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31)
‘전두환대통령각하께서 가봉 등 아프리카 4개국과 캐나다를 순방하기 위해 모레부터 출국……. 내무부가 내년부터 순경모집을 중단하고 신규인력을 전경으로 전환하는 경찰행정제도개선방안을 마련…….’
문경준이 아침뉴스를 보며 식사하였다. 문승협은 아버지눈치를 살피며 외출을 준비했다. 지난번 몰래 먼발치서 정난희를 보긴 하였으나 오랜만의 만남이라 들떠있었다. 마침내 아버지가 출근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을 챙겨 들었다. 엄마 이항리가 아침도 안 먹고 어디 가냐고 물었다. 문승협은 도서관에 간다며 현관문을 열었다. 한 숟가락이라도 뜨고 가라는 엄마말이 뒤통수를 때렸지만 무시했다.
곧장 코롬방제과점으로 향하였다. 공부하러 간다고 엄마를 속였어도 정난희와 만남 앞에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붕 뜬 기분에 뛰다시피 했다. 숨이 차올라 시계를 보았다. 약속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한숨 돌리며 걸었다. 제과점에 다다라 어리둥절하였다. 정난희가 처음으로 먼저 나와있었다. 문승협은 반가움보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걱정되었다.
“난희야, 우리 9시 약속이잖아?”
“맞아, 왜?
“아 아니, 아니야.”
“무용연구소에 들릴 일이 있어서 일찍 나왔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
“그랬구나, 난 또 무슨 일 있나 했어.”
“집에는 뭐라 하고 나왔어?”
“도서관.”
“어디 갈 거야?”
“특별히 가고 싶은 곳 없으면 영산강하구언 갈까 해, 너 전에 하굿둑 걷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 좋아, 그걸 기억하고 있었네?”
“가자, 목포역 앞에서 가는 버스 있어.”
문승협과 정난희가 떨어져 걸었으나 예전보단 가까웠다. 버스가 한적하여 뒤쪽 자리에 앉았다.
“오빠, 왜 오늘 만나자고 했는지 알아?”
“글쎄, 무슨 일 있는 거야?”
“응, 나 내일 서울 가.”
“왜, 무슨 일로?”
“방학 때마다 서울 가서 무용레슨을 받거든, 2주 정도 있다가 내려올 거야.”
“그럼 방학 끝날 때 오는 거잖아?”
“왜, 아쉬워?”
“당연하지, 방학이라 자주 볼 줄 알았는데.”
“호호, 입이 남산만큼 나왔네.”
“근데 왜 하필 내일 가? 나 캠핑 갔던 지난주에 갔으면, 1주일은 벌 수 있었잖아.”
“교수님 스케줄이 그렇게 됐어, 나도 엊그제 알았어.”
“참, 우리 월출산 갔을 때 찍은 사진 왔어, 볼래?”
“응, 잘 나왔어?”
“나는 별론 데, 넌 잘 나왔어.”
“뭐야, 내 얼굴은 왜 이렇게 동그래?”
“아냐, 갸름하고 예뻐.”
“내가 이래서 사진 찍는걸 안 좋아해, 오빤 잘 나왔네.”
“난 내 얼굴이 이상한데, 너는 예쁘게 잘 나왔어.”
“이 사진은 오빠가 가져가서 보관해, 우리 엄마아빠가 알면 큰일 나니까.”
“알았어, 그럴게. 그리고, 이거.”
“웬 부채야?”
“이번에 잼버리캠핑 갔을 때 사 온 선물, 덕유산향나무로 만든 거야.”
“여름이니까 요긴하긴 하겠다, 잘 쓸게.”
어느새 영산강하구언입구에 도착했다. 정난희가 버스에서 내려 슬그머니 손을 잡았다. 문승협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손잡았던 순간들이 생각났다. 매번 짜릿하였으나, 맨 처음에는 경직되어 감각이 무뎠다. 두 번째는 서로 연결된 연대감이었다면, 이번엔 교감이 더해져 마냥 좋았다. 오랜 연인들은 안 잡는 것이 어색하다는데, 그때가 언제쯤 일지 하루빨리 익숙해지고 싶었다.
