모들은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느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발달이 빠르기를 소망한다. 여기에 한국 특유의 학력중심의 능력주의가 더해져 '인지능력'이 빠른 것이야말로 최고의 축복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니 사람들은 각자가 개별적이고도 통합적인 존재다. 인지와 정서, 신체, 영적인 부분이 모두 저마다 다르고 그 조합으로 한 사람의 독특함이 형성된다. 이 독특함은 빠르고 느린 것으로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진실을 종종 잊는다.


 '평범하다'는 말도 실은 비교에 의해 중간정도의 모습으로 산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나는 드라마에서 명준이 로희를 위해 "평범하게 살게 하고 싶다"고 말할 때도 불편했다. 아이의 개별성을 존중한다면 '평범하게'가 아니라 '로희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 아닐까.


진정으로 아이를 위하는 길 


▲ 형사 상윤(박성훈)은 범죄 자체보다 로희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며 행동한다. ⓒ ENA


그렇다면 정말 아이들이 바라는 건 무엇일까. 11회 로희는 체포되는 명준에게 이렇게 말하며 오열한다.


"난 아저씨와 같이 있는 게 너무 좋단 말이야. 나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고. 내가 배고픈지 졸린 지 심심한지 그런 거에 집중하는 사람이라고."


 바로 이런 것일 테다. 다른 아이들보다 빠른지 느린지 재보고, 능력을 키우라고 말하는 대신 배고픈지 졸린 지 심심한지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 말이다. 지금 여기서 아이에게 필요한 정서적, 생리적 욕구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이를 충족하도록 함께해 주는 것. 이런 것들을 돌봐주면, 아이들은 이를 토대로 저마다의 속도대로 인지능력도, 신체적 능력도 발달시키고 나름의 개성을 지닌 개별적인 통합적인 사람으로 자라날 것이다.


 다행히도, <유괴의 날>에는 이를 알아주는 어른들이 등장한다. 유괴범이지만, 아이의 시선에서 로희를 바라봐주는 명준, 로희가 천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동물원 울타리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며 로희를 지켜주려는 변호사 택균(우지현)과 형사 상윤(박성훈), 심지어 냉정한 킬러 호영(김동원)조차 로희의 배고픔 앞에서는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이런 모습들은 저마다 품은 욕망과 상관없이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는 진정으로 아이를 돌보고 보살피는 그런 양심이 존재함을 보여줬다.


 드라마의 말미 로희는 이런 마음을 저버리지 않은 어른들의 도움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시작한다. 아마도 로희는 인지능력뿐 아니라 잠재되어 있던 사회성도 함께 키워가며 보다 '로희답게' 성장해 나가지 않을까. 드라마의 해피엔딩은 '빠르고 똑똑한 아이'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현실에서도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마음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줬다.


 "세상에 행복한 천재는 없대요. 엄마가 혼자 예측하는 미래가 별이한텐 아무것도 아닐 수 있잖아요."


 12회 로희가 모은선 박사에게 연구의 비밀을 전달하며 건넨 말이다. 내 아이가 '빠른지 느린지' 비교하는 마음에 사로잡힐 때 로희의 이 대사를 떠올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럴 때 진정으로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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