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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쁜 며느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등장인물들이 번호표 뽑고 기다리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시아버지에게 돈 받은 이야기만 쓰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시아버지 다음에 시어머니 다음은 동서 그 다음은 시누이 가장 쓰고 싶었던 마지막 회 차의 주인공이 핵심 인싸인데 그 사람까지 튀어 나왔다가는 남편이 자기가 견디기 힘들 것 같다고 말해서 남편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덮었습니다.


남편: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거기까지만 하면 좋겠어."

결혼 생활은 저만 힘들었던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힘들어 하면 남편도 괴로왔으니 거미줄처럼 얽힌 인간관계도가 어찌 저만 힘들었겠습니까. 어차피 어머니 이야기만 쓰기로 했으니 원점으로 돌아가 달라고 해서 시동생 사건은 없었던 걸로 하기로 했습니다. 역대급으로 힘들었고 당시에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싶을 정도로 괴로왔던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없었던 일로 돼서 덮어진게 아니라 나이를 먹어가면서 다스리는 힘이 좀 생겨난 것 같아 얼굴 안 보며 차를 마시는 일 까지는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시어머니 시리즈는 남편의 입김으로 미니시리즈4로 종결되었습니다.


어머니에게 간병해드린 일도 쓰고 샆었는데 시어머니 시리즈 4까지에서는 쓰지 못 했던 간병 이야기도 에피소드로 풀고자 합니다.

거의 30년 전 쯤 시어머니는 목디스크 수술을 하셨고 지금처럼 간병인의 개념이 없고 가족 간병이 보편적인 일이었을 때라 서로 눈치보고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했을 때 그걸 제가 하겠다고 해버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좋은 며느리여야 된다는 의무감같은게 있었나봅니다. 


하지만 막상 간병을 해 보니 길었던 입원은 아니었지만 더 했다가는 제가 입원할 것 같은 지경이었으니 우선 병원의 시계는 본드 발라 놓은 것 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병원 복도에서 남편 회사에 전화를 걸어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했지만 간병은 누가 떠밀어서 한 게 아니었고 제가 저를 떠민 결과였으니 시어머니 퇴원 때까지 시아버지와 둘이서 했습니다.


다시는 누구 간병 한 다고 어설프게 나서지 않겠다라는 가르침을 얻었고 어머니는 진심으로 고마워하셨으니 플러스 마이너스없이 공평하게 끝난 짧은 간병 경험이었지만 병원과 시댁을 스틱 차로 운전하면서 다니느라 무릎이 찌릿하게 아프게 된 게 간병 후 휴유증이었고 어머니 퇴원 후 우리 집으로 돌아갈 때 시누이가 둘째 아들이 냈던 병원비에 대해서 칭찬을 하느라 남편과 내 마음을 상하게 한 일이 생각납니다.


입원 첫 날, 병원에 남겨진 시어머니와 나를 두고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병실 문 밖으로 나갈 때부터 현타는 왔던 것 같습니다. 간병이라는게 이런 거구나, 환자와 단 둘이 남겨지는 것 그게 바로 간병이었는데 그걸 시어머니와 하겠다고 한 거였으니 살짝 맛이 갔던 것 같습니다만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잘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요.


전 편에서도 썼지만 처음부터 시댁 식구들을 물과 기름처럼 여길려고 하는 며느리들은 없을 겁니다.

살다보니 우리들을 환경이 그렇게 변화시킨거라 생각합니다.

어머니도 그렇게 살지 않으셨으면서 나한테는 시동생 공부 시키는 큰 며느리도 있는데 너는 좋은 줄 알아라 말씀하셨을 때 밥을 뿜을 뻔 했지만 30년 살아오면서 적당히 손절과 익절을 거듭하면서 결국에는 가족 묘지에 함께 들어가기는 싫습니다로 결론을 낸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결혼하면 남편 성을 함께 쓰기 때문에 완전히 시댁 식구가 되는 나라입니다.

결혼 전 성이 나카무라였는데 남편이 스즈키면 성이 스즈키로 바뀌고 통장부터 모든 명의를 변경해야되는 복잡함이 있기 때문에 반대로 이혼을 하게 되면 그런게 귀찮아서 그대로 쓰기도 한다고 하네요.


일본은 관공서의 일처리가 우리나라만큼 빠르질 못 하니 (코로나 이후에는 좀 빨라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관공서의 일처리가 늦은 건 일본인들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이혼 후에 다시 성을 찾아 오는 과정을 포기하고 그대로 쓰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어머니의 간병을 일주일 정도 한 걸로 좋은 며느리였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나 하겠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 생각하니 서른도 안됐던 그 때의 제가 지금보다 더 어른스럽게 여겨지도 하고 나도 그랬던 때가 있었다고, 그렇게 나쁜 며느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하고 싶습니다.

시어머니 이야기 4편까지 쓰고 변명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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