두 사람은 하굿둑 위로 올라갔다. 문승협이 정난희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려고 햇볕 쪽으로 걸었다. 그걸로 부족해서 따가운 햇살을 손으로 가렸다.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난희가 씩 웃었다. 반짝이는 입술이 매혹적으로 보였다. 월출산에서의 첫 입맞춤이 떠올랐다. 당시를 회상하느라 정난희말도 들리지 않았다. 호시탐탐 입술을 훔쳐보며 앙큼한 상상을 하였다. 하굿둑중간쯤 걸을 즈음, 정난희가 발이 아프다며 구두를 벗어 들었다. 문승협은 그제야 환상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왔다. 불편해 보여서 운동화를 벗어 주려했다. 정난희가 마다하면서도 구두를 들어주겠다는 청은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여름 뙤약볕에 달궈진 하굿둑길이 너무 뜨거웠다. 지옥불 위를 걷는 마냥 발바닥에 불이 났다. 몇 걸음도 안되어 다시 신발을 벗어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문승협이 한 손에 구두를 쥐고, 다른 한 손은 가방을 높이 들어 햇빛을 가렸다. 한편으로는 신발을 신지 않은 발바닥이 뜨거워 난리였다. 정난희가 운동화를 끌다시피 하였다. 양말만 신은 발로 엉거주춤 꼬물꼬물 걷는 문승협에게 괜찮냐며 걱정스레 계속 물었다. 문승협은 남자답게 최대한 태연한 척했다. 얼마 못 가서 발바닥을 식힐 요량으로 잠시 앉아서 바닷바람을 쏘이자고 하였다. 정난희가 차라리 하굿둑 건너 편의점파라솔까지 가자고 했다. 문승협은 하는 수 없이 꾹 참고 갔다. 하굿둑길이 4.3Km에서 2Km를 양말만 신고 걸었다. 파라솔에 앉으니 발바닥이 뜨겁다 못해 감각이 없었다. 근심스레 바라보는 정난희에게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정난희가 구두를 달라며 운동화를 벗어 주었다. 문승협은 신발을 신고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정난희가 포장껍질을 벗겨주는 문승협을 흘겨보았다.
“보이스카우트잼버리 다녀온 날 말이야, 목포역에서 집에 어떻게 갔어?”
“응?”
“집에 어떻게 갔냐고, 걸어갔어?”
“아 아니, 차 타고.”
“왜 말을 더듬어, 무슨 차 탔는데?”
“아, 저기 홍지아엄마 차. 홍지아엄마가 마중 나왔는데, 태워다 주겠다고 해서.”
“아, 그래서 부라보콘을 넙죽 받아먹었구나?”
“봐 봤어?”
“그래 봤다, 옆에 있던 무용하는 친구들이 말해줘서.”
“그 그랬구나, 난 못 봤는데.”
“내가 그 애들 앞에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아?”
“미 미안, 그럴 줄 몰랐어.”
“그럴 줄 알고 했으면, 우린 당장 끝이야, 알아?”
“…….”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주 입이 귀에 걸렸더라?”
“짐이 많은 데다, 그냥 친구니까 부담 없이 탄 거야, 홍지아엄마랑도 잘 알고 해서.”
“얼마나 잘 알길래 우리 사위 우리 사위 그럴까?”
“그 그건 장난으로 그러시는 거야, 재미있으라고.”
“뭐? 딸친구를 사위라고 하는 게, 장난이고 재미있으라고 한다고, 미쳤어 정말?”
“…….”
“지난번 공연 끝났을 때도, 오빠한테 사위라고 부르는 말 듣고 놀라 자빠질뻔했어, 알아?”
“알았어, 미안해, 화 풀어.”
“다시 그런 일 있으면, 그땐 우리 헤어져, 알았어?”
“…….”
“왜 대답을 안 해, 또 그럴 건가 보네?”
“아 아니야 그런 거, 알았어 조심할게.”
“명심하라고, 난 두말 안 해. 어휴 속 터져 진짜, 무슨 남자가 끓고 맺음이 없어.”
“…….”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들어, 행동 똑바로 해.”
“응, 알았어. 근데, 나도 그날 혹시나 싶어서 살펴봤는데, 너는 어디에 있었어?”
“그 부라보콘을 산 슈퍼 안에 있었다 왜?”
“아, 거기 안에 있었구나.”
