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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민 Nov 15. 2017

[미래인문학칼럼1] 내 걸음이 어때서

21세기 4차산업혁명시대에는 새로운 상상력과 콘텐츠로 살아가야합니다. 《장자》는 상상력과 콘텐츠의 보물창고입니다. 미래사회는 불학실성의 연속이기에 그 누구도 예측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앞으로 연재하는 본 글은 《장자》가 통해 미래사회에 필요한 열쇠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도읍인 한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특별히 멋있었다. 북쪽 연나라 수릉의 젊은이가 조나라 서울 한단에 가서 그곳의 걸음걸이를 배웠다가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 젊은이는 한단의 걸음걸이를 미처 배우기도 전에 이전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결국 기어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장자》 〈추수편〉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지난 250년이 향후 20, 30년과 동일한 수준의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미래학자들은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 산업혁명 때는 산업화라는 단일분야 변화였다면 지금부터는 IT, BT 등 다양한 분야의 융복합에 의한 발전이기에 과학자조차 예측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우리는 변화의 속도를 꿰뚫어 보고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내는 통찰력이 더욱 필요합니다.

미래학자 레이먼드 커즈와일은 지금 경험하는 이 시대가 과거의 흐름과 전혀 다르다고 조언합니다. 그는 “선조들은 과거와 비슷한 현재를 보고 미래도 현재처럼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충고합니다.

먼 여행을 떠날 때 반드시 지도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예전처럼 종이 지도를 대신할 수 있는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예전보다 쉽고 빠르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도이든 내비게이션이든 제일 먼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게 필요합니다. 아무리 정교한 지도라 할지라도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하면 그 지도는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절에서 운은과 백석의 두 고승이 같은 절에서 수행하고 있었고, 열 살이 남짓한 동자승도 있었습니다. 동자승은 깨달음을 얻겠다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좌선을 했습니다. 이를 본 운은이 동자승에게 말했습니다.
“좌선으로는 부처가 되지 못해.”
다음 날부터 동자승은 좌선을 하지 않고 놀러 가거나 잠을 잤습니다.며칠 후 동자승은 절 주위를 거닐다가 그만 백석과 맞닥트렸습니다. 백석은 수행을 게을리하고 놀기만 한다고 동자승을 꾸짖었습니다. 동자승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좌선도 안 된다, 놀거나 잠을 자는 것도 안 된다 하니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입니다. 동자승이 백석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일부러 좌선을 그만 둔 것이 아닙니다. 운은 대사께서 좌선을 하지 말라고 하셔서 멈춘 것입니다.”
동자승의 말을 듣고 백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는 내 말은 듣지 않는구나. 맞아야겠다.”
동자승은 이유도 모르고 백석에게 맞았지만 대들지 않았습니다. 그 후부터 동자승은 다시 좌선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운은이 화를 내며 동자승에게 말했습니다.
“내 말은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우려는 것이냐?”
운은도 동자승을 한 대 때렸습니다. 난처해진 동자승이 말했습니다.
“두 대사님은 모두 저를 위해 가르침을 주셨을 겁니다. 그런데 한 분은 좌선을 하지 마라, 다른 분은 좌선을 하라 하시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두 고승은 몽둥이를 들고 동자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그 순간, 동자승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자기 삶,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을 말씀하시는군요. 앞으로는 두 대사님의 말을 듣지 않겠습니다. 저는 졸리면 자고, 좌선하고 싶으면 좌선을 할 것입니다.”    


베이징대 장샤오헝 교수는 자신의 저서 《최고의 인재를 키우는 베이징대 수신학》에서 한 동자승의 이야기입니다. 이 동자승은 깨달음 얻기 위해 절에서 수양을 하는데 서로 상반된 두 고승의 가르침에 혼란스러워 합니다. 운은은 좌선을 하라고 하고, 백석은 좌선을 하지 말라는 서로 상반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동자승은 서로 상반된 가르침에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그 후 동자승은 비로소 좌선의 문제가 아니라 걸 깨닫습니다.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자기 삶,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을 말씀하시는군요. 앞으로는 두 대사님의 말을 듣지 않겠습니다. 저는 졸리면 자고, 좌선하고 싶으면 좌선을 할 것입니다.” 깊은 깨달음의 시작은 바로 ‘자기 삶’을 살기 위해서 ‘자기의 주관’이 필요함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보라색은 21세기의 색이다. 예전에는 열등감을 나타내는 색으로 인식했지만 21세기에는 명품의 색, 나다움의 색으로 사용된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초상화도 많이 남겼지만 구두를 연작으로 그린 화가로 유명합니다. 고흐는 자신의 그린 구두 연작을 통해 인생의 고뇌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구두 연작의 대표작은 1886년에 그린 <한 짝의 구두>일 것입니다. 그가 그린 구두는 여행할 때나 작업할 때 신는 구두입니다. 이 구두를 자세히 살펴보면 두 짝 모두 왼쪽 구두입니다. 하나는 똑바로 서 있지만 다른 하나는 구두끈이 애처롭게 풀려 있는데 마치 조심스럽게 안기는 것처럼 좀 더 튼튼한 쪽에 기대어 서 있는 구두입니다.

