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2부 2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32)

by 태양을 품은 별

월요일아침인데도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시립도서관으로 집결하였다. 방학초기에 안 보이던 친구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근황을 묻느라 시끌시끌했다. 가족과 휴가 가거나 친구끼리 놀러 갔다는 이야기가 주류였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기온과 습도가 높아지면서 학생들이 야외열람실로 몰렸다. 식곤증과 무더위가 공부를 방해하였다. 문승협과 친구들이 도서관 한편에 있는 높다란 느티나무아래로 모여들었다. 그늘진 데다 바람이 잘 통해 그나마 시원하게 느껴졌다.

“염병, 더워서 공부가 안 된다야.”

“긍께, 뭔 날씨가 이러까잉, 아주 푹푹 쪄 죽이는그만.”

“저 매미시끼들마저 방해하고 말이어, 맴맴맴맴.”

“매미는 승협이잖애, 하하하.”

“너 더위 먹었구나?”

“아야 아그들아, 우리 스터디그룹 만드까?”

“스터디그룹?”

“잉, 방학 끝날라믄 아직 2주 정도 남았은께, 그때까지 같이 공부하게야?”

“어떻게?”

“우리 누나가 방학이라서 내려왔는디, 공부 좀 갈쳐달라고 하끄나?”

“아, 서울대에 댕기는 혜경씨?”

“장기원, 2살이나 많은 친구누나한테 혜경씨가 뭐냐?”

“영후야, 느그 누나가 갈쳐주까?”

“잉, 할 일없다고 맨날 집에서 배 깔고 뒹굴고 있단께.”

“장소는 아?”

“우리 집에서 하지 뭐.”

“우리야 좋제만, 느그 어무니한테 미안한디?”

“괜찬해, 대신에 시원한 거나 먹을 거 좀 사 와.”

“으짜냐, 느그 홍인고 김달우랑 이담도 같이 할래?”

“달우는 영후네랑 사촌 간인디 뭐.”

“느그가 좋다믄 나도 같이 하께.”

“우리 문일고는 명성윤이 조운대, 승협이랑 기원이, 영후까지 하믄 다섯 명이다잉.”

“전부 하믄 일곱 명이나 된디 괜찮으까?”

“그라믄, 오늘 집에 가서 확실하게 한번 물어보께.”

김영후가 친구들 잡담으로 깔깔대는 중에 제안한 스터디그룹이 급물살을 탔다. 서울대영문과에 다니는 누나 김혜경에게 묻지도 않고 지도선생으로 정했다. 장소 또한 김영후집으로 잠정 결정하였다. 내일 아침 9시에 도서관에서 만나 최종결과를 알려주기로 했다.

각자 자리 잡은 야외열람실로 돌아가 다시 공부를 시도하였다. 여전히 푹푹 찌는 더위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을 덮었다. 하나 둘 집에 가서 공부하겠다며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이담도 집중되지 않는다며 문승협에게 나가자고 부추겼다.

“나오긴 나왔는디, 딱히 갈 데도 없다잉.”

“우리 집에 갈래? 평일이라 아빠도 출근하고 없어.”

“집이 어딘디야, 가찹냐?”

“응, 바로 저기, 조금만 가면 돼.”

“오케바리, 가자.”

“진짜 날씨가 덥긴 덥다.”

“승협아, 물어볼 것이 있는디.”

“뭔데?”

“이상하게 듣지 말고, 그냥 내 생각이어.”

“하하, 뭔데 그래?”

“니 채정이를 어뜨크롬 생각하냐?”

“그냥 좀 아는 동생, 친구여자친구의 여동생정도지 뭐.”

“채정이랑 잘해볼 생각은 없고?”

“무슨 뜻이야?”

“나는 정난희보다는 채정이가 나아 보이드라?”

“어떤 면에서?”

“우리 친구들이랑 같이 어울리기도 편할 거 같고,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그래? 난희랑 같이 만나면 많이 불편해?”

“아싸리 까놓고 말하믄, 조까 그래. 난희랑 같이 있으믄, 다들 뭔 일 있으까 하고 전전긍긍이다야.”

“하긴, 나도 그랬으니까. 난희 눈치 보랴 너희들 눈치 보랴, 불안 불안했어.”

“니한테는 미안한 말인디, 한마디로 바늘방석이여.”

“알아, 그래서 너희들한테 미안하고 그랬어. 난희도 그걸 아니까, 내 친구들하고 같이 만나는 걸 싫어하고.”

“막말로 얼굴이나 거시기는 비까비까한디, 성격은 채정이가 훨씬 낫제. 니를 좋아하는 것도, 난희보다는 채정이가 더 좋아하는 거 같드라.”

“하하, 그렇게 비교하는 건 아닌 것 같다만,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맘 상했으믄 미안하다, 어제 채정이하고 니 하는 거 보고 생각난 거여.”

“아니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나도 이게 맞는 건가 싶고, 사실 잘 모르겠어.”

“그라믄, 이참에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라.”

