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니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아버지 왜 그러셨어요. 아이 낳고 누워 있는 엄마에게 아버지가 했다는 개념 물 말아 드신 폭탄발언이 엄마의 증언으로 50년 만에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아버지는 10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엄마에게 소환되고 엄마와 우리들의 대화에서 빠지는 일이 드문 편인데 드라마로 치면 회차마다 등장하는 감초 조연급으로 등장하는데 캐릭터가 너무나 다양해서 도대체 아버지의 진짜 캐릭터가 어떤 거였는지 헷갈릴 때가 있으니, 이번만 해도 그랬습니다.


이틀 전 넷째 여동생의 생일이었고, 딸 넷 중에 하나 빼고 셋이 엄마 집에 모였는데 넷째가 엄마에게

더울 때 자기 낳느라고 고생 많았다 한마디 했더니 딸려 나온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우선 배경을 생각해봐야 하는데 나부터 넷째 여동생까지 딸만 넷을 낳은 엄마는 딸을 계속 낳은 걸로 아버지에게 구박을 받은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순경이었던 아버지는 오히려 엄마에게 "나쁜 짓 저지르고 경찰서에 온 애들은 죄다 남자애들이더라" 그러니 딸들 키운다고 기죽을 거 없다고 멋진 멘트도 날려주며 엄마를 위로해 줬다고 했는데 넷째까지 딸이었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고 했으니, 상황이 이렇게 전개됩니다.


우리 가족은 그때 시골에 살고 있었고 아버지는 오토바이로 30분쯤 떨어진 곳의 검문소에서 근무하고 계셨는데 넷째를 낳았다는 소식에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에 들어왔고

동네사람 1,2,3,4: "너 또 딸 낳다고 허드라" 입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아버지에게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고씨 집성촌이었던 마을에서 아버지의 나이에는 동네 사람 모두가 어른이었고 마을 입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넷째도 딸이었다며 한 마디씩 했으니 이미 아버지는 분기탱천해서 집으로 들어와, 넷째를 확인하고 그대로 검문소로 돌아가면서 엄마에게 비수 같은 한마디를 던졌으니 바로 이 말이었습니다.


논도 있고 집도 있으니까 너는 그걸로 애들 키우면 되고 나는 월급으로 검문소 동네에서 혼자 살 테니까 "니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리하여 우리는 아버지도 없이 엄마랑 네 딸들이 살 뻔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금쪽이 같은 말을 남기고 검문소로 돌아가서 마음이 불편했던지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고 엄마의 반격이 있었습니다.

이 번에는 엄마가 분하고 기도 안 막혀서 잠도 안 자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불빛이 스르르 비쳤고 그게 아버지인 줄 직감으로 알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바로 문을 열어주는 엄마에게 머쓱하고 미안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미안했을 말투였겠죠) "잠도 안 자고 문을 일찍 열어주네"

엄마: (분이 하늘을 찔렀을 말투로) "니 놈이 다시 올 줄 알았다"

엄마의 말을 듣고 우리는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지만 아버지의 말씀은 그대로 실천이 되어 엄마 집에서 삼시세끼 잘 먹고 엄마의 오래된 짐들도 "니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의 주인공이었던 넷째 여동생의 정리로 깔끔하고 끝낼 수 있었습니다.


엄마 옷을 정리한 23kg의 옷더미들은 7,200원으로 돌아왔고 옷이 빠져나간 자리는 엄마의 팬트리가 되었습니다.

엄마에게는 그런 말을 했다지만 자라는 동안에는 딸들이어서, 여자라서 아버지에게 차별을 받은 적은 없어서 엄마의 양심발언이 다소 충격적이긴 했지만 넷째 여동생은 똑똑한 공무원이 되었고 아버지 살아계셨다면 넷째 여동생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하라고 싶지만 아버지는 10년에 돌아가셨고 사진 한 장으로 남아 친정집 거실 벽에 남아 계십니다.


그래도 엄마에게 "애들 기죽지 않게 옷도 잘 입혀라" "남의 잔칫집 갈 때는 맛있는 거 집에서 먼저 해서 먹여놓고 가라, 그래야 남의 집 기웃거리면서 안 쳐다본다"는 엄마 마음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주옥같은 말씀도 하셨고 퇴근할 때는 줄줄이 사탕부터 호빵, 통닭까지 사들고 들어 오던 시골 우리 마을에는 없던 아버지 상이 었고 소년중앙부터 어깨동무까지 월간지를 한 달에 두 권씩 사다 주던 아버지였으니 시골 마을에서는 드문 분이셨습니다.


아버지 말씀은 어느 정도는 이루어져서 잘 먹고 잘 살고까 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끼리 그럭저럭 살고 있고, 돌아가신 지 10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어떤 화제에도 아버지는 등장하고 있으니 아버지도 이만하면 존재감 있는 분으로 우리에게 남아계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말씀하신대로 됐다고 하면서 웃었으니 아버지도 웃으셨을것같네요.



작가의 이전글 누레오치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