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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로 Apr 22. 2021

도리병

나에겐 오래된 지병이 있다. 병의 이름은 도리병. 처음 들어보는 병이라면 옳게 들었다. 내가 이제 막 지어낸 이름이니까. 여기서 도리란 마땅히 행해야 하는 바른길을 말한다. 행해야 할 길이 미리 정해져 있다니 고리타분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도리’에 많이 얽매이는 어쩔 수 없는 K장녀이자 유교걸이다. '도리병'은 '도리를 다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죄책감과 부담감을 자초하는 병을 말한다. '화병'과 비슷하게 K-문화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병이며, 심리적 불편감으로 신체화 증상을 끌어낸다는 점도 화병과 닮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가깝지 않았다. 모종의 이유로 그와 3년 정도 절연하여, 같은 집에 살 때조차 서로를 못 본체 지내기도 했다. 그 사이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하셨고 둘은 각자의 집에서 살림을 꾸렸다.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는 금세 자신의 삶을 찾았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모아둔 돈이 없는 데다가, 집안일을 거든 적이 없어 살림의 시옷 자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항암 치료를 받은 후 몸이 많이 허약해져 있어, 몸 쓰는 일을 하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친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원망의 대상이기도 한 아버지를 마냥 외면할 수도, 그렇다고 가까이할 수도 없었다. 부자처럼 떵떵거리며 살거나, 패악을 부리거나, 새살림을 차리고 살았다면 내 인생에 없는 사람처럼 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워하고 외면하기엔 그는 너무나 나약한 사람이었다. 차마 연을 끊지는 못하고, 일 년에 딱 2번 설날과 추석에만 아버지를 보러 가자고 다짐했다.

명절이 되어 아버지를 만나는 일정이 가까워지면, 일주일 전부터 기분이 극도로 저조하고 예민해졌다. 작년 추석에는 아버지를 보러 가는 길에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고, 숨이 가쁘며, 정체 모를 두려움에 몸이 바짝 긴장되었다. 그날은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집에 다시 돌아와야 했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버지를 보러 가기로 한 설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또 공황 증세가 나타날까 봐 초조하고 긴장되었다. 혼자서는 이 감정을 컨트롤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만나거나, 연락할 때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상담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선생님은 이렇게 물었다.

"연락하는 게 불편하면 아예 연락을 끊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음... 그러면 오히려 마음이 더 불편할 것 같아요.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어요."

"그렇죠? 그게 바로 세린님의 성격이에요."

그게 나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풀지 못하고 있던 매듭 하나가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그 누구도 아버지를 일 년에 두 번 만나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 내가 그와 절연한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도 없었다. 혼자만의 이상한 사명감에 괴로워했다. 더 나아가 내가 느끼던 심리적 불편감 정체를 알게 됐다. 그건 나를 사랑해주지 않은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과 그를 경제적·정서적으로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기인한 마음이었다.

물론 내가 도리에 얽매이고, 책임감에 시달리는 데는 복잡한 가족 역동, 어린 시절 경험, 그리고 사회문화적인 영향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병이 나에게 왜 왔는지는 덜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었다. 과거가 어찌 되었든 그게 나라는 사람이란 걸 알아차린 게 더 중요했다.

병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나니, 도리병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 명확해졌다. '나'라는 사람을 통째로 바꿀 순 없으니, 책임감 때문에 생기는 부담감을 누그러뜨리기로 했다. 아무도 나에게 아버지를 부양하라는 책임을 지워주지 않는다는 것,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며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리고 내가 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그런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자꾸만 속삭여주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모든 게 내 선택이었다는 걸 인지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마감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끔찍하게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과제'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만난다고 해서 살갑게 행동한다거나, 대단한 걸 베풀고 오지 않았으니 결국은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상대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고, 강요받아서 억지로 한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누가 시켜서 한다는 생각에 괴로웠으면서 그동안 용케 참았다. 도리병은 남을 상처 입히는 것보다 나를 상처 입히는 게 익숙한 사람의 병인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정한 길보다는 남이 정한 길을 걷는 편이 익숙한 사람의 병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같은 길을 걸어도, 내가 원해서 고른 길을 걷는 것과 남이 걸으라고 시킨 길을 걷는 기분은 몹시 다를 테다. 모든 선택은 나를 위해, 내가 직접 내렸다. 그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도리병과 부대끼고 밀고 당기고 구르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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