“내가 알게 된걸 나쁜 우연으로 돌리고 억울해하지 마, 다 이유 있는 운명이니까.”
문승협은 깜짝 놀라 정난희에게 독심술이 있나 의심하였다. ‘어른이 사위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지 마라 해. 다른 곳에선 마주치지도 않으면서, 우연도 그런 개떡 같은 우연이 있을까’라고 생각했었다. 난처한 분위기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잔꾀를 썼다. 다음 계획인 근처 딸기농장을 가자고 하였다. 정난희는 화가 덜 풀린 표정으로 따라 일어섰다. 영산강하구언 건너에 딸기농장과 무화과농장이 많았다. 입장료를 내면 직접 따서 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연인들이나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문승협과 정난희는 농장에서 빌려주는 바구니를 들고 딸기를 땄다. 각자 바구니에 가득 담긴 딸기를 원두막으로 가져갔다. 알이 큰 딸기만 씻어서 먹었다. 일대토양이 질 좋은 황토인 데다 햇볕을 잘 받아 당도가 높았다. 달콤함에 계속 손이 갔으나 점심 먹을 시간이어서 농장을 나와야 했다. 인심 좋은 농장주인이 딸기를 비닐봉지에 담아줬다. 가져가서 가족들과 먹으라며, 잼을 만들어 먹거나 믹서기에 갈아 주스로 먹어도 맛있을 거라고 하였다. 덤으로 무화과도 따로 싸주었다. 둘이 잘 어울려 보기 좋아서 주는 거라며, 사이좋게 지내라는 덕담을 덧붙였다.
문승협은 감사인사를 하고 나와 근처 식당을 찾았다. 의외로 연인들을 위한 예쁜 레스토랑이 여럿 있었다. 아담한 흰색목조건물에 붙은 ‘로망스’라는 푯말이 눈에 띄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니 아베크족 세 쌍이 있었다. 정난희가 딸기를 많이 먹어 식사생각이 없다고 하였지만, 문승협은 함박스테이크와 돈가스를 주문했다.
아베크족들은 대학생이었다. 두 쌍은 열심히 식사에 집중하였다. 구석에 자리한 한 쌍이 식사를 마치고 나란히 앉아 꼭 붙어있었다. 정난희등뒤 쪽이어서 자꾸 문승협시야에 들어왔다. 급기야 밝은 대낮에도 불구하고 키스를 했다. 문승협이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정난희가 뒤돌아보았다. 눈을 흘기며 테이블 위에 얹어진 문승협손등을 때렸다. 문승협은 쑥스러워 물컵을 들어 입을 축였다. 때마침 종업원이 와서 포크와 나이프 등을 세팅하고 크림수프를 내려놓았다. 덕분에 어색함이 풀리고 자연스러워졌다. 수프를 다 먹어갈 즈음 식사가 나왔다. 문승협이 햄버거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 접시채 건넸다. 정난희가 곁들여 나온 밥과 스테이크절반을 다시 문승협접시에 옮겼다. 돈가스 두 조각을 맛보라며 주는 문승협에게 남김없이 먹으라고 독려하였다. 문승협은 어쩔 수 없이 샐러드까지 말끔히 해치웠으나 포만감에 숨쉬기 힘들었다. 중학교여름방학 때 박동후회장의 서울집에서 먹은 아롱사태가 기억났다. 정난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신경 쓰느라 좌불안석이었다. 종업원이 음악을 틀어준다며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정난희가 곰곰이 생각하다 끄적였다. 종업원이 메모를 보고 약간 당황했다. 신청한 클래식합주레코드판이 없다며 다른 곡을 적어 달라고 하였다. 정난희가 입을 삐쭉이며 종이와 펜을 밀었다. 문승협은 거침없이 ‘닐세다카의 You Mean Everything to Me’를 썼다. 정난희가 어떤 곡인지 궁금해했다. 18번이라는 말에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기다렸다. 이윽고 노래가 흘러나오자 골똘히 들었다. 2절을 듣다가 미소 지으며 자기를 염두한 곡이냐고 물었다. 문승협은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마지막소절이 끝날 즈음 레스토랑전화벨이 울렸다. 정난희가 뭔가 떠오른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오빠, 지난번에 현아 시켜서 우리 집에 전화했었지?”