“야, 아무리 그래도 의리가 있지, 한번 선택한 마음을 바꿀 순 없잖아?”

“연설하네, 무슨 나라를 바꾸냐? 남녀관계에서 아니다 싶으믄, 그럴 수도 있제.”

“뭣이라, 너는 한현진을 버릴 수 있어?”

“그거랑은 다르제, 나는 현진이를 사랑한께.”

“사랑? 나도 난희 사랑해, 난 배신하긴 싫어.”

“승협아, 진짜 사랑하는 것인지 배신하기 싫은 것인지, 잘 생각해 보란께?”

“하하, 사랑이라니까. 왜, 못 믿겠어?”

“못 믿는 거랑 안 믿는 거는 다르다잉,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니랑 채정이가 더 어울려야.”

“그러면, 홍지아는 어때?”

“홍지아도 괜찮제. 홍지아가 니한테 하는 걸 보믄, 니를 무자게 좋아하는 것이 확실해.”

“너 난희만 싫어하는구나?”

“어허, 싫어하기보단 친구의 행복을 상상하는 것이어.”

“내 행복을 왜 네가 상상하냐?”

“허허, 그런 말이 아니라, 니를 좋아해 주는 여자가 내 눈에 보인다 그 말이여.”

“넌 사랑받는 걸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사랑하는 걸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따, 복잡한 말을 해 쌌냐, 내가 사랑해야 사랑이제.”

“그래, 다들 사랑한다고 말하지, 사랑받는다고는 말하지 않으니까.”

“당연한 거 아니어?”

“많진 않겠지만, 사랑받음을 느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니는 사랑한다는 거여 사랑받는다는 거여?”

“모르겠어,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할 것만 같아.”

“니 무자게 철학적이다잉, 뭔 말이지 하나도 모르겄다.”

“하하하, 그래서 철학책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 건가 봐.”

“긍께 나는 폴쎄 철학책은 제껴부렀어.”

“담이야, 친구의 행복을 상상한다는 네 말 마음에 든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날 좋아해 주는 걸 알아봐 줘서 고맙고. 나도 그런 진정한 친구가 되어야 할 텐데.”

“난 진정한 친구 그런 거 잘 몰라야, 그냥 눈치여 눈치.”

“어쨌든, 그 눈치 나를 위해 쓴 거잖아, 그게 고마워.”

문승협은 이담에게 사랑이 뭔지 물으려다 말았다. 사랑을 논하기에 아직 미숙하고 확증편향이 뻔했다. 서로 의견을 늘어놓으며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 싫었다. 은연중 하는 말에 문승협생각이 드러났다. 이담이 제기해 나타난 문제는 정난희에게 답이 있다는 걸 알지만 심란한 고민거리였다. 스스로 결정하여 책임질 일이라 여겼다. 무엇보다 자기감정에 맡기고 싶었다.

엄마 이항리가 처음 집에 온 아들친구 이담을 반갑게 맞았다. 편히 공부할 수 있도록 다다미거실에 상을 두 개 펴줬다. 정원을 잇는 토방유리문도 활짝 열어젖혔다. 문현아가 과일을 가져다주었다. 문승협과 이담은 과일을 먹으면서 공부하였다. 선풍기바람과 정원그늘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맞으며 잠시 낮잠을 자기도 했다. 이담은 저녁까지 먹고 8시 조금 넘어 집에 갔다.


김영후엄마의 허락으로 스터디그룹을 하게 됐다. 시립도서관이 가장 덥고 한참 졸리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로 정하였다. 명성윤이 첫날 첫 대면이니 돈을 갹출하여 중앙시장에 들러 과일을 사가자고 했다. 김영후집은 북교국민학교 맞은편에 있었다.

김영후엄마는 선한 인상에 상냥하였다. 김혜경은 깜시라 불리는 김영후와 비교하면 얼굴이 하얬다. 작은 키에 순둥순둥 귀엽고 예뻤다. 낯가림하며 쑥스러워했다. 짓궂은 장기원장난에 금세 얼굴이 빨개졌다. 동생친구들에게 위엄을 보이려고 인상 쓰며 야단치는 행동마저 깜찍하였다. 수줍어하는 태도로 보아 전교회장경력은 의외였다. 고등학교까지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쳐본 적 없고, 목포시 또래여고생 중 서울대에 합격한 몇 명 안 되는 재원이었다. 동시통역사나 번역가를 꿈꿨다. 스터디그룹을 시작하면서 김혜경능력이 빛을 발했다. 침착하게 개별성적을 파악해 교재를 골랐다. 지도방향을 설명하고 진도를 정할 때는 눈빛이 초롱초롱하였다.

“성문종합영어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잉, 문법과 독해중심으로 하겄다는 뜻이어. 그라고, 수업마지막 30분간은 질의응답하믄서 개인지도할 텐께, 궁금한 거 있으믄 메모했다가 그때 물어봐.”

“아그들아, 이 수박하고 참외랑 묵어봐라, 느그들이 사 온 것인디 여간 맛나다야.”

