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132] tvN <태풍상사> JTBC <김부장>
"회사가 살아야 내가 사는 거니까" - <태풍상사> 1회
"자식의 탄생은 큰 경사입니다. 하지만 회사 없이는 저도, 제 자식도 존재할 수 없기에 저는 아내에게 친절하게 양해를 구하고 거래처로 향하겠습니다." -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2회
드라마 tvN <태풍상사>와 JTBC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이하, <김부장>) 에서 나온 대사다. IMF 시기를 지내는 중소 기업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태풍상사>와 IMF 시기에 입사해 대기업 부장이 된 김부장 낙수(류승룡)의 삶을 그린 <김부장>. 이 두 드라마의 인물들은 위의 대사를 실천하듯, '일'이 삶의 중심이 되어 살아간다. 특히, 두 드라마의 주인공인 태풍(이준호)과 낙수는 둘 다 회사에 매우 헌신하는 인물이다. 이들의 일상은 일 중심으로 돌아가고 회사에서의 관계와 업무가 다른 어떤 것들보다 우선한다.
그런데 그 결과가 사뭇 다르다. 태풍은 회사와 함께 성장하며 스스로를 찾아가지만, 낙수는 오히려 회사에서 내쳐지고, 후배들에겐 '꼰대' 소리를 듣게 된다. 똑같이 열심히 일하고 헌신해 온 두 인물이 이토록 다른 삶을 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조직에서의 영성'을 지니고 있는지가 둘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조직에서의 영성
'영성' 하면 신앙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심리학에서의 영성은 신앙과는 다르다. 심리학에서 정의하는 영성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초월적 존재와 연결감을 느끼며,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내적 자원을 의미한다. 종교가 없더라도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보다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를 추구하며 이를 통해 타인과 공동체와 연결감을 느낀다면 이 역시 영성이다. 이런 '영성'은 개인의 심리적 안녕감과 정신적인 건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연구됐다.
영성이 발달한 사람은 자신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본질적 가치를 성찰하고, 이를 타인과 세상, 나아가 초월적 존재(신)와의 연결감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간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성을 발휘하면 일에서도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게 되고 이를 통해 보람과 의미를 느끼게 된다.
이렇게 조직에서 자신의 영성을 실천하는 것을 '조직에서의 영성'이라고 한다. 구성원 각자가 자신이 추구하는 내면적 가치와 의미를 일에서 찾을 수 있을 때 구성원들은 보다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내재적 동기를 가지고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되고, 조직의 성장에도 더 기여하게 된다.
조직에서 영성은 '일터 영성'과 '조직 영성'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일터 영성'은 개인이 일에서 자신만의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조직 영성'은 조직 전체가 보다 궁극적인 가치와 목적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일터 영성'과 '조직 영성'이 모두 갖춰져 있을 때 '일 중심'으로 살더라도 삶의 질이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성 지닌 태풍
<태풍상사>의 태풍은 바로 이런 '조직에서의 영성'을 잘 실천하는 인물이다. 그는 한때 '오렌지족'으로 살기도 했지만, '태풍상사'를 평생 일군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IMF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회사를 맡는다. 그에게 회사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연결해 주는 영성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을 테다. 때문에 회사를 살리는 일은 그에게 단지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직원들 한 명 한 명 앞으로 통장을 만들어 줄 정도로 사람을 아끼던 아버지의 마음이 그에게도 중요한 가치가 된다. 때문에 태풍은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경영을 한다.
5회 사채 업자에게 모진 일을 겪은 안전화 '슈박' 사장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눈알'을 걸고 사채업자와 대결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아마 이런 영성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태풍은 현실은 생각 안 하고 '의로움'을 추구한다고 타박하는 미선(김민하)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주임님, 아무리 어렵고 무서워도 눈앞에서 죽어가는 그 사람, 그 살려달라는 사람, 그거 모른 척하면 안 되잖아요. 미안해요, 내가 믿음을 못 줘서. 근데 나는 늘 같은 선택을 할 거예요. 어쩔 수 없어요. 이게 나예요." (6회)
이는 태풍이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를 잘 알고 있으며 일에서도 이를 실천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태풍은 직원들 역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며 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상사맨이 되고 싶은 미선의 꿈을 응원하고, 실수를 하더라도 영업맨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마진(이창훈)을 끝까지 믿어주며, 각자가 지닌 강점을 일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업무를 배분한다.
이처럼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고, 서로 연결감을 느끼며 일하는 '영성'을 지닌 조직이기에 '태풍상사'의 직원들은 회사의 가치에 동참하며 '진심'으로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성 없는 김부장
반면 '김부장' 낙수는 회사에 헌신하지만 그 방향이 다르다. 낙수는 입사 시 본 면접에서 "다른 회사엔 원서도 내지 않았다"며 면접관의 환심을 산다. 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 말이 '진심'이 아니라 입사를 위한 '계산된 멘트' 였음이 드러난다(2회). 그렇게 대기업 ACT에 공채로 입사한 낙수는 25년을 '진심'이 아닌 '계산된 마음'으로 회사에 헌신한다.
통신회사인 ACT는 광고를 통해 '세상을 연결한다'는 가치를 강조하지만, 낙수는 이런 '가치'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회사에 오래도록 살아남아 임원을 다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실적을 올리고,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이다. 25년을 이런 식으로 열심히 일해 살아남았지만, 그는 결국 사고를 친다. '실적'만 생각하다 초고속망이 깔리지 않은 지역에도 초고속망으로 가입하게 하는 등 '대충' 일을 처리한 것이 화근이 되고 만다. 낙수는 결국 그토록 바라던 임원 승진을 눈앞에 두고 아산공장으로 좌천된다.
낙수의 이런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형에게 비교당하고, 학력과 학벌, 직업에 서열을 두는 사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됐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고, 가족들을 건사하기 위해 애써온 그는 "서울에 아파트 있고 애 대학까지 보낸 인생은 위대한 거야"(2회)라며 자신의 노력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물론, 낙수의 이런 모습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는 서열을 중시하는 가부장 문화 속에서 가족을 부양하고,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는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삶이기도 하다.
하지만, 낙수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하는 것이 '영성'은 아니다. 낙수가 '영성'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면, 일에서 '세상을 연결하고, 취약 계층에게 인터넷망을 제공한다'와 같은 의미를 찾고, 고객들과 연결감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회사의 다른 직원들을 보다 존중하며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낙수는 고객과도 회사와도 다른 직원들과도 연결감이 없다. 회사에서 살아남아 위로 올라가겠다는 '계산된 마음'이 이 모든 것을 우선한다.
이처럼 자기 자신. 회사, 그리고 다른 직원들, 심지어 가족과도 진심으로 연결될 수 없기에 낙수는 그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도 회사와도 점점 멀어지고 만다.
태풍과 낙수뿐만이 아닐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일터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고, 일을 중심으로 살아간다. 그 긴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 '영성'을 발휘할 수 없다면, 점차 일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낙수처럼 피폐해져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직에서의 영성'은 구성원 각자의 몫이기도 하지만, 조직 자체가 보다 궁극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구성원 각자의 잠재력과 가치를 존중하는 분위기를 형성할 때보다 잘 발휘할 수 있다. 그럴 때 '태풍상사'의 직원들처럼' 계산된 마음'이 아닌 '진심'으로 조직에 헌신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일하는 우리들 스스로도, 또한 우리가 속한 일터에서도 이 질문을 늘 마음에 품고 지냈으면 좋겠다. 6회 <태풍상사>의 차란(김혜은)이 미선에게 던진 바로 그 질문 말이다.
"뭘 위해 일 하는데?"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