“응.”
“우리 집에 전화하지 말랬잖아, 왜 내 말을 안 들어?”
“아, 보고 싶어서 목소리라도 들으려고 했어.”
“그날 집에 들어가니까, 우리 엄마가 누구냐고 꼬치꼬치 캐묻고 난리였다고.”
“현아가 후배라고 말했는데?”
“참나, 엄마가 모르는 후배가 전화한 적 없단 말이야.”
“그 그렇구나, 미안, 내 생각만 했네.”
“중학생후배라고 해서 넘어갔는데, 다신 그러지 마.”
“알았어.”
“진짜 자꾸 이러면 오빠 안 만날 거야, 나 만나기 싫어?”
“알았어, 안 할게.”
문승협은 안 만난다는 말이 겁박인지 진심인지 아리송하였다. 분명한 건 정난희입에서 나오는 횟수가 점점 늘어간다는 사실이었다. 정난희가 상심해 있는 문승협을 달래려 매주일요일 오전 9시에 전화하겠다고 했다.
“일단 그렇게 정하고, 내가 전화할게, 됐지?”
“응, 알았어.”
“내가 가급적 전화하겠지만, 못할 수도 있으니까, 9시 넘으면 기다리지 말고 오빠 일해.”
“그래, 좋아.”
“오빠공부에 방해되는 건 싫단 말이야, 전화 안 왔다고 마음 상해 있으면 안 된다?”
“알았어, 9시 딱 넘어가면, 미련 없이 공부하러 갈게.”
“그래, 이제 가자.”
“벌써?”
“내일 서울 가려면, 일찍 들어가서 짐 싸야 해.”
정난희가 레스토랑을 나서면서 문승협팔짱을 꼈다. 미안한 마음에 기분을 풀어주려 하였다. 한적한 길에 들어서 아까 신청한 18번을 불러달라고 했다. 문승협은 닐세다카의 You Mean Everything to Me를 읊조렸다. 정난희가 음미하며 듣더니 앞으로 자기에게만 불러 달라고 하였다. 다른 여자에게 불러줘선 절대 안 된다며 대못을 박았다.
둘은 곧바로 버스를 탔다. 정난희집 앞에 도착하여 2주간 이별을 앞두고 분위기가 야릇했다. 정난희가 머뭇머뭇하다 금세 이성을 찾았다. ‘갔다 올 테니까, 한눈팔지 말고 공부만 열중해’라고 명령하였다. 문승협은 가벼운 입맞춤이나 포옹 정도 있을 줄 기대했다. 엄마처럼 할 일만 지시하고 홀연히 돌아서버린 정난희에게 서운하였다. 잠시 잠깐 이별이지만 마음이 아렸다. 같은 도시에 있어도 2주 정도 못 본건 예사였다며 스스로 다독였다. 아쉬움을 접고 발길을 돌렸다.
몇 걸음 걷다 손에 쥔 비닐봉지를 봤다. 도서관에 가려다 딸기와 무화과를 들고 다닐 수 없어 집으로 갔다.
뜻밖의 과일은 엄마와 동생들에게 환영받았다. 집에 가져가라고 떠맡긴 정난희에게 감사하면서도, 출처를 캐물을까 봐 부모를 두려워했던 모습이 측은하였다.
다음날아침 9시가 다가오자, 문승협은 거실 전화기 주변을 맴돌았다. 통화하는데 방해될까 봐 안방에 아버지동태를 수시로 살폈다. 정난희에게 뭐라 말할지 준비하고 전화벨이 울리길 학수고대했다. 기분 좋게 잘 지내다가도 잦은 짜증과 이별을 엄포하는 점은 이해되진 않았으나, 매주일요일 9시에 전화하겠다는 말은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괘종소리가 아홉 번 울릴 때까지 전화는 오지 않았다. 달력을 보며 일요일인지 재차 확인하였다. 약속을 잊었나 싶어 속상했다.
정난희는 어제 분명히 언질 하였다. 가급적 전화하겠으나 못할 수도 있다. 9시가 넘으면 기다리지 말고 할 일 하라. 전화 안 했다고 마음상해마라고도 하였다. 이상하게 문승협기억에는 없었다. 다만 9시 넘어가면 미련 없이 공부하겠다던 자기 다짐은 떠올랐다.
