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99] JTBC <닥터슬럼프> 정우 vs 경민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삶의 쓴맛을 경험 중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JTBC 드라마 <닥터 슬럼프>. 이 드라마의 주인공 정우(박형식)를 지켜볼 때면 나도 모르게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의 이 구절이 흥얼거려지곤 한다.
정우는 하늘(박신혜)과의 사랑을 통해 힘든 시기를 헤쳐 나가고 있지만, 내겐 정우의 모습이 사랑으로 삶의 결핍들을 채워가기보다는 자신의 결핍들과 이별하며 애도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정우는 상실을 수용함으로써 오히려 앞으로 나아간다.
반면, 정우의 과외교사이자 선배 의사 경민(오동민)은 정우와는 반대의 선택을 한다.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애를 쓰지만, 결국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고 만다.
<닥터 슬럼프>의 정우와 경민이 보여준 인생의 결핍과 상실, 그리고 이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살펴본다.
정우가 잃은 것들
드라마의 시작 지점. 정우는 모든 것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부와 명예, 대중의 인기는 물론 의사로서 진정성까지 갖춘 정우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다. 학창 시절에도 늘 '인싸'였던 정우는 삶의 정점 같은 순간에 의료 사고에 휘말려 의사로서 닦아 놓은 모든 것을 잃는다. 그리고 하늘을 만나 삶의 쓴맛을 나누며 서서히 회복되어 간다. 다행히도 정우가 겪은 의료 사고의 진실은 곧 밝혀지고 정우는 억울함을 벗는다. 또한, 하늘의 도움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천천히 극복해가며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즈음이면 정우는 모든 것이 해결된 깔끔한 삶으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우는 사건이 해결된 후에 더욱 혼란스러워하고 슬픔에 잠긴다. 14회에는 하늘의 어머니 앞에서 "힘들다"고 울기도 한다. 아마도 이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자신의 상처와 결핍들을 더 진하게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정우의 말처럼 그는 '늘 부모의 우선순위가 되지 못한 채' 지냈다. 자신들의 성취가 가장 중요한 그의 부모는 정우 역시 성취를 통해 자신들의 업적을 빛내 줄 도구로 대한다. 학창 시절 정우가 빈혈로 쓰러졌을 때 학교에 와 "고작 빈혈로 불러내냐"며 화를 내던 정우의 어머니는 정우가 위기를 겪을 때도 "아빠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 하라"라고 할 뿐이었다. 힘들 때조차 자신을 도구로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결핍을 강하게 상기시켰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런 정우 곁엔 과외교사로 인연 맺은 경민이 있고, 정우는 부모 대신 경민에게 의지하며 지낸다. 하지만, 이 역시 크나큰 상실로 되돌아온다. 경민이 자신을 힘들게 한 음모에 가담되어 있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민은 교통사고로 인해 실제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 상실은 정우에겐 매우 큰 무게로 다가왔을 것이다. 경민에게 받았던 사랑이 진심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랑의 상실, 그리고 실재하는 존재로서 경민을 상실한 두 겹의 상실이 된다. 게다가 경민이 자신의 부모에게 상처받았음을 알게 되고 다시 한번 부모에 대한 신뢰까지 잃게 된다. 이런 상실 때문에 정우는 비록 현실이 제자리도 돌아왔음에도 쉽게 편안해지지 못한다.
정우가 결핍을 대하는 태도
부모가 무조건적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삶의 자양분이 된다. 하지만 부모도 한 인간으로서 가진 심리적 역동과 결핍들 때문에 완전하게 그 사랑을 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어린 시절'을 원망하고, 그 결핍을 성인이 된 후에라도 채워 넣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때로는 성인이 되어 만나는 다른 친밀한 이들에게 이런 사랑을 채워달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특정 물질이나 관계 혹은 성취에 중독되는 방식으로 채우려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정우는 결핍된 부모의 사랑을 채우려 들지 않는다. 하늘이 부모에 대해 물었을 때 정우는 이렇게 답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잖아. 나는 그게 부모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대신 그거 빼고 다른 것들을 많이 가졌으니 그 가진 거에 감사하고 집중하도록 노력했지. 그랬더니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랬어." (11회)
이는 정우가 부모의 사랑이 결핍된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갖지 못한 부모의 사랑을 갖기 위해 애쓰거나 한탄하기보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결핍 중 하나로 의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정우는 밝고 진정성 있는 삶을 살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의료 사고 후 경민을 잃는 또 한 번의 커다란 상실의 아픔에 대해서도 정우는 피하려 하지 않고 복잡한 내면을 수용해낸다.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벼랑 끝으로 밀고 간 부모님을 원망해야 하는지 그렇다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그 사람을 미워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못 잡겠더라고. (...) 미우면 미운대로 이해가 되면 되는대로 그렇게 시간을 보내보기로 했어." (14회)
이렇게 자신의 슬픔을 무마하기 위해 경민을 나쁜 사람을 몰지도, 그렇다고 무조건 용서하지도 않는다. 그저 양가적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그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런 수용적이고 열린 태도 덕분에 정우는 그런 부모와 지내면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사랑의 결핍을 굳이 하늘로부터 채우려 들지 않았기에 하늘과의 관계 역시 잘 가꾸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결핍을 메우려고 한 경민
반면 경민은 달랐다.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경민은 의대 시절 정우 집에서 숙박하며 정우의 입시를 돕는다. 정우의 부모는 늘 그렇듯 경민을 '물건'처럼 대하고, 경민은 자신과 비슷한 취급을 받으며 자란 정우에게 안쓰러운 마음을 갖는다.
하지만, 정우 부모님의 냉랭한 태도, 특히 자신의 아버지가 위태로울 때조차 성적만 챙기는 정우 어머니의 태도에 경민은 큰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그 상처는 정우와 비교하는 마음을 키우고 경민은 정우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널 보면 내가 부족한 사람임이 느껴져 신경 쓰여." (13회)
경민이 이 마음을 알아차린 후,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을 인정하고 다른 가진 것들을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민은 정우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결핍을 인정하기보다 어떻게든 채우고자 애를 쓴다.
타인을 이용하고, 옳지 못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부와 명예를 얻으려 하고, 때로는 정우를 해치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리기도 한다. 경민은 정우에 대한 마음에 갈등하기도 하지만, 결국 결핍을 메우고자 하는 욕망이 앞섰던 그는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남기고 자신도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고 만다. 즉,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애쓰다 타인과 자기 자신 모두를 망쳐버린 것이다.
지금 우리는 삶의 결핍과 상처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정우처럼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애도하며 살고 있는지, 경민처럼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를 쓰며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았으면 좋겠다.
어떤 관계도 어떤 인생도 완전하지는 않다. 누구도 완전한 사랑을 받고 성장하지는 않으며, 간절히 바라던 꿈을 모두가 이루는 것도 아니다. 충만하고 즐거웠던 시간도 결국엔 끝이 나고 우리는 좋은 날들 역시 그리워하며 지내게 된다. 결국 삶이란 김광섭의 노래처럼 '이별하며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삶에서 결핍을 수용하고 이별과 상실을 애도하는 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묵묵히 수용하고 온전히 느끼며 지내다 보면 그 그리움과 애틋함 마저 긍정하게 될 날이 오게 되지 않을까. <닥터 슬럼프>의 하늘 어머니의 이 대사처럼 말이다.
"우리 그리움은 생각보다는 행복하다." (14회)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