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깜박거리는 순간 뱀으로 변할지도 모르지만.

밀란 쿤데라의'정체성'을 읽고 정체성에 대한 생각에 빠진어느 날.

by 세루코


샹탈은 남자들이 더 이상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p.29)는 이유로 연하의 연인 장 마르크에게 우울감을 토로한다. 하여 장 마르크는 샹탈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아주기 위해 발칙한 계획을 시행하는데, 이름 모를 타자의 존재를 빌려 그녀에게 구애하는 편지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장 마르크에게 있어서 그 행위의 결과는 샹탈의 무엇을 되찾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다른 정체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 그리고 본인 자체였던 이름 모를 타자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 질투를 느끼며 자신의 정체성 또한 흔들리고 만다. 무엇이 진짜인지 어디까지가 진정한 우리의 '정체성'인지 애매한 경계를 유영하다가 소설은, 아예 어디까지가 사실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막을 내리고 만다.




나는 워낙 미시적인 사람이라 쿤데라의 소설도 전체로서 음미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고, 그저 좋은 문장들에 멈춰 음미하며 '좋음'을 느끼는 사람인데, 이번 소설에서도 하나 뻗어 나온 줄기가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에, 생각에 계속 질문을 던졌다.


정체성, 그것은 무엇인가. 정체성, 그것은 어떻게 형성되며, 무엇이 진정한 정체성이란 말인가.






과거를 기억하고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거야. 자아가 위축되지 않고 그 부피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화분에 물을 주듯 추억에도 물을 주어야만 하고, 이 물 주기가 과거의 증인, 말하자면 친구들과 규칙적 접촉을 요구하는 거야. (p.54)



장 마르크의 말을 빌려 말하면,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는 데에 필요하며, 자아가 보존되려면 주기적으로 추억을 쌓아야 한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타인과의 접촉, 기억으로부터 우리의 자아가 어느 정도 구성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의 고유성, 나의 정체성에 대해 나는 어떤 정의를 내리고 있었던가? 어떤 정의를 내린 적은 있었던가?


가끔은 나도 샹탈처럼 나의 정체성을 타자에게 내맡기기도 한다. '나'임에도 알쏭달쏭한 거다. 이 무한한 알쏭달쏭함을 즐기는 날도 있는가 하면, 이 물음표에 무조건 마침표를 찍겠다며, 타인에게 '나'라는 인간에 대하여 물어보는 날도 있었다.

'네가 보는 나는 어떤 사람이야?' 하고.

(그 기저에는 '제발 나에게 나라는 사람의 답을 내려줘. 네가.' 하는 나에 대한 회피, 무책임함이 있었다.)

그 평가들에 신뢰를 실어 나를 알아보겠다는 알량한 시도들을 한 적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나 자신마저도 나에 대해, 고작 (아무리 예리하더라도) 타인의 시선 정도로만 알게 되는 것 아닌가?


분명 타인은 나의 전체를 볼 수 없다. 좁은 면적이건 넓은 면적이건 그와 관계한 딱 그만큼의 영역만 나를 겪을 수 있으며 그가 경험하는 나는 조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그 조각들의 합인가? 혹은 타인은 쉽게 보지 못하는 내면의 모습이 나인가? 그렇다면 타인이 바라보는 나는 아예 내가 아닌 것인가? 물론 가끔은 정말 오독이 있기도 할 테지만, 그저 내가 부정하고 싶은 경우도 분명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이어오다 지금의 나는, 어쩌면 나라는 정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타인과 관계하며 발현되는 나의 조각들,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나의 조각들. 그 모든 것이 합쳐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러하듯 모두가 자기화된 시선 속에서 나를 바라볼 터이기 때문에 그것에 나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내맡기는 것은, 나로 사는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 같기만 하다. 내 삶 안에는 수많은 타인이 있고 그 관계의 모양에 따른 수많은 내가 있다. 그렇게 파편화된 나는 내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어쩔 도리 없이 파편화되어 둥둥 떠다니는 수많은 나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뿌리가 필요하다. 아주 튼튼하고 건강한 뿌리. 그 뿌리는 내 내면을 굳건히 하는 방법뿐이리라.


나의 내면의 영역은 나 스스로 읽을 줄 알아야만 한다. 내 내면의 흐름을 나 조차도 전혀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 스스로도 나 자신을 남이 아는 정도로밖에 볼 수 없다는 말이며, 타인이 보는 조각난 나에 무력하게 나를 내어주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나를 알려면, 나의 내면을 읽을 힘을 키워야 한다. 나의 내면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은 때론 수치스럽고 때론 고통스러워 외면하고 싶어 질 테지만, 거기서 나온 힘이야말로 나를 나로 바로 서게 할 것이다. 또한 나의 내면이 읽혀야 상대를 어떤 왜곡 없이 볼 힘이 생기고, 또 그래야 상대가 내게 내어주는 조각난 정체성을 보다 투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또 그래야 내가 맺는 관계 안에서 건강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숨겨진 나의 모습과 조각난 채 드러나는 나의 수많은 정체에 대해 내가 깊-이 인지하고 있다면, 나의 조각만을 보고 그것이 나라고 쉽게 판단해버리는 무심한 타인을 상처 받은 눈으로 보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 사람의 진정한 존재 그 바깥에서 일어난, 발생한 무엇으로 그것이 그의 정체라고 쉽게 생각하고 만다. 우리는 남을, 자신을 쉽게 판단한다. 하지만 사람은 정 반대방향으로도 가지가 뻗어나가 정반대의 모습을 동시에 취할 수도 있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한 번에 거의 한 단면만을 겪는 우리가 그 단면만을 보고 그의 정체성을 헤아리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가장 사랑하는 연인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어쩌면 모든 것이 모호한 와중에 계속 장 마르크를 바라보겠다는 샹탈의 마지막 고백은, 그의 정체성을 끝끝내 알지 못하더라도, 그의 정체성을 보려는 시도 또한 놓지 않겠다는 일종의 다짐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능동성은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또 이루던 샹탈에게는 큰 변화가 아니었을까?


눈이 깜박거리는 사이, 시선이 꺼진 사이 뱀, 쥐로 변할지 모르는(p.183) 두려움을 안고서라도 아주 꾸준하게 바라보자고. 진정한 나를, 그리고 진정한 너를, 진정한 우리를, 진정한 세상을, 진정한 사물을, 진정한 우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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