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와 마주했던 시간들

2018.4.2~2019.3.19 in kyoto


학생 비자 2년 3개월 일본 대사관에서 받고 한 학기 등록금을 보내고 2018년 4월 학기

YMCA 교토 국제 복지 전문학교 일본어과의 학생이 되었다.


2년 3개월 비자 취득
京都府京都市中京区三条通 교토 YMCA국제복지전문학교

남편과 함께 4월 2일에 교토에 왔다가 4월 5일에 교토 역 앞에서 헤어지고 정말 혼자가 되었다.

긴 병에 효자 없고 자식 뒷바라지 길게 하다가 내 인생 빈 보따리만 남을 것 같아서 시작한 공부였다.

수원 집으로 일주일에 두 번 반찬배달을 시켜놓고 아들은 1년 휴학을 권해서 집에 눌러 앉혔고 둘째는 무사히 18학번 대학생이 되어 주었다.

셋째를 구미까지 데려다주고 올라오는 길에 한 시간은 울고 올라왔지만 이제 각자 자기 몫의 길을 열심히

가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한때 애나 어른이나 놀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늘 사람이 바글바글 거렸던 우리 집이 한순간 빈 둥지가 되었다.


이직하는 직장인처럼 남편에게 인수인계서를 만들어서 넘겨주고(주로 은행 일과 돈에 관한 세세한 설명들)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돈을 이체하는 것조차 배운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남편이었다.

정해진 자기 용돈만 본인 통장에 있으면 다른 물욕은 없는 사람이라 내가 그동안 돈을 어떤 식으로 쓰고

살아왔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알려줄라치면

한마디로 "동무 내래 그딴 거 일없습네다"


이런 남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집안의 돈 관리였기 때문에 떠나기 전 "지출 커밍아웃"을 해서

최대한 충격을 받지 않도록 연습을 시켜놓고 "내래 동무만 믿고 떠나갔습네다"해줬다.


연습실에서 돌아오면 새벽에도 밥을 차리고 새벽에도 운전을 해야 되고 온 신경이 편할 날 없이 각성상태로

대기하고 있어야 되는 에미노릇을 1년 동안 휴직할 수 있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한자는 읽을 줄 알아 의미는 대충 알아도 말로 하는 일본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남편과 교토역 앞에서

헤어졌을 때 하루카 기차를 타고 칸사이 공항까지 혼자 가야 되는 남편은 무슨 자신감인지 손을 흔들면서

성큼성큼 기차역 안으로 웃으면서 사라졌고, 교토역 앞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혼자서 슈퍼에 들러서

장을 봐서 갈 수도 있을 만큼 며칠 사이에 교토에 익숙해진 나는 남편을 보내고 앞으로 최소한 일 년은

살아야 될 내 집이 교토에 있었지만 신나는 기분이지는 않았다.


이제 혼자가 된 거다.

그토록 원하고 바라던 혼자가 되어 자고 싶을 때 자고 내가 먹고 싶을 때만 밥해먹는 자유로운 삼시 세 끼의

향연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영혼까지 탈탈 털린 것 같은 이 헛헛함은 무엇이며 남편 따라 다시 수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초등학생 같은 마음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교토에서의 시간은 내가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나와 아이 컨택해야 되는 용기가 필요한 시간!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아줌마가 교토 한 복판에 남겨져 있었고

그 아줌마는 이제부터 가족의 밥이 아닌 제 밥만을 끓이면 됐고 레슨비 내느라 한 숨 쉬지 않았어도 되었으며

시댁의 크고 작은 행사에 적어도 일 년은 열외라는 허가증을 비자와 함께 받아냈다.


고 나경 (高 那境)

학교와 아르바이트하던 "보로니아" 빵집 아줌마들은 나를 고상이라고 불렀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또 다른

한 곳 "밤부" 일본식 식당에서는 나경상이라고 불렀었다.


어미야, 승범 엄마, 은진 언니, 수민이네 엄마, 여보, 안 투사(내 세례명이다)

모두 사라지고 고상, 나경상 만으로 남아 일주일에 세 번은 5교시까지, 두 번은 4교시까지 일본어 수업을 받고

한 학기에 중요한 시험을 네 번 보고 두 번의 작문 시험과 매일 내주던 숙제, 받아쓰기 시험, 한자시험

조별 토론 수업, 조별 과제


"나도 내 인생 좀 찾아보자" "엄마도 유학 한 번 가보자"


아이들을 떠난 새로운 인생의 범위에 수많은 시험들이 쳐들어왔고 "엄마도 유학 한 번"에 외로움이

들어왔다.


고입 연합고사를 보고 온 나를 앉혀놓고 점수 꼴이 이게 뭐냐며 이래서 대학이나 가겠냐고 소리를 지르던

아버지의 닦달 거림이 없어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하는 하루하루였다.

2018년 신입생 중에서는 내가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다.

한국사람들 왜 저래 소리를 듣기 전에 나이 먹은 사람들 왜 저래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내가 나에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학교까지 걸어가는 이십오 분 동안 교과서 녹음 내용을 핸드폰으로 듣고, 가장 먼저 교실에 도착해서 그날 배울 내용을 미리 예습했다.


