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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고정관념 뒤집는 이 연애를
응원합니다

[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118] SBS <나의 완벽한 비서> 지윤-은호

by 주연 Feb 09. 2025

 나는 드라마 마니아지만, 로맨스 드라마에는 심드렁한 편이다. 특히 전형적인 이성애 커플의 연애가 주를 이루는 드라마는 좀처럼 몰입해서 보기가 힘들다.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가 늘긴 했지만, 이성애 관계에서만은 전통적인 성별 고정관념을 따르는 모습들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연애 코드만 등장하면 부활하는 가부장 사회에서 규정한 남녀관계의 패턴들이 늘 답답했다.


 이런 내가 요즘 이성애 커플의 '찐' 연애에 빠져들고 말았다. 바로 SBS <나의 완벽한 비서>의 지윤(한지민)-은호(이준혁) 커플이다. 워커홀릭 CEO 지윤과 그의 섬세한 비서 은호의 연애담이 큰 줄기인 이 드라마는 여성이 더 높은 지위에 있고, 남성이 비서 역할을 한다는 설정뿐 아니라, 각자의 캐릭터 그리고 연애 관계 자체에서 성별 고정관념을 전복한다.


 그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매력적이다. 원래부터 정해진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은 없다는 걸 보여주는 이 커플의 연애를 탐구했다.


돌보는 남자 은호


▲ 은호는 '돌보는 남자' 다. SBS▲ 은호는 '돌보는 남자' 다. SBS


 7살 딸 별이(기소유)를 혼자 키우는 '싱글 대디' 은호는 한 마디로 '돌보는 남자'다. 딸이 최우선인 은호는 별이가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걸 알았을 때, 상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육아휴직을 한다. 이후 회사로 복귀한 은호는 이웃과 품앗이를 하면서 살림도 육아도 척척 해내고, 회사에서도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육아휴직을 빌미로 불화하게 된 상사의 모략으로 결국 해고된다.


 이런 은호가 취업한 곳이 바로 헤드헌터 회사 피플즈 대표 지윤의 비서 자리다. 깐깐하고 지독한 워커홀릭인 지윤은 일에서는 완벽주의자지만, 일상에선 실수투성이다. 책상은 서류로 덮여있어 바쁘면서도 물건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툭하면 책상이나 문에 부딪히며, 직원들 이름조차 외우지 못한다.


 은호는 비서로서 지윤의 주변을 늘 살피고, 지윤이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 돕는다. 서류를 분류하고, 자료를 찾아주며, 일정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칠판에 적어둔다. 지윤이 자주 부딪히는 곳에는 안전장치를 달아두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다. 그는 지윤과 식사를 할 때면, 지윤의 머리카락에 음식이 닿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 둔 헤어밴드를 슬쩍 건넨다. 4회 편의점 장면에서는 지윤이 학생들이 먹는 컵라면에 시선을 두는 것을 보고는 즉석식품으로 요리를 해주기도 한다.


 은호가 '감응' 능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임을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감응'이란 타인의 욕구나 필요를 알아차리고 이에 응답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돌봄 제공자인 여성에게 요구되는 능력이었다. 가부장제의 시선으로 본다면 은호의 이런 모습은 남자답지 못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여겨질 만한 부분들이다. 하지만, 나는 상대를 배려하고 공감하며 돌보는 남자 은호가 그 어떤 캐릭터보다 멋져 보였다. 온라인상의 반응을 보면, 이런 은호의 매력에 빠진 이가 나뿐만은 아닌 듯하다.


거침없는 여자 지윤


▲ <나의 완벽한 비서> 중 한 장면 ▲ <나의 완벽한 비서> 중 한 장면 


 반면, 워커홀릭 지윤은 시선이 온통 일에만 집중돼 있다. 실수한 직원은 매몰차게 잘라내고, 야근하면서 피자를 먹고 있는 직원들을 보면서 "일도 안 끝났는데 피자가 넘어가나"(3회)라며 한심해한다. 지윤에게 중요한 건, 후보자를 놓치지 않고 성과를 달성하는 것뿐이다. 이처럼 주변을 배려하기보다 목표에 집중해 나가는 모습은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적 가치로 여겨져 왔던 것들이다. 하지만, 성취 지향적인 '여성' 지윤의 모습은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지윤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전통적인 여성다움을 따르지 않는다. 지윤은 은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애쓰지만 은호와 함께 음악회를 본 날 더 이상 마음을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런 자신을 바라보며 "망했네"라며 감정을 인정한 지윤은 7회 은호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유은호 씨 좋아해요. 그래서 자꾸 나답지 않게 행동해요. 일에도 영향을 끼치고 그래서 잠깐 거리를 두면 어떨까 했어요. 이건 내 문제니까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요."


