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로 Apr 08. 2023

후회는 후에 하는 것

4월 6일 오늘의 운세



'후회는 후에 하는 것.' 역삼역에서 스마트오더로 주문하고, 선릉역 6번 출구 앞 바나프레소 카페에서 픽업한 나의 바닐라 콜드브루(덜 달게)에 적혀있던 글귀였다.


서울 강남구 일대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 '바나프레소'는 가성비 프랜차이즈 카페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아메리카노 가격이 2,500원인 데다가 음료양이 500ml가 넘는 대용량이고, 무엇보다 음료를 사면 '오늘의 운세'라는 한 줄 문구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단돈 2,500원이면 반나절은 힘낼 수 있는 카페인을 섭취할 수 있고, 오늘의 운세로 하루를 점칠 수 있는 셈이다. 나쁘지 않은 딜이다.


물론 나도 안다. '오늘의 운세'는 누군가(아마도 나처럼 일하기 싫은 K직장인이) 무작위로 아무 문구나 작성하고, 또 그 문구는 무작위로 출력되어, 무작위로 아무 음료에 부착되어 내 손에 도착한 거라는 걸. 그 운세에 무슨 신기가 있을 리 없다는 걸.


그렇지만 어떠한 우연들이 반복되어 그 운세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것도 인연이 아닐까? 잉크로 출력된 이 평범한 문구에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숨어있다고 믿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장면 1.

팀원 J가 팀장님께 다음 달 판매플랜을 오늘까지 제출해야 하는 상황. 팀원 J를 비롯한 팀원들과 나는 오늘도 일찍 집 가기는 글렀음을 직감하며, 저녁을 시켜 먹고 액상과당을 보충하러 바나프레소에 갔다. 저마다 음료를 하나씩 들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바나프레소 운세를 확인하는 것. 그리고 J의 운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팀장님 저를 믿지 마세요.' (실제로 J는 그날 판매 플랜을 제출하지 못했다고 한다.)


장면 2.

유연 근무제 덕에 우리 그룹 사람들은 대부분 오전 11시에 출근한다. 암만 늦게 출근하더라도 배꼽시계는 정확하기 때문에 오후 12시가 되면 어김없이 점심을 먹기 위해 일어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면, 출근해서 일한 지는 고작 1시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몹시 피곤하고, 눕고 싶어지고, 무엇보다도 집에 가고 싶어 진다. 액상과당으로 뇌를 마비시키기 위해 그날도 우리는 바나프레소를 찾았다. 그날 나온 바나프레소 운세는 바로 이것이었다. '집에 가고 싶다.'


다시 오늘의 운세로 돌아와서. '후회는 후에 하는 것이다.' 처음엔 헹, 하고 코웃음 쳤지만 '바나프레소님은 다 생각이 있겠지.' 하면서 다시 읽어보니... 제법 그럴듯하다? 후회는 어떤 일을 너무 늦게 하는 것이라고 읽히기도 하고,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다면 일단 실천하고 후회는 나중에 하는 것이라고 읽히기도 한다. 이 문구를 작성한 마케팅 부서 직원은 단지 후회와 후에의 비슷한 발음을 두고 라임을 맞췄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게 가장 유력하다.)


오늘의 운세에 꽤나 감명받은 나는 바나프레소 정신(후회는 후에!)을 실천하기 위해, 토요일 오후 무거운 몸뚱이를 이끌고 카페에 왔다. 카페로 걸어오는데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하늘은 맑다. 벚꽃은 졌지만, 연한 초록 잎사귀와 이름 모를 하얀 들꽃들도 벚꽃만큼 예뻤다.


'카페에 가서 글도 조금 쓰고, 에세이도 읽어야지.' 봄날에 즐겨 듣는 음악으로 구성된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이 순간이 내가 생각하는 행복에 최대로 가까운 순간처럼 느껴졌다. 김연수 작가가 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책에 나온 한 구절이 생각났다. '우리 존재의 기본값은 행복이다. 우리 인생은 행복의 바다다.'


내가 그리는 행복은 팡파레가 울리고, 샴페인이 터지는 순간이 아니라, 이런 순간에 더 가깝다. 봄노래를 들으며, 따스한 햇살을 느끼면서 카페를 향해 걷는 순간. 너무 소소해서 별 거 아닌데, 이런 별 거 아닌 순간에도 내가 행복할 수 있음에 감사해지는 그런 순간.


참 다행이다. 오늘 밖에 나오지 않았다면 후회할 뻔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오늘 마실 커피를 내일로 미루지 않고, 오늘의 행복을 내일도 미루지 말아야지. 후회는 후에 하는 것이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