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하지만 하지만 할머니>를 읽고
인생은 견뎌내야 하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내 인생의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선택하라. - 영성가 어니스트 홈즈
내가 만들어둔 많은 설정이나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최근 나에게 와 닿는 한계들은 나이가 들어가며 체력에 자신감이 없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거나 과감하게 나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아직까지 학업을 계속하고 있지만 체력이 안되어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몸을 아껴야 하기에 다른 일은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현재의 안정된 바운더리를 벗어나는 것을 겁낸다. 이런 생각들은 행동의 영역 뿐 아니라 의식적인 부분에까지 한계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난 이젠 나이가 많아. 여러가지 일을 잘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하며 이런저런 엄살이 늘어나고 있다.
그림책<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에서는 98살 할머니와 5살 고양이가 등장한다. 5살난 수컷 고양이는 할머니에게 낚시하는 곳에 함께 가자고 말해보지만 할머니는 "하지만 난 98살인걸. 98살 난 할머니가 고기를 잡는 건 어울리지 않아."라며 콩깍지나 까고 낮잠을 자며 지낸다. 할머니가 99살이 되는 생일날, 할머니는 케익을 만들고 고양이는 초를 사러 간다. 고양이는 냇가를 건너다 초를 몽땅 잃어버려 5개의 초만을 가지고 돌아온다. 할머니는 99개의 초를 꼽아야 나이를 먹는 것이라 믿었기에 당황하지만, 하는 수 없이 5개의 초를 켜고 생일을 축하한다. 그리고는 "하지만 양초가 5자루이니 이제 난 5살이 된 거야."라고 말한다.
다음 날 아침, 고양이는 평소처럼 고기를 잡으러 나가며 할머니에게 "할머니도 가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5살인걸...... 어머, 그렇지! 5살이면 고기를 잡으러 가야지." 할머니는 이제 자신이 5살이라 믿고 고양이와 함께 길을 나선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꽃향기를 맡으며 할머니는 들판을 걷는다. "5살은 어쩐지 나비같은 걸"하고 말하며. 할머니는 냇가를 건너 보라는 고양이말에도 하지만이라는 말을 하려 했지만 곧바로 5살이면 내를 건널 거라며 훌쩍 건넌다. 그리곤 "5살은 어쩐지 새 같은걸"이라 말한다.
할머니는 자신이 아주 할머니라 생각해서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갑자기 초가 5개밖에 없다는 사실이 자신이 그어 놓은 선을 무너뜨려 버렸다. 이렇게 의도치 않지만 나를 변화시켜야만 하는 일이 있는 것 같다. 관성을 지키고 싶은 안이한 마음과 내가 그어 놓은 많은 한계선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변화하라고, 너는 그렇게 약한 아이가 아니니 더 용기내어 나가 보라고 누군가 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이라는 변명 뒤에 숨어, 아니면 약함이라는 변명으로 꼼짝 안하고 싶어하는 나는 자꾸만 불편해 한다.
할머니는 고양이가 낚시를 하는 물가에 이르고 함께 고기를 잡게 된다. 할머니가 냇가에 발을 담그고 앞치마를 들어 올리니 고기가 들어 있고, 앞치마끈에 물려 올라온다. "어머, 어머, 어머, 어머! 나 어째서 고기를 잘 잡게 되었을까. 5살은 어쩐지 고양이 같은걸." 할머니는 자신이 진짜 5살난 고양이처럼 물고기를 잘 잡게 되었다는 것에 감탄한다. 고양이와 다정하게 집으로 돌아가며 할머니는 "나 어째서 좀 더 일찍 5살이 되지 않았을까. 내년에도 양초 5자루 사가지고 오렴."하고 말한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죽음을 앞둔 노교수 모리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내 안에는 모든 나이가 들어있네. 그 세월들을 다 거쳐왔으니까. 어린 애가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어린애인 것이 즐거워. 또 현명한 노인이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현명한 어른이 되는 것이 기쁘네. 어떤 나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구!"
그의 말처럼 나는 그 모든 나이를 가지고 있는데도 지금의 나이의 무게에 눌려있는 것 같다. 스스로를 그렇게 한계지어 버리니 미리 지치기도 하다. 한 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라고.
내가 한계지어 놓고 미리 조심하고 있는 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이라며 얼마나 자주 도망치고 있는지, 엄살을 떨고 있는지, 나를 사리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이제껏 나를 약하고 연약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던 내 생각들이 과연 맞는 것인지 묻게 된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세월에 의해 시들어가는 물적인 존재인지, 아니면 어느 시간에도 빛나는 영적인 존재인지. 그런 확신의 마음이 부족해서 쉽게 지치는 몸뚱아리를 나의 본질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내가 왜 한계를 그으려 하는지 글을 써 보았다. 한참을 쓰다보니 놀랍게도 그건 쉽고 안이하게 살고 싶어서라는 말이 나왔다. 쓴 웃음이 나왔다. 그거였구나. 내가 부족하다며 채찍질하는 한 편의 마음과 달리 한 편에서는 그걸 방패삼아 편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들판을 거닐고 꽃향기를 맡으며 물고기를 잡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데도, 콩깍지를 까고 낮잠을 자는 생활만을 했던 할머니처럼. 아름다움을 누리고, 상상력과 감수성을 느끼고, 굳센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나에게 나이값을 해야하고 그러니 열심히 하되 내 한계 안에서 해야 한다고 했다. 현실을 들이밀며 누리거나 즐거웁고 자유로운 나를 받아주지 않은 것 같다.
삶은 견디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 것이며 내가 창조자가 되기를 선택해야 한다는 어니스트의 말을 되새겨 본다. 하지만이라는 말을 넘어서 내 안의 신성을 믿는다면 나는 나의 우주를 아름답고 새로운 것들로 계속 꾸며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기 전까지 더 누릴 것이고 자유로울 것이다. 99살이 되어도 나는 청춘이고 현역으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어본다. 스스로에게 하지만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살 수 있음을 이젠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