 상대방에게 어떻게 잘 보일까 고민하며 고백을 이끌어 내려하거나, 거절당할까 두려워 속앓이 하거나, 관계를 단절하는 기존의 여성 캐릭터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연애를 시작한 후에도 지윤은 은호를 보고 종종 이렇게 혼잣말한다.


 "귀여워 죽겠네."


 주로 남성이 여성에게 던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윤이 남성인 은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모습이 참 자연스러워 보였다. 먼저 고백하고, 남자친구를 '귀여워'하는 여성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남녀의 연애


▲ 싱글대디와의 연애지만 지윤은 주변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다. SBS▲ 싱글대디와의 연애지만 지윤은 주변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다. SBS


 이처럼 이들은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거스르며 연애를 시작한다. 사회적 통념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않았기에 연애에서도 주변의 시선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지윤의 고백 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은호는 선배 강석(이재우)으로부터 "상대방이 원하는 건 배려가 아니라 솔직한 네 마음"이라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낸다(7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둘은 이렇게 다짐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서로 좋아하는 마음만 봐요." (8회, 지윤)


 그 후 이들은 '비밀연애'를 하지만, 눈치채고 물어오는 미애(이상희)와 정훈(김도훈)에게는 솔직하게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말한다. "은호가 애 딸린 남자여서 좀 그렇다"는 미애에게는 "그게 왜 흠이야?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인데. 난 지금의 은호 씨가 좋아"라고 일침을 날리기도 한다(8회).


 이렇게 솔직 담백하게 관계 속으로 뛰어드는 이들이 무척 용기 있어 보였다. 사실 연애는 관계의 '취약성'을 감수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취약성에 대해 연구한 학자 브레네 브라운에 따르면, 사람들이 가장 취약해지는 지점이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음'을 인식할 때라 했다. 사람들은 이를 피하고자 감정을 회피하거나, 완벽주의의 늪에 빠지거나, 사회적 통념에 자신을 끼워 맞춰 '척' 하는 '갑옷'을 두르고 산다. 그러나 이런 갑옷들을 벗어던지고, 솔직한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더 잘 연결될 수 있다. 특히 연애 관계는 진심을 보이면 상대방과의 관계가 끊어지거나 어색해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지윤과 은호는 전통적인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갑옷'을 이미 벗은 상태였다. 이미 사회에서 규정한 갑옷 하나를 벗어둔 이들은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관계의 취약성을 보다 잘 수용하고,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함께하면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써 왔던 다른 갑옷들도 하나둘 벗어던지고 자신의 다른 모습들을 찾아간다.


 지윤은 은호와 연애하면서 회사 직원들의 이름을 바르게 불러주기 시작한다(9회). '일'이라는 갑옷을 입고 주변을 차단했던 지윤이 다른 사람들과도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던 남성들이 남성다움의 갑옷을 벗고 서서히 타인에게 관심을 두는 모습과 유사했다.


 은호는 오직 딸만 바라보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구와 즐거움도 돌아보기 시작한다. 은호의 모습은 자신보다 가족을 먼저 돌보던 여성들이 스스로의 욕구를 돌보면서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것을 떠올리게 했다. 이들은 이렇게 연애를 통해 확장돼 가는 모습마저 전통적인 성별 관념을 전복시킨다.


 드라마가 중반을 지나면서 그간 평탄했던 둘의 관계에 조금의 변화가 예상되기도 한다. 어릴 적 겪었던 화재 사고의 상처를 전면으로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우리 사회와 정신을 관통하는 가장 오래되고 두꺼운 갑옷 중 하나인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에 갇히지 않은 이들이기에, 이런 상처 역시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을 것임을 말이다.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개방하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갈 수 있을 것이다.


 돌보고 감응하는 남자와 목표 지향적인 여자. 전통적인 성별 고정관념과 반대로 연애하는 이들의 모습을 볼 때면 그 신선함에 마음이 설렌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따르지 않는 이들의 연애를 응원한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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