문승협이 실망을 안고 방으로 가 책을 폈다. 정난희의 무심함이 자꾸 심사를 흔들었다. 책을 덮고 바람도 쏘일 겸 밖으로 나갔다.
아담한 정원에 꽃과 나무들이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았다. 어렸을 적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꽤 성장해 있었다. 정난희에게 삐쳐있는 자기 마음처럼 그동안의 무관심에 토라진 것 같았다. 찬찬히 보니 무더위에 타는 갈증으로 힘겨워했다. 오랜만이지만 애정이 변치 않았음을 보여주려 호수를 가져다 길게 폈다. 수도꼭지에 연결하고 물을 틀었다. 얼른 뛰어가 호수 끝을 잡고 조절하여 강하게 때론 약하게 뿌렸다. 큰 나무들이 몸통에 물줄기를 맞고 시원스레 등목 하는 마냥 의젓하게 받아들였다. 줄기와 잎들은 간지럽다고 요란 떨며 물방울을 튕겨냈다. 아래에 작은 나무와 꽃들이 떨어지는 물방울을 양팔 벌려 환영하였다. 땅바닥 개미들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려 부지런히 움직였다. 고여가는 물에서 벗어나 안전한 장소로 대피했다. 맨날 틀리는 일기예보를 불평하듯 하늘을 쳐다봤다. 문승협이 놀래주려는 속셈으로 안심하고 있는 개미들을 향해 흩뿌렸다. 혼비백산좌충우돌하는 모습에 악동처럼 빙긋 웃었다. 정원구석구석 가려운 데를 긁어주려 안 닿는 곳이 없게 물을 뿌렸다. 문득 타는듯한 날씨에 물줄기를 갈구하는 정원식물들이 관심과 애정을 갈망하는 자신 같았다. 애타하는 마음을 해갈시킬 만큼 충분히 사랑을 뿌려주며 대리만족하였다. 언제나 제자리에서 늠름히 성장하는 나무들이 부러웠다.
모처럼 착한 일을 해서 기특하다는 엄마칭찬을 들으며 호수를 정리했다. 외출하는 아버지에게 용돈으로 수고를 보상받았다. 전화 왔다는 문윤아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난희일까 싶어 후다닥 뛰어가 받았다. 오후에 석빙고에서 만나자는 김부일전화였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책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이담이 도서관입구에서 문승협을 반겼다. 서울친구들을 따라 천영기도 진도로 여행 갔다며, 토요일쯤 돌아온다고 하였다. 자기도 가고 싶었으나 집에서 허락을 안 해줘 못 갔다며 아쉬워했다. 둘이 매점에서 점심을 먹고 공부하다 3시에 맞춰 석빙고제과점으로 갔다.
“악, 눈이.”
“승협아 으째 그라냐?”
“영이야, 너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어.”
“뭔 소리여, 왜야?”
“네가 너무 예뻐서 눈이 부셔, 책임져라.”
“호호호, 연설하네 참말로, 깜짝 놀랐다야.”
“아야 문승협, 우리 각시한테 히야가시 하는 거여?”
“아니, 진심인디.”
“세상 오래 살아야 쓰겄다, 승협이가 그런 말도 하고.”
“하하하, 영이야, 잘 있었어?”
“잉, 잘이야 있었제.”
“왜, 무슨 일 있어?”
“부일이가 내 말 안 듣는 거는 이미 알 것이고, 정이가 서울로 전학 간단다.”
“그래? 왜?”
“여그서 서울 댕기믄 활동하기 힘든께, 왔다 갔다 하느니 아예 옮기기로 했어.”
“가족들이 서운하겠다. 정이는 뭐래, 좋아해?”
“말도 말어, 그냥 해방감에 들떠갖고 난리도 아니어. 저그 실실 쪼개믄서 온다.”
“승협오빠, 안녕? 이담오빠, 안녕하세요.”
“담이랑 인사했었나?”
“잉, 전에 니 공연 끝나고 했어.”
“야 채정이, 너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닌데, 승협오빠랑 헤어져서 눈물이 앞을 가려.”
“하하, 엄마아빠를 생각해야지, 너무 웃고 다니잖아?”
