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유한 모습으로 살랑살랑 바람을 일으켜보고 싶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를 읽고

by 세루코




‘도망가지 않는 무지개가 거기 있었다.’




다른 삶을 원하는 얼굴, 자기 삶을 계획하는 얼굴, 가진 것 없이 비극에서 시작해도 뭔가를 이루고 말 얼굴(p.327)을 한 심시선. 그녀로부터 뻗어나온 가족들 한 명 한 명이 나눠가진 시선에 대한 조각들.


이 책은 시선으로부터, 파생된 여러 모양의 조각들이 다양한 형태로 발아했음을, 참 다채로운 파장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음을 경쾌하고 따스하게 전해주고 있다.




심시선의 가계부로 시작된 책은 이 가족 구성원 한 명 한 명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사실 책 초반부에는 이름들이 조금씩 헷갈려서 가계부를 몇 번이나 다시 펼쳐보면서 머릿속으로 가계부를 그리고 또 그렸더랬다. 하지만 시선으로부터 나온 가족 구성원 모두 워낙 심도있게 이야기가 그려져서 책 중반부부터는 자연스레 인물들에 스며들어 책을 읽어내려갔다. 조금은 엉뚱하게 다른 보통의 가족보다는 조금 더 큰 덩어리의 가족 덩어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가족이라는 덩어리 안에서 '시선'을 나눠가졌을 뿐 모두 제각각이었다.


존재한 적 없던 가상의 인물은 내 옆 누군가들을 상상케 했고, 저 하와이 섬에 시선의 가족이 꼬물꼬물 제사상을 준비하는 과정은 아예 내 친구의 일인양 실제인 것처럼 느껴져 소설이 아닌 수필을 보는 기분도 들었다. 작가는 어쩌면 이렇게 모든 인물들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그려내었을까? 꽤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데 도구로 이용되는 인물이 단 한명도 없이, 각자 자신의 빛을, 그늘을 가지고 있더라. 이 세계를 그려낸 작가에게 정말 존경을 표하게 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이토록 현실과 닿아있는 인물들은 모두 시선에 대한 나름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그게 시선과 함께 한 기억이든, 유전자에 새겨진 무엇이든.


그들은 자신이 가진 조각들을 토대로, 조금은 특별한, 시선을 위한, 시선의 10주기 제사상을 만들려, 일종의 하와이 여행을 시작한다.


삶의 모양이 제각각이듯 모두 다른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이들은 서로를 향해 조금 답답스럽거나, 혹은 충동적이거나, 이해가 어려운 행동이라며 애정이 깃든 불친절한 말들을 주고받기도 한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보는 내 눈엔, 모두 자기만의 방법대로 열렬히 움직이고 있었다.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의 시간을 충실히 보내고 있었다. 이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시선으로부터 나온 무엇이 아닐까? 시선에게 물려받은 주체성이 아닐까?

각자가 가진 심시선의 조각들을 충실하게 공유하고 추억하고 기리는 이 귀여운 가족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내 마음 한켠에도 따듯하고 상쾌한 하와이의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사실, 하와이에 가본 적은 없지만)



가족 구성원들에게 과거의 추억거리가 아닌, 사후 10년까지도 어떠한 질문을 주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시선이라는 사람은, 그야말로 죽은 이후에도 현재진행형 같았는데, 그녀의 삶은 남은 사람들의 기억들만 모아놓고 봐도 굉장히 역동적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불굴의 역동성이 시선을 시선이게 했으며, 이 가족을 이토록 시선으로부터, 모여 뻗어나가게 했으며, 모두 크든 작든,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움직임을 가진 사람이 되게끔 한 것은 아닐까?


이 복잡하다면 복잡하게, 단순하다면 사실 단순하게 엮인 가족 구성원 모두는 각각 조금도 같지 않지만, “시선”을 한가운데에 놓고 모두 여러 모양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한 사람이 일으킨 바람이 얼마나 큰지, 이 사회에는 용감한 하나의 바람이 얼마나 필요한지, 책의 말미엔 묵직하게 맞은 기분도 들었다.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시선의 영혼이 내 안에도 깃들기를 감히 바라본다.

우리 모두 각자가 가진 고유의 바람을 일으키며 살 수 있다면 21세기가 지난 시기들보다 조금은 더 많은 것을 이룩한 시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심시선’은 될 수 없겠지만 나일수는 있을테니, 나의 고유한 모습으로 살랑살랑 바람을 일으켜보고 싶다.

대단한 것은 아니더라도 즐거운 파장을 세상에 남길 수 있다면 내 삶도 얼마나 의미로울까 !







“미니 무지개네. 미니미니해.”

지수의 말에 체이스가 역시 너무 작나, 하고 지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지수는 그 무지개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도망가지 않는 무지개가 거기 있었다. (P. 286)








매거진의 이전글깨끗한 마음으로 사랑을 보태주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