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사랑하며
가정 형편은 오래도록 좋지 못했다. 남편의 음향기기 사업에는 밑천이 필요했다. 고정 수입이 없으니 돈을 벌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했다. 난 내 자식이 교육받지 못할까, 마음 졸이며 사는 게 싫었다.
생각보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어디서 일을 하려고 해도 아이를 누군가 보살펴주지 않으면 할 수 없었다. 선택지가 없었다는 말이 딱 알맞다. 단순노동을 하려고 해도 애까지 들여보내주는 곳은 없었다. 집안 살림하고 함께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업뿐이었다. 그러나 부업은 큰돈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돈이 되는 일은 무엇이 되었든 해야만 했다. 나는 덜 먹고 덜 쓰며 살 수 있다고 쳐도 갓난 애를 굶길 수는 없었다. 분유값이 간절했다. 그러던 중 옆집 소희집사는 구세주였다.
“새댁, 부탁하나 들어줘.
우리 소아하고 소희 숙제 좀 봐주면 안 될까? 태희걱정은 하지 마. 내가 세탁소에 나갈 때 업고 나가면 되니까…..
그렇게 공부방선생도 해보고, 화장품 외판원, 주방용품판매일도 해봤다. 경력이나 기술이 없으니 여기저기를 다니며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큰 애가 커서 초등학생이 되자 사립 초등학교를 택했다. 형편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애를 맡아 줄 곳이 필요했다. 그 덕에 큰 애는 수영, 스케이트, 성악, 미술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땅집고 헤엄을 치는 힘든 날들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닌 할 수밖에 없는 일, 모두를 했다. 내 머릿속에는 ‘살아남아야겠다’라는 생각뿐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 입은 내가 해결해야만 했다. 자존심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했다. 새벽같이 나가 청소도 해봤다. 세상의 편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난 내 자식이랑 살아야 했다. 살아갈 방법의 우선은 일을 해야만 했다. 고단한 시간이었다.
남편의 음향기기 사업이 자리를 잡고 영업이 순탄해져 가정은 안정을 찾았다. 그 덕에 목소리는 기차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됐지만.. 남편하고 함께 장사를 하려니 어쩔 수가 없었다. 남자들 틈에서 싸한 톤의 목소리를 내어야만 했다. 또한 남편의 급한 성질에 나는 더욱 허둥대고 퉁명스러운 극성이 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반백이 되는 시간이 지나 이젠 일선에서 장사를 하지는 않는다. 경제의 뒷걸음에 맞추어 매장 관리에만 집중하며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젠 조급하게 소리 지를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