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형박사 Jul 28. 2022

희망봉에 희망을

『다음 칼럼은 90년대~ 00년대 이시형 박사가 젊은이들에게 보냈던 이야기입니다. 약 20년의 시간이 지나고, 그때의 젊은이들은 4-50대의 중년이 되었고, 이제 다시 새로운 20대의 젊은이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려고 합니다.  지난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에 비해 지금은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발전했는지, 어떠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는지,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희망봉! 참 근사한 이름이다. 거기만 가면 내게도 희망찬 삶이 열릴 듯한 환상, 이건 초등학교 지리시간 때부터 가져왔던 아름다운 꿈이기도 했다. 아프리카 최남단 남아프리카공화국, 지구의 끝, 희망봉,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곳. 우리 일행은 지금 설레는 가슴을 안고 거길 향해 가고 있다. 흥분에 들뜬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듯, 현지 안내원이 씁쓰레한 웃음을 짓는다.

“그건 희망봉이 아닙니다. 우리에겐 절망봉이었지요. 침략, 약탈, 착취, 노예사냥…. 아프리카의 정체성을 흩뜨려 놓고 영혼까지 짓밟은 저주와 실망의 상징이 되어왔지요.”


▼아프리카의 끝없는 분쟁▼

흥분했던 일행이 갑자기 숙연해졌다. 어린애처럼 철없이 흥분만 했던 나로서도 미안하고 부끄럽기조차 했다.

아프리카엔 지금도 피비린내 나는 종족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서구 열강들의 이해 타산에 따라 줄을 그은 분할, 수천년간 자기 부족이 곧 우주였던 이들에게 근대국가의 틀은 애당초 맞지 않는 형극의 틀이었다. 아프리카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아, 그리고 천인공노할 노예사냥, 차라리 전쟁이 낫다. 무엇으로도 속죄될 수 없는 이 대죄 앞에 누구도 머리 숙이는 자가 없다. 책임질 자도 없다. 여기는 서구열강이 저지른 원죄의 대지다. “이 세상에 여기를 넘보지 않는 나라는 우리 한국밖에 없을 것 같다.” 누군가의 말에 일행은 웃었다. 하지만 이 지구상 누구도 아프리카의 비극에서 예외일 순 없으리라.

아, 그러나 아프리카 대지는 말이 없다. 한반도 허리에 걸친 휴전선의 깊은 침묵처럼. 생각이 없어서인가. 말할 힘조차 없어서일까. 온갖 수모와 핍박을, 그 넓은 가슴으로 조용히 안고 기다리기만 한다.

넬슨 만델라가 생의 반을 감옥에서 기다렸듯이. 이윽고 풀려 나온 날, 그는 그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온 지구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한 구석 맺힌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핍박인들 오죽했으랴.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을 터이지만 그의 어디에도 어두운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환하게 밝은 웃음이 꼭 개구쟁이 아이 같다.

그가 우리를 놀라게 한 건 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해자는 사과하고 피해자는 관용하고….” 이 한 마디가 남아공의 흑백 갈등에 종지부를 찍게 한다. 미움과 복수심으로 이를 갈았다면 오늘 저 아름다운 하늘마저 핏빛으로 물들었으리라. 그는 참았다. 그러기에 그는 위대한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이것만이 보복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걸 온 지구인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는 정녕 위대한 스승이다.

세계 곳곳엔 지금도 피의 보복이 악순환되고 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처절한 피의 복수전이 진행되고 있다. 더욱 가공할 일은 이젠 국지전이 아니라 온 세계가 위험권에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복의 규모가 커지면서 무차별적으로 돼 가고 있다. 온 세계 공항에서 검문 검색이 강화되고, 언제 어디로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 적도 없고 전장도 없는 그야말로 안개 속의 전쟁이다. 이게 온 인류를 불안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있다.

우리를 더욱 전율케 하는 것은 도대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단의 젊은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냉정히 생각하면, 세상에 이나마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 건 인간에겐 죽음에의 두려움이 근원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끓어오르는 분노, 미움, 복수심에 제동을 걸고 있는 것이다. 무슨 동기에서든 사람이 죽기를 작정하면 무슨 짓을 못할까. 죽음이 무섭지 않다면 이 세상엔 한순간의 평화도 있을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죽음에의 공포가 평화의 수호신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데 이게 없는 사람이 있다니 말이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증오와 복수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이것밖엔 달리 길이 없다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최후의 심경에서였을 것이다.


▼'만델라의 관용'을 배우자▼

더 이상 이런 극단적인 사람이 양산되어선 안 된다. 무슨 명분이든 이건 안 된다. 그리고 인류의 지성, 인류의 양식은 이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게 두어서도 안 된다. 우린 여기서 아프리카의 말없는 초원, 그리고 만델라의 관용을, 그의 웃음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여기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우리에겐 정말 희망이 없다. 희망봉에 희망이 없다지만 만델라의 관용이 희망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아픔을, 그리고 피의 보복이 계속되는 모든 지구상의 아픔을 함께하는 우리 가슴이 곧 희망이 아닌가.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알리의 하얀 눈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