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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여로모로 좋긴 하네요.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게 2019년 4월 이후부터였으니 만 5년이 되었네요.

브런치 작가에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제주도 한 달살기 하면서였습니다.

파란만장까지는 아니더라도 7개월만에 그만 둔 생협 점장을 마지막 이력으로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고자 서귀포에 무작정 한 달 살러 내렸갔습니다.

'밀레니엄 펜션' 서귀포 끝 밤섬과 범섬이 가까이에 보이는 펜션의 별 채 원룸을 빌려서 4월 한 달을 살았습니다. 렌트도 없이 한 달을 살려니 버스와 도보로 다녀야 돼서 이동 거리가 제약이 있었지만 섬 위주로 다녀야겠다는 주제는 있었던 터라 2012년 제주도에 살 때 안 가봤던 제주도 안의 작은 섬들을 다녔습니다.


4월의 가파도는 청보리 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섬은 걸어서 한 시간이면 둘러볼 수 있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다리가 아프게 걷고, 제주도의 푸른 바다와 산을 보면서 맞지 않는 짧은 직장 생활에서 얻었던 힘든 마음을 스스로 자가치료하면서 제주도에서의 시간을 즐기다 보니 브런치 작가에 도전해볼까 

그런 마음이 들었고 '고사리 장마'라는 글감으로 브런치 작가가 되었습니다.


왜, '고사리 장마'였을까. 생각해보니 4월은 고사리 철이었고 버스를 타고 서귀포를 넘어 가는 길에서 보면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꺾던 것들이 바로 고사리여서 그랬을겁니다.

나도 버스에서 내려서 열심히 고사리를 꺾었고 톡하고 끊어지는 고사리 대의 손 맛을 잊을 수 없어 나중에는 고사리 끊으러 제주도에 원정 온 아줌마 된 기분으로 들판을 누비고 다녔네요.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혼자만의 결과물인 고사리 꺾기는 즐거운 단순노동이었지만 은근히 힐링이 되는 작업이어서 좋아하지도 않는 고사리를 열심히 꺾고 그 일로 글감을 삼아 브런치 작가가 되었으니

제주도 고사리는 구원의 고사리였네요.


살면서 자기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져본 것이 몇 번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사실 다섯번도 안 될 만큼 자존감이 낮은건지 해 놓은 일이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고 다음 싸이트에서 메일을 받았을 때는 정말 기뻤었네요. 그리고 브런치 작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재수 삼수를 거친 후에 제주도에서 합격이 되었으니 정말 기뻤습니다.


오십도 중반을 넘긴 나이에 자기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져 본 일이 다섯 번도 안되는 인생이었다는게 쓸쓸하기는 했지만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자부심으로 다섯번은 넘겼으니 공식적으로 글을 쓰는 창구를 가졌다는 게 긍정 뺏지를 남들 다 보라고 자랑스럽게 꽂은 것 처럼 기쁜 일이었습니다.


글이라는게 쓰다 보면 결국 자기 이야기라더니, 저도 그랬어요. 쉰 살에 떠난 혼자 유학 간 이야기부터 어찌나 할 말이 많던지 원래도 말이 많지만 글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서 한동안 제 이야기를 고백성사하듯이 써 대고 난 다음에야 브레이크가 잡혀졌습니다.


게다가 기억의 뿌리는 얼마나 무섭던지 글을 쓰다보니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반 여자애가 받아쓰기 시험 볼 때 이름을 개똥이라고 썼던 1975년 일부터 1976년 2학년 때 쵸코렛을 주면서 자기 숙제를 시켰던 슈퍼마켓 집 딸의 만행과 육성회비가 없어지던 해인 1971년 담임이 돌려 주던 이미 냈던 육성회비가 담긴 봉투의 누런 색깔까지 선명하게 떠올랐으며 3학년 때 학예회 합창 시간에 긴장감으로 화장실을 들렀다가 무대에 혼자 늦게 올라갔을 때 나를 째려보던 담임의 매서운 눈초리가 떠올라 괴롭기도 했네요.


아니 어린애가 그럴 수도 있지 그 때 그 선생님은 왜 그렇게 나를 째려보셨을까, 어린 마음에도 눈치라는게 있어서 그 분의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에 미움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선명히 알 수 있었는데 학교에 찾아 오지 않았던 우리 엄마에 대한 화풀이를 그렇게 했던 것인지 실상이 뭔지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기분이 이런것이구나 3학년때 쓸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1,2학년때 선생님은 너무나 착하고 좋으신 분이셨는데 갑자기 분위기 싸한 3학년 때 여자 선생님이 낯설었고

그 분의 레이저는 돈 때문이었을거라는 추측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1970년 때 학교를 다녔던 우리 세대에게 돈 받는 선생님은 낯선 풍경은 아니었으니 내가 받았던 미움의 원인은 돈 봉투 갖다 주지 않았던 엄마 탓으로 하고 싶습니다.


'고사리 장마' 덕분에 브런치 작가가 되고 5년이 지났습니다. 티스토리와 그동안 독자 수는 어제 날짜로 70명이 되었고 어제 하루 일일 조회수는 이만이 넘었다는게 감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4년 전, '언제나 무거운 엄마의 택배' 브런치 글이 하루 조회 수 만을 넘었을 때 이게 무슨일인가 했었는데 올림픽처럼 4년 주기로 이런 일이 찾아 오는 지 어제 무섭게 올라가는 조회수가 신기했었네요.


브런치 작가가 되고 이렇게 많은 조회수를 받고 보니 글을 쓰는 일이 더욱 즐거워지고 꾸준히 써야겠다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꾸준히'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더라구요. 하지만 올림픽처럼 반짝 찾아 온 이벤트같은 조회수에 스스로 감격하여 아마도 브런치에 글 쓰는 일을 잘 할 것 같습니다.

이또한 시아버지의 돈 때문은 아닐까... 

역시 돈이 여러모로 좋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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