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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음? 살아있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는 무표정으로 사물에 비친 것을 바라보며 ‘이거 살아있냐?’라고 묻곤했다.

어떤 때는 ‘이거 누구냐? 이게..나?’(ㅎ)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거울도 잘 보지 않는다. 귀찮아서.


가디스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을 봤을 때는 ‘음?살아있네?’라고 느꼈다.


생명체에 비친 내 모습을 봤었어서 그런건가? 라고 생각했다. 나는 가디스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가디스는 내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겠지.

아이가 꽃을 영어로 세아려달라고 했을 때 나는 헷갈렸다. 내가 지금 나랑 놀고 있는건지, 본 적없고 앞으로도 볼 일 없는 꼬마랑 잠깐 놀아주고 있는건지. 가디스의 얼굴을 보고 웃은건지, 나를 보고 웃은건지. 너가 나인지, 내가 너인지까지 헷갈렸다.


가디스가 인도네시아어로 숫자를 셀 때 똑같이 따라했다. 아이는 내가 어눌한 발음으로 자신을 따라하는게 웃겼는지 자기 엄마를 바라보며 깔깔 웃었다.

엄마도 웃었다. 나도 웃었다.


웃을때는 너가 나인거 같고 내가 너인것 같았다.


눈동자에 비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특성, 그냥 나라는 존재 자체를 뛰어넘어서 ‘즐거움’이라는 형체가 없는 무언가로 보였다.

어딜가나 있는 도시 속의 거울에 비친 나는 항상 비교 분석의 대상으로 보였다.

내가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본다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형체나, 형체 속에 담긴 특징, 겉을 감싸고 있는 것들로 부터 남들이 나에 대해 유추해 판단할 것을 미리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가디스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얘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고 나를 보고 같이 웃기 위함이었다.


지나가나는 찰나에 비친 것에서 나는 사물이 비출 수 없는 것을 봤다. 인간의 생은 찰나라고들 하지 않는가.


찰나의 찰나.


찰나 속에 지나가는 찰나.

찰나가 비춘 것은 영원히 가슴에 박힌다.

형체는 늙고 죽지만 에너지와 정신은 영원하며 계승된다. 형체가 DNA를 남기는게 아니고, 형체가 담고 있는 에너지와 정신이 DNA를 남긴다. 라고 생각했다.


도시의 거울 속에 비친 내 형체까지 자랑스러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찰나에 비친 나의 모습은 나를 뛰어넘어 형체가 없는 에너지 였기에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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