“긍께 말이어, 엄니아부지는 걱정 땜시 잠도 못잔디, 저 가시나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내가 애도 아니고, 걱정을 태산처럼 안고 산다니까.”
“처제, 가기 전에는 가족들하고 시간 좀 보내야제?”
“오빠, 목포를 떠나는데 친구들하고 송별회는 해야죠.”
“서울 가면 어디에 있어?”
“일단 이모네 집, 곧 독립해서 자취할 거야.”
“안돼, 자취는 안돼. 안 그러냐 담이야?”
문승협은 얼마 전 일이 퍼뜩 떠올랐다. 천영기를 따라가 자취와 하숙하는 친구들을 만났었고, 그때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 기억났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이 어색해서 이담에게 동조해 달라며 시선을 보냈다.
“오빠, 왜 그렇게 민감하셔, 그러려면 내 애인 하든가?”
“안돼, 위험해. 담이야, 너도 며칠 전에 보고 들었잖아, 뭐라 말 좀 해봐.”
“보호자가 없으믄 단속하는 사람이 없은께, 금방 타락하기 쉽겄드라.”
“아이고 걱정 붙들어 매쑈, 다 나 하기 나름입니다. 저 채정이에요, 인간 채정이.”
“영이야, 절대 자취는 안 된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려. 반드시 이모집에 있게 해, 알았지?”
“으 응, 니가 펄쩍 뛴께, 아무래도 그래야 쓰겄다.”
“부일아, 너도 같이 가서 말씀드려, 꼭?”
“니가 뭔 말한지 알어, 나도 반대할 거여.”
“어허, 이 사람들이, 이 채정이를 시피보는구만?”
“니를 못 믿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의심하는 것이어.”
“아 됐어 언니, 그만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시나가 대가리만 커갖고 말을 안 들어 쳐묵어 그냥.”
“승협오빠, 서울에 올 때 연락해. 잠잘 곳 없으면 내가 재워줄게, 승협오빠에게만 주는 특혜야.”
“저거 봐라 저거, 벌써 저런다니까. 정이야, 제발 오빠말대로 해라, 응?”
“호호, 승협오빠가 나랑 사귀면 말 들을게. 남자친구 말이라면 들어야지, 암.”
“어휴, 채정이.”
“알았어 알았다고, 나도 이모집에 있을 생각이야.”
“그 말 진짜지?”
“네, 진짭니다, 오빠가 그렇게 걱정해 주니 고맙네.”
채정이는 자취한다는 말에 발끈해서 놀랐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장난스레 문승협마음을 떠봤지만, 채영이와 김부일에게까지 당부하자 정말로 걱정한다는 걸 알았다. 더 이상 고집 피울 수 없었다.
이담이 마치 동생이나 애인처럼 걱정하는 문승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쩌면 문승협마음에 채정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적어도 문승협이 채정이를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은 확신하였다.
채정이가 한시름 놓은 문승협에게 집전화번호를 물어 확인했다. 서울에 있을 이모집과 매니지먼트회사의 연락처를 적어 건넸다. 서울에 가거나 목포에 오면 서로 연락하기로 약속하였다.
종업원이 카스텔라와 음료를 가져왔다. 문승협은 포크로 카스텔라를 찍어 채정이에게 건넸다. 앞으로 있을 채정이 계획을 화제로 이야기 나눴다.
채정이가 부탁해서 김부일이 마련한 송별자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채정이가 제과점을 나와 문승협에게 악수를 청했다. 헤어짐을 서운해하며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문승협은 채정이 손등을 토닥여주며 마음으로 응원하였다. 채정이가 가면서 몇 번 뒤돌아보았다. 이담이 김부일과 채정이자매가 가는 걸 지켜보는 문승협어깨를 툭툭 쳤다. 여자친구 한현진을 만나러 같이 가자고 했다. 문승협은 둘이서 좋은 시간을 보내라며 사양하고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여름 시립도서관은 선선한 아침에는 방학한 학생들로 만원이었다. 점심이 지난 후덥지근한 시간에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해가 떨어져 열기가 가신 저녁에 다시 몰려들었다. 그러나 불빛을 찾아드는 나방과 신선한 젊은 피를 보양하려는 모기들 때문에 어수선하였다. 다들 견디다 못해 집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