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청령포에 갔던 멍충이
<왕과 사는 남자>
결국 나도 어머니에게 끌려가 보게 됐다. 젊은 친구들도 많고, 나이든 냥반들도 골고루 섞여 있으니 천만은 무난할 듯. 부러운 마음에 몇 글자 찌끄려보면.
제목이 이준익의 <왕의 남자> 카피 버전인데, 아마 둘 중 하나일 거다. ‘카피면 어때, 영화에 자신있어.’ 혹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천만 영화에 얹혀 가보자.’ 더 가능성이 높은 쪽이 있지만 그건 순전히 내 생각이고.
내용은 <왕의 남자>보다는 <자산어보>와 더 닮았다. 자산어보의 마라탕 버전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우리 엄니는 마라탕과 <자산어보>는 싫어하시나 <왕과 사는 남자>는 매우 흡족해 하셨다.
요즘 대본을 긁적거리는 입장에서 몇 가지 감탄한 지점.
1. 설정이 다 했다. 심플하고 강력하고 올라타기 쉽다. 이럴 때는 뻔한게 장점이다.
2. 클라이막스를 향해서 달려가는데 꽤 무리가 있다. 구멍도 있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고 그냥 달려간다. 그리고 결국 하고 싶은 걸 한다. 이건 약간의 도박이었을 거 같은데 유해진이라는 에이스 카드가 있었으니까 베팅이 성공했을 거다.
3. 초반에 단종이 물에 빠지는 씬이 있는데 거기서 게임은 끝났다고 본다. 그 씬이 실화인지 허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처연한 이미지와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극의 흐름을 단박에 잡았다. 이런 씬을 써야 하는데.
4. 왜 이렇게 캐스팅이 좋은 건가. 유해진이 아니었으면 어색했을 장면이 한두개가 아니다. 처음에는 코미디 톤이 너무 높고 속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했지만 기우. 박지환과 유해진이 연기하는 장면에서는 거의 아크로바틱을 보는 느낌이었다. 코미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정말이지 귀한 장면.
5. 박지훈은 <약한 영웅>을 보면서 “저 눈빛은 도대체 어쩔 거야…”라고 생각했었다. 아마 그 눈빛을 보고 캐스팅을 했겠지. 저 눈빛을 앞으로도 수없이 울궈먹을 거다. 그렇다면 충분히 울궈먹혀 주고 싶다.
6. 분장을 해서 처음에는 못 알아 봤는데 이준혁은 목소리가 왜 이렇게 좋은 건가. 얼굴은 육백만불, 목소리는 육천만불. 역시 남자배우는 목소리다.
7. 유지태 전미도 안재홍 김수진… 거를 타선이 없다는 게 이런 것일 듯.
8.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싶은 장면도 좀 있었지만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할까. 결과론이지만.
9. 유해진이 맡은 엄흥도는 가난뱅이 무지렁이가 아니라 아전이었다고 한다. 그럼 얘기가 복잡해진다. 그는 왜 자기 자신과 자손들의 목숨까지 걸고 단종에 충성했을까. 뭔가 다른 결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은 분명하지만 직관적인 재미는 지금보다 분명히 덜했을 거다.
10. 10여년 전쯤 청령포에 간 적이 있었다. 사람도 없었고 여기저기 잡초가 덮여 있었다. 시설은 낡았고 특히 유배지로 들어가는 배는 언제 침몰해도 모를 정도였다. 그 쓸쓸한 느낌이 단종의 생애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관광객들이 몰리고 그런 느낌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까. 일찌감치 갔다와서 다행이다…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너는 거기까지 가서 왜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니 이 멍충아. 뭐 그렇다.
(사진은 구글신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