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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은경 Jul 04. 2020

훈육이 핑계는 아닙니다.

올해 봄에는 코로나 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엄마인 나와 아이들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공유했다. 초기의 우리는 서로에 대한 관심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만큼 버거웠지만 점차 관심을 다른 영역으로 분산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집안에서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는 영역은 책, 영화, 게임, 그리고 TV 시청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점점 만화보다 예능을 좋아하기 시작했고, 코로나 19가 최대 관심사였던 만큼 뉴스도 보기 시작했다.     


뉴스를 보는 것은 여러 면에서 좋았다. 갓 말문이 트인 아가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을 무렵 느꼈던 황홀한 감정을 나는 또다시 느낄 수 있었다. 사춘기 소년들은 뉴스를 보면서 때로는 날카로운, 때로는 아이 같은 순수한 견해를 피력했다.     


6월 초부터, 연이어 터지는 아동학대 뉴스를 아이들에게 여과 없이 보여줘도 될지 고민이 시작되었다. 동화책에서 아동을 학대하는 매개체는 계모이다. 아버지나 친어머니가 나타나면 주인공이 행복을 되찾고 이야기는 끝난다. 현실세계에서는 전혀 다르다. 계모나 계부가 학대하는 경우도 있지만 친부모가 묵인 또는 동조한다.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이 문제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뉴스를 계속 접하게 할지도 같이 고민하게 된다.     


‘지난 20일 서울 개화산 근처에서 알몸에 맨발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있다’는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떤 사정일까, 아이들은 괜찮을까, 발바닥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는데… 걱정을 하던 나는 다음 기사를 보고 분노를 느꼈다. 아이들이 종일 말썽을 피워 훈육하기 위해 산에 두고 내려왔다는 엄마의 진술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훈육이라는 목적의 체벌은 날로 강해지고 잔인해지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훈육이 강해질수록 아이들은 어른들의 바람대로 착하고 말 잘 듣는 어린이가 될지도 의문스럽다.     


“상처받음, 무서움, 속상함, 겁이 남, 외로움, 슬픔, 성남, 버려진 것 같음, 무시당함, 화남, 혐오스러움, 끔찍함, 창피함, 비참함, 충격 받음.”     


영국 세이브 더 칠드런이 2001년 아이들이 맞았던 경험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정리한 기록이다. 위 내용에 반성한다는 느낌을 말하는 아이는 없다. 체벌이 훈육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게 바르지 않다고 말해준다. 또, 영화 <클루리스>에서 방송매체의 폭력성을 주제로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등학생인 주인공이 이렇게 말한다.     


“TV의 과다한 폭력성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죠. 하지만 그런 장면을 다 삭제해도 뉴스를 볼 수 있잖아요. 뉴스에도 폭력이 나타나지 않게 인간이 착해지기 전에는 재미를 위한 프로그램의 폭력성을 삭제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이 영화를 본지 십 년도 훨씬 더 지났는데도 이 대사가 갑자기 생각났다. TV 프로그램마다 신청 연령이 제한되어있다. 심지어 어린이들이 보는 만화에도 ‘7세 이용가’라는 제한이 있다. 하지만 뉴스는 연령제한이 없다. “다음 뉴스는 폭력성이 짙으니 아이들의 시청을 제한해주십시오.”라는 멘트는 나오지 않는다. 폭력 뉴스를 심야시간에 따로 방송하지도 않는다. 실질적으로 뉴스는 ‘전체이용가’이다.     


나는 뉴스에서 나오는 자극적인 내용이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궁금해졌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는 경우도 대화를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 수도 있다. 이럴 때 나는 주로 책과 영화에 기댄다. 아동학대에 대한 책과 영화를 검색했고, 나는 영화 <미쓰백>과 책 <앵그리맨>을 찾았다.     


영화 <미쓰백>은 실화를 각색한 내용의 영화여서 아이들에게 권하기가 수월했다. 영화를 보는 아이들에게서 주인공 아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탄식이 여러 번 흘러나오다가 점점 미쓰백을 응원하는 소리가 나온다. “달려, 미쓰백. 늦으면 안 돼.” 영화에서는 학대하는 어른만 나오는 건 아니다. 학대당하는 아이를 구하고 학대한 어른을 응징하는 ‘히어로 어른’도 나온다.     


아이들의 생각이 궁금하지만 내 목적을 위해 급하게 책과 영화를 보라고 하면 안 된다.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 나는 꾹 참고 동화책 <앵그리맨>은 다음날 건넸다.     


책 <앵그리 맨>은 동화책이다. 분명 동화책인데 페이지도 많고 글자 수도 많다. 나는 단숨에 책을 읽었고 주인공 ‘보이’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그런 다음 그림을 읽기 시작했다. 아빠와 엄마의 표정, 그림의 크기, 사물의 위치, 배경색을 보고 글을 다시 읽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이 아니었다. 그 어떤 뉴스나 영화보다 무서운 내용이었다. 보이의 공포가 나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보이의 아빠’는 집안 집기를 파괴하고 엄마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보이는 아빠가 언제 변하는지 알고, 왜 변하는지도 안다. 아빠 안에 있는 ‘앵그리맨’ 때문이다.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아들 때문에 매일 집에서 쫓겨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연세가 많이 드신 아버지가 혹여 잘못되기라도 할까, 보다 못한 이웃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폭력을 일삼는 아들 뒤에는 어릴 적 아버지의 가정 폭력이라는 배경이 있었습니다.”     


책 뒷부분에 있는 ‘추천의 글’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훈육 - 학대 - 가정폭력’의 연결고리가 끊이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 아이들과 대화할 시간이다.     


나 : 요즘 아동학대에 대한 뉴스가 많아서 궁금한 게 있어. 부모가 아이를 혼내거나 때리는 이유는 뭘까?

마이산 : 착해지라고? 가르쳐주다가 그러는 게 아닐까?

나 : 그걸 ‘훈육’이라고 해. 훈육의 경계가 어디까지 일까?

강물 : 음… 내 생각엔 종아리, 손바닥까지 허용할 수 있어.

나 : 체벌을 하지 않고 훈육할 수는 없을까?

강물 : 전혀 없이는 안 될 거 같아. (아이가) 말을 안 들을걸.

마이산 : 나도 말로만 하는 훈육은 효과가 없을 거 같아.

나 : 그럼, 엄마도 체벌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기기도 하겠네?

마이산 : 안 돼. 대신 벌을 줘. 외출 금지나 게임 금지 같은 거. 나한테는 게임 금지가 체벌보다 더 무서워.     


나는 아이들과 더 깊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어른들의 추악한 면모를 억지로 들추다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자신이 없었다. 나조차도 100%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아이들에게 물어본 것부터 잘못일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의 추악한 어른만 바라보지 않았다. 영화 속의 미쓰백처럼 언제 어디서든 도와줄 수 있는 어른이 있다고 믿는다. 때로는 자신들이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도 있다고 한다.     


폭력적인 뉴스를 없애지는 못하지만 그 폭력을 해결할 누군가가 항상 있다는 믿음, 나아가 내가 그 해결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현실의 수많은 ‘보이’들이 쉽사리 문고리를 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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