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대신 매일 유언을 쓰고 있습니다. 물려줄 재산이나 나이가 많기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매일 연구를 하고, 실험 결과를 정리해 논문으로 발표하는 일을 합니다. 처음 주저자로 논문이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의 감정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가장 기뻤던 점은 내가 죽어도 내 이름과 업적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번 논문을 발표하다 보니 그런 감정도 점점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누군가 내 논문을 읽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 세상에 나라는 존재의 껍데기만 남겨놓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유언을 몇 줄씩 쓰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이면 다 쓸 줄 알았는데, 한 문장을 쓰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쓰다 보니 할 말이 계속 떠오르고, 혹시 수정할 기회가 없을까 봐 정성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평생의 숙제라고 생각하고 매일 조금씩 쓰고 있습니다.
유언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남기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답은 내가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왔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을지 모르겠지만요.
맞벌이하셨던 부모님 대신 저를 키워주셨던 할머니는 저에게 엄마 같은 존재였습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얼마나 많이 울었던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할머니가 떠나신 뒤 슬픈 마음이 들 때마다 항상 궁금했습니다. "나와 가족들은 이렇게 슬픈데, 할머니도 떠나면서 슬프셨을까? 아니면 홀가분하셨을까? 할머니의 삶은 내가 바라보는 삶과 같았을까?" 생각하다 보니 어느 날 슬픔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일 까요. 아니면 제가 바라보는 인간의 삶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답답한 무언가였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래서 저는 제가 바라보는 세상과 나의 삶이 어떤 것이었고,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남기고 싶어 졌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위해서, 그리고 떠나는 나의 마음이 홀가분해지기 위해서.
얼마 전, 소가 햄버거 패티가 되는 과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우 좁은 나선형 길을 따라 소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그 끝에는 어두운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을 통과한 소는 바로 죽음에 이릅니다. 한 소는 문 앞에서 죽음의 향기를 맡았는지 화들짝 놀라 빠르게 뒷걸음질 쳤지만, 뒤에서 밀려오는 소들에 의해 결국 그 문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영상을 본 뒤 한동안 슬픈 감정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슬픈 영화를 보고도 금방 잊는 저인데도 말입니다. 며칠을 생각한 끝에 그 슬픔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소의 모습이 내 삶과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선형 길을 따라가던 소들은 털 색깔부터 외모까지 다양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에 등장합니다. 그 후 우리는 기억도 못하는 짧은 자유의 시간을 거쳐 획일화된 교육을 받습니다. 마치 다양한 모습으로 들판을 거닐었던 소들이 똑같은 모양의 패티로 변해버리듯, 우리의 정신도 똑같은 모양으로 다듬어집니다.
가끔 우리는 모두 뇌의 주름 모양까지 똑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만들어진 세상 속에서 정해진 길을 가도록 강요받습니다. 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은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도소에 가거나 군 복무를 하거나 어딘가에 구속되어야 몸이 갇혀 있다고 인지합니다. 누군가가 내 생각의 방향을 직접적으로 정해주려 할 때 정신적으로 억압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런 상황이 없다면 우리는 자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저는 인간이 만든 문명사회를 부정하며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만든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항상 인지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유언을 통해 몸은 구속되었지만 정신만은 자유로웠던 삶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나의 소망은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도 정신적 자유인으로 존재하다가 다시 자연으로 홀가분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제가 여기 남길 이야기들이 그러한 삶을 사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