6평이나 되었을 까

작았던 내 방에 앉아서 단어를 외우고 일어나서 물 한잔 마시고 오는 열 걸음 안에 일분 전에 외웠던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성질이 나서 물 마시러 일어나고 싶지도 않았던 내 방이다.


한국에서 저 방을 볼 때는 괜찮아 보였었는데 막상 실물로 영접한 내 방은 햇빛 하나 들지 않는

말만 남향집이었다. 햇빛이 좀 잘 드는 방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1년에서 열흘 빠지는 동안

이 방이 있어서 가족들은 나를 보러 쉽게 왔고 여행 온 사람들에게는 숙소가 되어 주었다.


교토 히가시야 마구 시라카와 쵸에 있던 내 방 (11개월 20일을 살았다)

집 근처 빵집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 생활비를 벌어 집세와 용돈까지 해결했고

아르바이트가 쉬는 날이면 갈 곳을 정해 관광객 모드로 여행을 다녔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교토는 땅바닥은 다 무덤이고 학교와 집 사이를 같은 길로 다니지 않고 골목길로 돌아만 다녀도 늘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시골에서 살 때는 논과 밭과 마을을 지나 먼지 뿌연 신작로를 따라 쭉 오면 우리 동네 집이 나왔었는데

6학년 때 전학 와서 보니 도시에서는 학교에서 집까지 오는 길이 늘 새로웠다.


교문을 나서면 바로 앞에 연탄 불위에서 설탕을 녹이던 달고나 아줌마, 옥이가 사주던 십 원짜리 땅콩 캐러멜을 사서 먹다가 함께 들렀던 옥이네 피아노 집 골목, 옥이네 피아노 집을 가려면 통과해야 되는 시장

그 시장의 완구점에서 팔던 900원짜리 마론인형, 옥이랑 나는 그 인형이 갖고 싶어서 마론인형이라는 정확한

명칭도 모른 채 그냥 들리는 대로 마른 인형 이거 얼마예요 물어보면 완구점 아저씨는 떨이개로 먼지를 털면서

구백 원이다. 때 탄다 마지지 마라 그러셨다.


학교 가면 힘들어서 다시 시골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같은 길이라도 매일 다르게 느껴졌던 하굣길의

골목 풍경들은 내 마음을 붙들어 주었다.


힘들고 쓸쓸할 때 다녔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걸어가 보면 낯선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또 다른 길이 가보고

싶어 졌다.

저 길에는 뭐가 있을까 내일은 저 쪽 길로 가보자

그게 내 마음에는 늘 있었던 것 같다.


교토의 하늘 위에 지나가는 비행기의 긴 연기 자국을 보고 저 비행기를 타고 나도 우리 집으로 가고 싶네

그랬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매일 새벽 두 시까지 공부하고 다음 날 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학교 선생님 중에서 가장 카리스마 있으셨던 야마구치 주임 선생님의 수업 시간에

"さすが 高さん" (역시 고상이야!) 소리를 들었다.


"야마쿠치 주임 선생님-수업이 가장 깐깐했고 좋았던 선생님"

칸사이 사투리를 지독하게 많이 쓰는 빵집 아줌마들에게 지도를 그려가면서 한국의 지리를 설명해주기도 하고

빵집을 그만두고 나올 때는 내 밑으로 들어온 일본 아저씨의 사수가 되어서 일을 가르치기도 했다.

삼십 년 전통의 교토 보로니아 빵집 출하부에 최초의 한국 아줌마 아르바이트생으로 학교 공부만큼 빵집 일을

열심히 해줬다.

교토 보로니아 빵집 출하부 아줌마들 지금도 보고 싶다. 이치 모토만 빼고 ㅋ


아무리 외우고 열심히 해도 힘들었던 1년 과정에서 모두의 마음이 흩어진 마지막 시험은 주워 먹기로

1등을 하고 유학생활은 끝났다.


"마지막에 나를 1등 만들어준 우리 반 애들 잘살아라 얘들아 건강하게"

밥 짓기와 돼지고기 김치찌개만 할 줄 알았던 남편은 온갖 잡탕찌개를 끓일 줄 아는 신기술을 획득했고

자기 용돈 외에는 일없었으나 돈 모으기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어서 귀국한 나에게 경제권과 함께 200만 원을

주면서 고생했다면서 줬다.


심리학과 나와서 어쩜 그렇게 자기 부인 심리하나 모르냐고 했더니만 그 말 취소

돈 이백에 마음을 뺏겼다.

남편이 아니었으면 못했을 일이었다.


격려해주고 걱정해주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외로웠지만 견딜 수 있었고 자기 일처럼 도와주고 알아봐 주던 일본어 능력자 강훈이 엄마, 수연이가 있어서 일본 생활이 수월했다.

낙지젓갈 꽁꽁 싸서 가지고 온 호연이 엄마 선미 언니, 교토 방에서 이틀 밤 재워줬다고 수원 우리 집으로

김치 갖다 준 정희 선생님, 오토바이 타고 농협 가서 용돈 부쳐 준 팔순 큰아버지, 일본 가서 용돈 하라고

챙겨 준, 열 손가락도 넘는 성당 언니들과 내가 아는 사람들


그리고 내 안에 있던 아버지


2018.4.2~2019.3.19 in ky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