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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악'이 되지 않으려면

[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131] KBS2 <은수 좋은 날>의 은수

by 주연

나는 살아오면서 욕을 입 밖에 내 본 적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재수 없어" 정도가 내가 떠올리는 최고의 욕이었다. 그런데 갱년기에 접어든 요즘 짜증이 날 때면 자꾸만 거친 단어들이 입에서 맴돌곤 한다. 얼마 전 바쁜 아침 시간에 급히 커피를 타다가 컵을 깨뜨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내뱉고는 컵을 깬 것보다 더 놀라고 말았다. "씨*!"


이 일이 있은 얼마 후 나는 KBS2 드라마 <은수 좋은 날>에서 똑같은 장면을 보았다. 늘 상냥하고 선한 미소를 짓고 살던 은수(이영애)는 오래된 주택의 샤워기가 고장 나 고치다 물벼락을 맞자, 거울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씨*!" 그때부터였다. 내가 <은수 좋은 날>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착하고 성실하게만 살아온 은수가 가족의 위기 앞에 마약 유통에 손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은수 좋은 날>. 드라마 속 은수가 변해가고 또 갈등하는 모습은 내가 몰랐던 나의 어두운 면을 돌아보게 했고,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내가 바라는 '나'로 살아가기


은행에 다니는 남편 도진(배수빈)과 중학생 딸 수아(김시아)를 둔 은수는 풍요롭진 않지만 행복하다 여기며 살아간다. 은수는 마트 캐셔로 일하면서도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지금처럼' 사는 것에 만족해한다. 늘 상냥하고 성실해 주변 사람들의 기분까지 좋게 하는 재주가 있다. 웬만한 일엔 화를 잘 내지도 않는데, 해고되기 전 은행에서 일할 때도, 진상 손님들마저 고객으로 만들어 버리는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짝으로 지내온 친구 여주(오연아)는 이런 은수를 보며 "평점심 대박"(4회)이라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아마도 이는 은수가 이상적으로 생각해 온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은수는 6회 보호수 나무 아래서 경(김영광)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고 싶은 거 말고 듣고 싶은 건 있었어요. 부모가 없어도 대학 못 갔어도 정규직 못됐어도 은수야, 너 참 잘한다, 뭐든 잘한다 그런 말."


이 대사는 은수가 성실하고 상냥하게 살아온 이유를 잘 알려주는 말이었다. 자신의 결핍을 '칭찬'으로 보상받고 싶었던 은수는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 되어 이 욕구를 채우고자 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은수는 이를 실천하며 살 수 있었고, 이는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은수는 마약 유통에 휘말리기 전까지 이런 모습이 자신의 전부라 여기며 살아왔을 것이다.


내가 몰랐던 나의 어둠


IE003539801_STD.jpg ▲은수는 "참 잘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성실하고 선하게 살아온다. KBS2


이런 은수에게 커다란 위기가 닥친다. 성실한 가장이었던 도진이 비트코인에 투자해 빚더미에 앉고 집마저 경매로 넘어가는 처지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도진은 췌장암 진단을 받고, 치료비조차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바로 그때 은수네 집에서 마약 가방이 발견된다. 평소의 은수라면 이 가방을 가지고 경찰서로 갔겠지만, 은수는 다른 선택을 한다. 치료비 마련을 위해 클럽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은수는 마약을 유통시키는 경(김영광)을 찾아가 동업을 제안한다. 그렇게 어둠의 세계에 입문하면서, 은수는 그동안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만나기 시작한다.


2회 은수는 클럽 고객이 자신을 위협하자 전기 충격기를 휘두르며 "나도 너 봐서 기분 뭣 같거든? 와 보라고 이 쫄보 새끼야!"라고 한바탕 욕을 해준다. 그리고는 "와, 내가 욕을 다 하네. 세상에 진짜." 그러면서 속 시원해한다. 녹물이 나오는 욕실에서 "씨*"이라고 욕을 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3회). 다량의 거래를 제안해 놓고는 돈까지 들고 튀어버리는 약쟁이들을 따라가면서 "이 새끼들아"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도 한다(4회).


그러던 어느 날 수아는 은수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다(5회).


"되게 좋은 애인데 어떨 때는 막 뾰족뾰족하고 시커메. 막 헷갈려. 걔가 좋은 애인지 나쁜 애인지 내가 얘를 좋아해야 되는지 싫어해야 되는 건지."


