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129] tvN <폭군의 셰프>
'먹방'이 생겨난 후, 그 유행이 끝나지 않고 있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을 주제로 한 예능 프로그램들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고, 유튜브에서도 '먹방'은 늘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다. 드라마도 예외가 아니다. 꽤 많은 드라마에서 음식은 인물들을 이어지게 하거나 스토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곤 한다. 대중문화 콘텐츠에 끊임없이 '음식'이 등장한다는 건 음식이 단지 '배를 채우고 먹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tvN 드라마 <폭군의 셰프>는 '음식'을 중심에 둔 판타지 사극이다. 조선시대 '폭군' 이헌(이채민)은 미래에서 온 셰프 지영(임윤아)의 음식을 맛보면서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헌이 변해가는 과정에는 지영의 음식이 큰 역할을 했다. 어떻게 음식은 그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을까. 그 심리적 여정을 따라가 봤다.
음식과 마음
상담 및 임상 심리학에서 음식은 섭식장애와 관련해서 연구되어 왔다. 신경성 폭식증, 거식증 등으로 대표되는 섭식장애는 다이어트나 외모에 대한 사회적 압박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섭식장애의 일부 원인일 뿐이다. 섭식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 들어가 보면 과도한 정서적 억제, 심리적 외상, 완벽주의 등 다양한 심리적 배경들이 함께 한다.
특히, 섭식장애는 결핍된 욕구와 관련되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다. 심리학자 하인즈 코헛은 이런 존재를 '자기 대상'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자기 대상'을 통해 심리적 욕구를 충족하고, 안정감을 가지며 내가 나라는 감각들을 유지해 간다. 유아기에는 일반적으로 주양육자가 '자기 대상'이 되어주고, 아이는 성인 되어 가면서 자기 대상을 점차 내면화하게 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자기 대상은 여전히 필요한데 이때는 내면화한 양육자뿐 아니라 다른 타인이나 책, 위인 등 다양한 것을 자기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자기 대상을 박탈당하면 여러 가지 심리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충분히 내면화하기 전에 자기 대상을 상실할 경우, 다양한 욕구들을 처리하기 어렵게 되고, 이는 정서적인 허기로 이어진다. 이 허기를 메우기 위해 쉽게 접근하는 것이 바로 음식이다. 먹으면서 배를 채우는 것을 통해 허기를 달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가 어느 정도 '먹는 것'으로 정서적 충만함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 행위가 극단적으로 이어져 지나치게 많이 먹거나, 먹고 나서 구토를 하거나, 음식을 거부하면 섭식장애가 된다.
음식을 통해 소화된 어머니라는 '자기 대상'
드라마 속 절대 미각을 지닌 임금 헌은 어릴 적 어머니(이은재)를 정치적 음모로 잃었다. 어린 헌은 어머니가 폐비가 되어 끌려 나가는 장면을 숨어서 목격하는데 이는 갑작스러운 '자기 대상'의 박탈이자 엄청난 '심리적 외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장면을 목격한 것을 발설해서도 안 되고, 힘든 내색도 해서는 안 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정서를 과도하게 억제하며 살아내야 했다. 헌은 섭식장애의 심리적 원인이 되는 정서적 허기, 심리적 외상, 정서 억제를 모두 감당하며 살아온 셈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헌은 '섭식장애'를 앓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이런 정신적 어려움을 '분노 폭발'로 해소하려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서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자극을 받으면 그는 걷잡을 수 없이 화를 내며 폭력적으로 변한다. 이에 그의 '절대 미각'은 수라간 숙수들에겐 공포의 대상이다. 언제 트집을 잡힐지 모르기에 늘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런 헌 앞에 미슐랭 3 스타 출신 셰프 지영이 나타난다. 귀녀가 출몰한다는 개기일식 날 타임 슬립한 지영은 '귀녀'로 오인받고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헌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매번 위기를 벗어난다. 헌은 분노에 차 있을 때조차 지영의 음식을 먹으면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이는 지영의 음식이 '자기 대상'이었던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헌은 평소 어머니가 폐위되던 장면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그런데 지영의 음식을 맛보면서 떠올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다르다. 그는 음식을 먹여주던 따뜻한 어머니를 떠올리는데(3회) 이는 긍정적 자기 대상으로서의 어머니를 소환한 것이 된다. 소환된 부드럽고 따뜻한 자기 대상은 이헌의 분노와 불안, 긴장을 낮춰주었을 것이다.
이헌은 지영의 음식을 맛보면서 '먹여달라' 하기도 하고, 어머니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수라간을 향하기도 한다(5회). 이는 헌에게 지영의 음식이 자기 대상의 매개체가 되어 줌을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자기 대상을 찾은 폭군의 변화
이제 마음은 지영을 향한다. 헌은 지영에게 사랑을 느끼는데 그 관계가 그동안 다른 여인들과 맺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내치던 헌은 반대하고, 막아 서고, 자기주장을 하는 지영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정서적 안정감을 유지해 간다. 이는 헌이 지영을 단지 연애 상대가 아닌 '자기 대상'으로 삼았음을 의미하는 모습들이었다. 음식으로 정서적 허기를 채운 그가 마침내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자기 대상'을 찾은 것이다. 그러자 헌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시작한다.
명나라 사신단이 방문하기 전부터 무리한 요구를 했을 때, 헌은 신하들의 반대를 강단 있게 누르고 백성들을 위한 선택을 한다. 음식 경합을 벌이면서 사신단이 무례하게 행동할 때에도 감정보다는 전략으로 대처한다. 가끔씩 '버럭'하기도 하지만 분노를 바로 폭발시키지 않고 지연시키거나 참아내기도 한다. 이에 대왕대비(서이숙)는 "주상이 달라졌다"(10회)고 말하기도 한다. 11회에는 제산대군(최귀화) 일당이 헌의 분노를 유발해 역모를 꾀한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까지 가져와 그를 자극하지만, 이 때도 그는 지영의 만류에 화를 가라앉힌다.
나아가 그간의 폭력에 대해 반성하고 대왕대비에게도 화해를 청한다. 후에 제산대군의 공격을 받은 후 폐위되었을 때에도 욱하는 감정에 칼을 휘두르기보다는 '지략'을 써서 제산대군 일당에게 맞선다(12회). 비록 폐위되긴 하지만, 새로운 자기 대상 덕에 '폭군'으로 남는 길은 피해 간 셈이다.
나는 <폭군의 셰프>를 보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통해 건강한 방식으로 정서적인 허기를 채워갈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으며 정서적으로 편안해지면, 자연스럽게 결핍된 마음을 채워가게 되고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자기 대상'을 떠올리게 된다. 더욱 좋은 건 음식은 우리가 매일 일상에서 만나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정서적 위안을 얻기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나거나, 특별한 것을 찾지 않더라도, 매일 먹는 식사에 조금만 정성을 기울인다면 마음을 채워갈 수 있다.
그러니 오늘부턴 자신을 위해서 요리를 해보면 어떨까? 지영처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 정성스레 끼니를 챙긴다면 자기 자신을 보다 잘 돌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폭군의 셰프>를 시청하는 내내 나는 지영의 요리 장면을 보고 나면 끼니를 더 잘 챙기고 싶어지곤 했다. 그리고 잘 차려 먹고 나면 마음이 충만해지곤 했다. 음식을 주제로 한 대중문화 콘텐츠들의 인기가 일상에서 스스로를 보다 잘 돌보는 힘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