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th BIFF] <강변의 무코리타> 리뷰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무코리타(牟呼栗多;모호율다)는 산스크리트어 muhūrta의 음역어로 굳이 분단위로 환산하면 약 48분 정도 된다고 한다. 48분이라는 시간은 참 애매하다. 익숙한 시간의 단위들과 비교하자면 한 시간도 안 되니 짧은 편에 속하는 듯하지만 또 불교의 시간 단위에서 가장 작은 찰나(약 1.6초)와 비교하면 꽤 긴 시간이다. <강변의 무코리타>의 러닝타임은 2 무코리타 보다 크고 3 무코리타 보다는 작다. 짧고도 긴 시간이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작품은 군대 휴가를 나왔을 때 처음 보았다. 군대에 있는 동안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집요하게 고민했다. 2시간 동안 근무를 서면 선임들과 그야말로 별별 이야기를 다 나누게 되는데 그때마다 가장 기본적으로 듣게 되는 질문이 '넌 뭘 좋아해?'라는 질문이었다. 대단하게 몰두하는 대상이 없었던 나는 대충 소설이나 영화 같이 무난한 답변으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필연적으로 돌아오는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감독은?', '배우는?', '가장 감명깊게 본 작품은?' 같은 연쇄 질문은 훨씬 집요했다. 그들이야 그저 어떻게든 두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보려고 아무 말 내뱉기를 했던 걸지도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마치 소설과 영화를 좋아할 수 있는 자격을 심사받는 면접장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휴가를 나오면 술을 마시거나 술로 고생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필사적으로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무식하게 읽은 영화와 책 중에 실제로 안정적인 기억의 영역에 안착한 작품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그때 나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그렇게 탐식했다.
전역하기 전에 한 편이라도 더 읽고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도장 깨기에 급급했던 내가 마침내 폭주를 멈출 수 있게 만들어 준 영화가 바로 <카모메 식당>이었다. 복귀 때까지 몇 번을 다시 보고 대사를 하나하나 곱씹었다. 겁이 많아 규정을 어길만한 일은 무엇도 하지 않던 나는 부대에서도 <카모메 식당>을 보기 위해 부대 반입이 금지된 전자기기까지 몰래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밤이 되면 다른 생활관 사람들이 TV 연등을 할 때 나는 모포를 둘러쓰고 핀란드에 있는 사치에씨의 가게를 찾았다.
그렇기에 <강변의 무코리타>는 이번 부국제에서 가장 기대되는 작품 중 하나였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신작은 전작들과는 비슷한 듯 어딘지 다른 느낌이었다.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부터 감독의 변화가 조금씩 느껴지긴 했다. 데뷔작인 <요시노 이발관> 이후 야금야금 늘어나던 러닝타임은 마침내 2시간을 넘어가기 시작했고 고바야시 사토미와 이치카와 미카코, 모타이 마사코 배우를 중심으로 하면서 여성 캐릭터를 앞세우던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강변의 무코리타>에서는 처음으로 마츠야마 켄이치가 연기한 남자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무엇보다 주인공은 더 이상 강하지 않다. 고바야시 사토미나 모타이 마사코가 연기한 전작의 주인공들은 외딴 섬에 떨어져도 어떻게든 살아나갈 것 같은, 속 깊은 곳에서부터 단단함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강변의 무코리타>의 주인공인 야마다는 카모메 식당의 사장 사치에나 <안경>의 빙수 장인 사쿠라와는 다르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것 같은 너무나도 연약한 인물이다. 주변의 인물들도 좀 더 솔직해졌다. 불쑥 나타나는 첫 등장은 여전히 당혹스럽지만 야마다가 그들을 이해해가는 속도에 맞춰 관객도 자연스럽게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을 이해해나갈 수 있다.
작품 몇 편 본 걸로 어설프게 감독론적인 분석을 내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여러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의 '같이 살기'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카모메 식당>이나 <안경>의 인물들은 각자의 집을 떠난 낯선 환경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잠시 연결되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의 인물들은 그보다는 보다 분명하게 '엮인다.' <강변의 무코리타>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무코리타 하이츠>라는 아파트(맨션)의 주민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단순히 근린에 위치한다는 이유 때문에만 엮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을 엮는 것은 죽음이다. 이들을 엮는 것은 가족의 죽음을 경험했다는 공통된 경험이며 완결되지 않은 추모의 과정이다. 추모의 과정이 계속 연장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얼마만큼 간절하게 생(生)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의미도 찾을 수 없고 아주 작은 행복도 누릴 자격이 없는 것 같은 삶이라도 일단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혼자 먹는 밥보다는 둘이 먹는 밥이 맛있다. 그리고 스키야키는 여러 명이서 먹는 게 맛있다. 온기가 남은 욕탕의 물은 한두 명을 더 덥혀도 따뜻할지 모른다. 혼자서도 그럭저럭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인생이지만 같이 살면 잠 못 드는 밤을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구구단 칠단을 거꾸로 외우는 바보같은 방식이라도 없으면 밤은 점점 길어진다. 그런 바보 같은 방식이라도 기왕이면 둘이서, 셋이서 외우면 태풍도 지나가는 걸지도 모른다. 내 마음에는 선이 끊어진 주제에 연락을 기다리는 수화기들이 무수히 놓여있다. 내쪽에서 먼저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마음 속 강변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래도 누군가는 지난 밤의 폭풍우에 내가 휩쓸려 내려가지 않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지 않을까.
영화를 보고 나오니 흐리던 하늘은 깜짝 놀랄 정도로 맑게 개었다. 이후로도 두 편의 영화를 더 볼 생각이었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여운이 사라지는 게 싫어 모두 취소해버렸다. 영화를 같이 본 친구와 프리미엄 카츠를 추가한 카레우동과 아삭한 숙주가 풍부한 규니쿠동을 먹었다. 숙소에 돌아오니 영화를 보고 나온지 4 무코리타가 지났지만 갓 목욕하고 나온 욕탕처럼 온기는 여전했다. 별 수 없이 해운대 근처 스타벅스에 앉아 이 글을 썼다. 글을 쓰면서 잘 끝내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죽음에 놀라 현관문 쪽으로 손을 뻗은 이들의 마음을 감히 헤아려 보았다. 그 사이 해가 져서 창 밖으로 얼핏 보이던 바다는 완전히 캄캄해졌다. 부산에 오길 잘 했다, 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