이에 은수는 이렇게 답한다.


"사람은 이 큐브 같은 거야. 우리는 평소에 이런 색만 보지만, 어떤 때는 이런 색도 있어. 누구에게나. 그런데 까만색을 처음 봤다고 뭐 그 사람이 아닌 게 되는 걸까? 그렇다고 이 까만색을 없애 버리면 그럼 그 사람은 온전히 그 사람인 거야?"


은수는 아마도 이때 자기 자신도 이렇게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검은 면'까지 수용하며, 통합해가고 있었던 셈이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알아차리고 이를 수용하는 것은 심리적인 건강함을 선사한다. 이 무렵 은수가 편안해 보였던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절망감과 악함


IE003539803_STD.jpg ▲은수는 마약유통을 하면서 숨겨두었던 날 것의 욕망과 어두운 면을 마주한다. KBS2


그런데 이 어두운 면이 '악'이 될 때가 있다. 바로 절망감과 만났을 때다. 절망감은 절실함과 상대적 박탈감이 만날 때 생겨난다. 내게 절실한 것을 누군가는 너무도 쉽게 얻게 되는 모습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때 우리는 절망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럴 때 내면의 어두운 면을 조절할 수 없게 된다.


은수가 마약을 이용하겠다 마음먹은 상황도 바로 그랬다. 남편의 생명과 가족의 일상을 지키는 최소한의 돈을 바라는 것마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마약 거래로 수십억을 쉽게 버는 모습을 본 은수는 자신의 어두운 면을 마약 거래에 이용한다.


경도 마찬가지다. 살인 누명을 썼지만, 가족조차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경은 깊은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휘림(도성우)에게 복수하기 위해 절박한 마음으로 마약을 유통해 돈을 모은다.


드라마 속 마약 유통의 온상인 '팬텀'도 상대적 박탈감과 절실함을 매우 잘 이용한다. 주로 취업준비생들을 '알바'로 고용해 마약 배달을 시킨 팬텀 사장 규만(원현준)은 이런 말로 아르바이트생들을 유인한다.


"억울하지 않아요? 평생을 개 같이 일해도 아파트 한 채 살 수 없는 세상. 이 세상은 우리한테 기회는 안 주고 뺏기만 하죠 근데 왜! 우리만 착하게 살아야 되죠?"


하지만, '악'에 대응하는 인간의 마음 역시 '절실하다'. 은수는 계속해서 선한 마음을 믿고 싶어 한다.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팬텀 조직원 동현(이규성)의 '잘 살고 싶어 했던' 마음을 기억해 낸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후에도 은수는 '가족의 안위'만 확보되면 일을 그만두겠다 여러 차례 다짐한다. 동현 역시 은수가 자신에게 잘해준 면들을 기억하며, 은수를 살리고 일에서 빠져나가 보려 한다.


이처럼 절망감이 '타인을 망치려는 마음'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선'을 향하는 내면의 절실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회 은수가 선택했듯 '한 번 선을 넘은 인간이라도 다시 그 선을 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절망감이 '타인을 망치려는 마음'과 만나면 그땐 손 쓸 수 없게 된다. 경찰 태구(박용우)가 바로 그런 경우다. 태구는 돈 때문에 가족을 잃은 후 아이를 되찾기 위해 마약에 손을 대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공평하지 않다'며 여러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돈과 마약에 집착하다 목숨을 잃는다.


IE003539800_STD.jpg ▲착하고 성실한 주부 은수가 마약유통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KBS2 <은수 좋은 날> 포스터 KBS2


'자신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건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다. 이것 또한 나라는 걸 내 소중한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백세희 작가가 쓴 문장이다. 정말 그렇다. 우리 모두에겐 어두운 면이 있다. 나와 드라마 속 은수가 욕을 내뱉고 속이 시원해졌듯이,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것은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때야 비로소 우리는 보다 온전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면의 어둠을 만나는 게 '악'이 되지 않는 사회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마음속 어둠이 타인을 헤치고 싶은 마음으로까지 나아가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한다면, 화가 나 욕을 하거나 날 것의 욕망들을 마주하는 것이 덜 두려울 것 같다. 또한, '어둠'이 '악'이 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에 타인의 그런 마음 역시 잘 받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보다 온전한 모습으로 서로를 수용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내면의 어둠과 날것의 욕망들이 '선'을 넘지 않도록 막아주는 사회야말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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