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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래자랑 예심 참가 후기에서도 썼지만 노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코인 노래방이든 집 근처 노래연습장이든 3주에 한 번은 꼭 갈 정도지요. 원래는 '내가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정도로 생각했지만 전국노래자랑 예심에서 실력자들의 노래를 듣고, MR에 맞춰 부르는 게 익숙하지 않아 뚝딱거리는 제 모습을 마주하자 노래를 제대로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표는 우연히 길거리 노래방이나 지역 행사를 맞닥뜨렸을 때 손 들고 나가서 부를 수 있는 18번 곡(※)을 만드는 것.
마침 집 근처에 보컬 레슨장이 있어서 가격도 물어볼 겸 전화를 걸었습니다. "발성법부터 가르쳐 드릴 건데 괜찮겠어요?" 저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습니다. '오히려 좋은데?' 나중에 들으니 발성법은 건너뛰고 자기가 부르고 싶은 노래만 배우려는 사람도 꽤 있다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렇게 처음 한 달(주 1회 수업)은 발성법을 배웠습니다. 평소 말하는 목소리가 낮고 노래할 때도 흉성을 많이 쓰는 편이라 음역대 자체가 낮다고 생각했는데, 비강 쓰는 법과 복압 넣는 법과 고음 내는 요령을 익히고 나니 예전에는 부를 엄두가 나지 않던 노래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고음에서의 음색이 산뜻하달까 가뿐하달까 한결 가벼워진 것이 가장 큰 발전이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나서는 원하는 노래를 곡당 2~3주 동안 불렀습니다. 원곡과 커버 버전을 들으면서 호흡과 밴딩 등을 카피하고 녹음하는 식입니다. 노래는 거의 제가 부르고 싶었던 걸로 골랐고, 나중에는 지금까지 부르지 않았던 스타일을 고려해서 선생님이 추천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윤하 <오르트구름> - K의 최애곡. 2절 코러스 부분에서 버거워하는 나를 보며 "실패!" 하고 놀린 것도 보컬 레슨을 받게 된 이유 중 하나. 그리고 보컬 레슨을 들은 지 5개월 만에 K(와 나 자신)의 인정을 끌어내는 데 성공함.
볼빨간사춘기 <여행>
정인 <오르막길>
혜은이 <제3한강교> - 전국노래자랑 예심 참가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이 다시 불러 볼 것을 추천. 슬슬 비강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
시이나 링고 <마루노우치 새디스틱> - 선생님과 친해져서 슬쩍 일코를 해제해 봄. 지금까지 내 목소리가 까랑까랑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노래방에서 부를 때는 몰랐는데 한낮의 연습실에서 부르기에는 좀, 아니 많이 낯부끄러운 노래.
김윤아 <봄날은 간다>
Duffy <Mercy> - 빵빵한 풍선이 되었다는 느낌으로 호흡을 조금씩 내주는 감각에 익숙해지기 시작.
Fifth Harmony <I’m in Love with a Monster> - 선생님의 추천곡. 어쩐지 입시생이 된 듯한 기분.
박화요비 <그런 일은>
Lady Gaga <Shallow>
Beyonce <Love On Top> - 레슨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노래. 여러분, 노래는 체력입니다.
그전에는 노래 부르는 것이 '피아노'에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악보를 따라 건반을 누르면 정해진 음이 나오고, 그것이 모이면 한 곡의 노래가 되고(물론 피아노도 깊이 들어가면 훨씬 복잡한 세계지요). 하지만 레슨을 듣다 보니 보컬이라는 것은 건반악기가 아니라 현악기, 그것도 프렛이 존재하지 않는 '바이올린'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듯이 마디를 채우고 호흡을 하고 또 다시 새로운 마디를 채우는 과정은 음악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창작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글을 쓰는 데 있어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 그건 언젠가 다른 글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6개월 간의 보컬 레슨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어느덧 보름이 지났네요. 레슨 때 배운 것을 되짚어 보면서 목도 풀고 새로운 노래도 카피하고 있습니다. 길거리를 걷다가 앰프 소리가 들리면 괜히 기웃거려 보기도 합니다. 아직은 남들 앞에서 부를 만한 노래를 찾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무대에 서 보고 싶네요.
※ 18번 곡: 가부키 배우인 7대 이치카와 단주로(1791~1859)가 특기인 18개 작품을 선정한 '가부키주하치반(歌舞伎十八番)'에서 유래한 단어. 말하자면 셋 리스트(set list). '애창곡'으로 순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무대에서 부르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고른 노래를 가리킬 때는 '애창곡'이라는 단어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