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지영 작가의 <군산>을 읽고
군산에서 태어나 44년째 군산에서 살고 있는 내가 책 <군산>을 읽은 이유는 딱 하나이다. 좋아하는 작가인 배지영 작가의 책이기 때문이다. 전작주의 독서를 하기 위해 책을 펼쳐 든 나는 군산에 살고 있으면서 다른 의미로 군산에 빠져들고 있었다.
여행에 앞서 방문하려는 도시에 대한 정보를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인터넷에 각종 정보가 범람하고, 화려한 안내책자에서 쉽게 정보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보들은 겉모습을 설명하는데 그친다. 책 <군산>은 그런 정보와는 다르다.
<군산>은 대한민국 도슨트의 일곱 번째 책이다. 도슨트란 타이틀에 적합한 책이다. 책의 안내대로 나는 군산 곳곳의 명소를 현재의 모습과 과거의 이야기를 동시에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근대사를 배우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던 시간여행마을, 옛 군산세관, 신흥동 일본식 가옥, 동국사, 근대 역사 박물관, 군산 3·1 운동 100주년 기념관을 비롯해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 손잡고 나들이했던 월명공원, 대야시장, 은파호수공원은 각자의 역사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28곳의 장소와 그 장소들이 가진 이야기들은 현재의 우리를 과거에 이곳에 존재했던 그분들과를 연결해준다. 마치 시간여행이 이루어져 내가 과거와 현재에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느낌이 든다.
“역세권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내흥동 군산역은 원래 배나무 과수원이 있던 자리였다. 금강하굿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놀다가 해질 녘에 군산 시내로 들어오는 젊은 부부들은 이 풍경에 쉬이 압도당했다. 하얀 능선 오른쪽의 금강에는 빚은 것처럼 동그랗고 커다란 해가 수평선을 붉게 물들였다. 3만여 년 전 그 땅에는 구석기인들이 살았다. 과즙이 많은 달콤한 배를 맛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큰 돌을 부딪쳐 만든 도구로 사냥이나 채집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금강으로 지는 노을을 보았을 것이다.”
구석기인들과 같은 풍경을 보았을 거란 생각,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어느 날은 동네 아주머니가 불러서 철로 옆 집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살림집은 2층에 있어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대접해주는 커피를 마시려고 하는데 지진이 난 듯 찻잔이 흔들렸다. 공장으로 갔던 기차가 군산역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영춘 박사를 어른으로 우러렀지. 그런디 박사님네 집 식구들은 폐가 안 좋았어. 옛날에는 폐병을 겁나게 무서워들 했어. 박사님네 딸 이름이 계월인가, 계림인가, 어쨌거든, 우리 아버지가 놀지 말라고 했어. 옮을까 봐 그랬지.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디, 이 집에서 놀던 기억이 나네.”
“장미동 제일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제일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빈해원에서 탕수육을 먹으며 결혼을 약속했었지.”
과거의 이야기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현재의 생생한 목소리들이 책 곳곳에 있다.
“여러 사람에게 탐구를 해야 쓴다. 네가 바빠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탐구를 못 할 것 같으믄, 궁금한 것을 먼저 말을 혀. 아버지가 다 탐구를 해다 줄 판이여.”
“며느리를 대신해서 탐구해주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나는 인터넷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의 퍼즐 조각을 찾지 위해 같은 장소에 몇 번씩 다시 가봤다. 옛이야기처럼 홀연히 귀인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생생한 목소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 대목에 있었다. 우리는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는 책을 비롯한 자료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방대한 정보에서만 배우려고 한다. 사람을 통해서 탐구를 해야 한다는 어르신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깨우쳤고 그분들의 지혜를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래포구는 비가 올 때도, 해가 떨어질 때도 그렇게 예뻐요. 전경이 끝내주는데 사람들이 안 다니잖아요. 오산상회 선구점도 문을 닫고 한 3년간 방치되어 있더라고요. 어느 날 보니까 ‘임대’라고 붙어 있었어요. 거기서 카페를 한다니까 사람들이 저보고 다 미쳤대요. 지붕도 없어서 오산상회는 고양이들하고 비둘기 집이었거든요.”
군산의 과거를 현재로 사람도 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리는 카페 창업을 이루어낸 최동민 씨 덕분에 사라져 버린 ‘선구점 오산상회’는 ‘카페 오산상회’로 변신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온다.
“폐선에서 해체되어 버려진 선구들은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이 된다. 1톤짜리 닻, 어선의 창문은 천장의 동그란 창문이 된다. 옛날에 부표로 썼던 유리 공들은 창고를 들어내고 중정처럼 만든 자리에 매달려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근대역사박물관 근처 기찻길이 철거된 뒤에 버려진 폐목이다. 무거운 생선 궤짝을 날라주던 컨베이어 벨트는 오산상회 옥상에서 길고 신기한 테이블 역할을 맡고 있다.”
카페 오산상회는 과거를 곳곳에 품고 있다.
강물 : 엄마, 군산에 살면서 왜 <군산>을 읽어?
마이산 : 아아, 배지영 작가님 책이구나.
나 : 그런데 이 책을 읽고 군산을 진짜로 알게 됐어. 44년을 살았는데도 모르는 게 많더라고. 엄마도 이런데 너희들은 더 모르겠지? 이 책 읽어보면 옛날이야기 듣는 것처럼 군산이 재밌고 소중해져.
강물 : 그렇게 재밌어?
나 : 응, 그런데 이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주던 어르신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대.
마이산 : 그럼 나중에 누가 이야기해줘?
나 : 그래서 책을 계속 봐야겠지?
강물 : 이 책 내 것 따로 사줘. 내가 독립할 때 가지고 갈 거야.
마이산 : 나도. (웃으며) 우리 독립 첫 준비물이네.
코로나 19와 장마가 겹쳐있어 나들이는 엄두도 못 내는 주말, 책을 펼친 나는 군산 곳곳을 여행했다. 책에 소개된 스물여덟 곳의 장소들은 내가 알고 있는 곳도 있지만 모르는 곳도 있었다. 군산이 큰 도시도 아닌데 44년을 살고서도 모르는 곳이 있다니 나는 어이가 없기도 했고 바로 가보고 싶기도 했다.
“군산의 시간은 꿈틀거린다. 근대가 남긴 이 도시의 유산들은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군산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도시가 아닌 지난 시간들을 지키고 쌓아온 도시다. 비옥한 땅, 금강과 서해가 만나 많은 것이 풍요로웠던 곳, 그래서 늘 약탈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던 곳, 군사적 요충지로서, 세곡을 모아 운반하는 조창으로서, 다양한 문물이 오가던 포구로서, 많은 문화와 사람을 받아들이고 품으며 지켜온 포용의 도시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약탈자로부터 내 것을 지키기 위한 항거도 겁내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서서 새 성장을 일궈하고 있는 군산은 이제 또 다른 이야기를 수백 년 뒤에 전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
군산 사람들은 코로나 19와 군산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 책은 내가 살고 있는 군산이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강한지를 깨우쳐준다. 어떤 희망적인 메시지보다도 강하다.
“군산에 살면 좋으시겠어요. 힘들 때마다 이렇게 새 보러 오고 얼마나 좋습니까?”
오로지 가창오리 하나를 보러 온 서울 사람의 부러움이 담긴 인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