고흐가 청년 시기에 벨기에 보리나쥬 탄광에서 전도사 사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오해와 편견으로 인해 더이상 복음전도자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고흐는 그곳을 떠나 동생 테오의 조언대로 화가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문적인 그림 공부를 한 적이 없는 고흐는 심각한 고민 끝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마음먹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던 차에 처음에는 파리 근처에 자신이 존경하는 밀레가 주축인 바르비종으로 가서 그것의 화가 공동체에 가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고흐는 화가를 생각해내곤 그를 찾아 나섭니다. 그는 당시 유명한 화가 쥘 브르통(Jules Breton)으로, 밀레와 마찬가지로 농민화가로 활동했으며 고흐가 닮고 싶어 한 화가이기도 합니다.


고흐는 그를 만나기 위해 먼 여정을 도보로 이동합니다. 거친 들판을 지나 그의 고향까지의 거리가 70km 라곤 하지만, 돈이 없었던 고흐는 얼음과 같은 비를 맞으며 맨발로 걸었고, 건초 더미와 장작 더미 속에서 잠자리를 해결하면서 브로통을 찾아 갔습니다. 일주일만에 브르통의 집에 도착했지만, 고흐는 벽 돌담으로 둘러쌓인 집 앞에서 밤새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그를 만나지 않고 온 길을 다시 돌아갔습니다.

이때의 심정을 동생 테오에게 편지에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다시 일어설 것이다. 커다란 실망 속에서 던져 버린 연필을 다시 들고 스케치를 계속 할 것이다."    


처음에 고흐는 자신의 부족함만 보았기 때문에 전문가를 찾아 나섰습니다. 쥘 브르통을 만나기 위해 일주일 동안 걸어갔지만, 그는 문 앞에서 고민 끝에 다시 되돌아옵니다. 고흐는 일주일 동안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건 아마도 ‘자기 삶’, ‘자신의 화풍’에 대한 깊은 생각이었을 겁니다. 그 누구도 단색, 하나의 색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으로 존재하는 데 때로는 부족한 색으로 때로는 부정적인 색으로 자신을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흐는 그게 바로 자신의 색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고흐는 그가 존경하는 브르통을 만나면 부족함을 배울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색, 자신만의 화풍을 버리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한 짝의 구두, 빈센트 반 고흐, 1886년. 암스테르담 고흐박물관) 고흐가 쥘 브르퉁을 만났을 즈음 남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도읍인 한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특별히 멋있었다. 북쪽 연나라 수릉의 젊은이가 조나라 서울 한단에 가서 그곳의 걸음걸이를 배웠다가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 젊은이는 한단의 걸음걸이를 미처 배우기도 전에 이전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결국 기어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장자》 〈추수편〉    


이 젊은이가 사는 수릉은 전국시대 연나라의 수도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나라보다는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의 걸음걸이가 멋지고, 최신의 유행이며, 앞선 트랜드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는 이 걸음걸이를 배우려고 먼 길을 떠나고 마침내 한단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이 젊은이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한단의 걸음걸이를 배우게 되는데, 이전의 자신의 걸음걸이마저 잊게 됩니다. 이 젊은이는 자신의 걸음걸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자신의 걸음걸이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자기 생각없이 한단의 걸음걸이를 흉내만 내다가 결국 이 젊은이는 본래의 걸음걸이를 잊고 맙니다. 함부로 남을 따라하다 보면 자신의 좋은 점까지 잃는다는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성어가 나오게 됩니다.    


맹자가 “배움의 목적은 잃어버린 마음(자신)을 찾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마크 트웨인도 우선적으로 확립해야 할 것은 독립적인 사고력이라고 조안합니다. “많은 사람이 독립적인 사고력이 부족하면서도 배움과 자아성찰로 자신의 관점을 세우지 않는다. 그저 이웃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살피고 그것을 따라 하기 바쁘다.”

우리는 어떤가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 추하고, 결점 투성이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래서 자신을 바꾸고 싶어 하지는 않는지요? 앞에서 살펴 본 동자승이 처음에는 자기 삶이 아닌 두 고승의 말을 따랐지만 그곳에는 자기 삶이 없었습니다. 고흐가 부족한 자신의 화풍을 고쳐보려다가 다시 되돌 온 까닭은 자기 삶은 버리고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 장점을 발견하고 승화시켜야 할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자기주관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주관이 없으면 자신의 생각보다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기중심적 사고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자기 삶의 자신이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나답게 살라’는 말을 자주 들립니다. 자기 삶을 살기 위해서 제일 먼저 나다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주관이 없는 사람은 마치 죽은 물고기가 물살에 일말의 움직임도 없이 그대로 휩쓸려 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기업은 대체로 선진기업의 기술을 빨리 따라잡고 개선하는 게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소니가 앞서가면 소니를 따라가고, 도요타가 앞서면 도요타를 따가고, 애플이 앞서면 애플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발기업을 뒤쫓아가서는 기업의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사회가 만들고 정해 놓은 시스템에서 앞선 사람이 성공했지만, 지금은 타인과의 경쟁보다 독창적인 사고를 가진 창의적인 인재가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나다움이 강조되는 까닭입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주한 자들은 하나같이 처지가 딱하지만, 그 중에서도 자기 일에 분주한 것이 아니라 남의 잠에 맞춰 자기 잠을 조절하고, 남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고, 사랑과 증오에서 남의 지시를 받는 자들의 처지가 가장 딱하다. 인생에서 자신의 것이 얼마나 적은지 생각해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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