“어무니, 이따 가져오쑈, 지금 묵으믄 배불러갖고 공부에 집중이 안 돼라우.”

“쪼까 쉬었다 해라, 시원할때 언능 묵어.”

“어허, 인자 책폈는디 그라요.”

다들 첫날은 공부방법 등을 정하느라 대충 끝날 줄 알았으나, 김혜경은 과일을 물려가며 수업을 진행했다. 알기 쉽게 가르쳐서 누가 봐도 총명하였다. 김달우와 이담이 진도를 따라가기 벅차하자 속도를 조절했다.

명성윤과 김영후는 문일고문과에서 전교 1,2등을 다퉜다. 문승협은 전교 10등 안에 드는 정도고, 조운대와 장기원은 전교 15등에서 20등 사이였다. 김달우와 이담은 홍인고이과에서 전교 30등 안팎이었다.

김혜경이 2시간 동안 쉼 없이 가르침을 이어갔다. 강의를 마무리하며 숙제를 냈다. 어물쩍 거부하는 동생친구들을 단호히 나무랐다. 의외의 카리스마가 대반전이었다. 수업종료 후 다시 부끄러워하는 여학생으로 변하였다. 친구들이 김혜경에게 팬이 되겠다고 아양 떨었다. 장기원은 능글능글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다들 페미니스트가 되어 여권신장의 선봉에 서겠다며 점수를 따려했다. 친동생 김영후와 사촌간인 김달우가 지켜보다 헛웃음 지었다. 김혜경의 충격적 실체와 양면성을 폭로하겠다며 나섰다. 김혜경이 당황해서 만류하자, 친구들이 김영후와 김달우에게 입만 벙긋하면 죽이겠다고 오히려 협박하였다. 김혜경은 당혹과 웃기를 반복했다.

김영후엄마가 저녁을 차려줬다. 너무 맛있어서 매일 먹고 가겠다는 조운대넉살에 얼마든지 그러라고 하였다.

다음날부터 친구들이 김혜경을 여신으로 받들겠다며 조공을 바쳤다. 좋아한다는 과자, 아이스크림이나 시원한 음료, 딸기, 포도, 무화과 등 각종 먹을 것을 매일 사갔다. 다들 영어공부시간을 즐거워했다.

문승협과 이담은 토요일 스터디그룹을 마치고 진도여행을 다녀온 서울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부용경집에 들어서니 팬티만 입고 뒹구는 6명의 모습이 산적소굴 같았다. 점심마저 거른 채 한밤중이었다. 천영기가 마지못해 일어나 라면을 부탁하였다. 문승협과 이담은 예전 경험을 토대로 큰 냄비에 삼양라면 10 봉지를 넣었다. 라면이 다 끓어갈 즈음 하나 둘 나왔다. 김철종이 상을 펴고 수저와 그릇을 놓았다. 천영기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냉장고에서 갓김치를 꺼냈다. 다들 하나같이 눈곱을 때며 밥상 앞에 앉았다. 허겁지겁 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 먹더니 동시에 국물을 들이켰다. 이구동성으로 ‘크’하며 속 풀이하는 소리를 냈다. 이담이 뭐 먹었길래 그러냐고 물었다.

“아야 말도 마라, 어제 낮부터 진도홍주를 마셔갖고 술에 찌들었다야.”

“그 진도쌀하고 지초인가 뭔가로 담근 술?”

“잉. 오메 죽겄는 거, 시방 쏙 쓰려서 디지겄다.”

“이그, 고등학생들이 잘하는 짓이다, 술이나 쳐묵고.”

“또 뭐 했는데, 가서 재미있었어?”

“응, 배 타고 나가서 바다낚시도 하고 회도 먹고.”

“야, 나는 그 진돗개가 무자게 멋지드라.”

“나는 바닷가에서 수영하고 노느라 시커멓게 타버렸다야, 깜둥이 다됐어.”

“문가야, 너는 형님들 오면 환영행사를 해야지?”

“하하, 며칠 전 전두환대통령이 해외순방 간다고 환송행사하듯 말이냐?”

“그러제, 순경대신 전경을 뽑는다는데, 전경들 쫙 깔아서 경호도 하고.”

“전경을 경호하려고 뽑겠냐, 아마 대학생들 대모진압하려고 그럴 거다.”

작은 박정진은 문승협을 ‘문가’라 부르며 친근감을 표했다. 서울친구들이 숙취와 누적된 피로 탓에 라면을 먹고 다시 드러누웠다. 계속 뒹굴거리다 서울행 마지막기차를 타려고 채비하였다. 내년에는 대학입시준비 때문에 못 오니, 겨울에 목포친구들이 서울로 놀러 오라고 했다. 서로 또 만나자는 상투적인 약속을 남겼다. 문승협은 역까지 배웅하고 집에 들어갔다.

다음날아침 문승협이 안방눈치를 살피며 전화기 주변을 서성거렸다. 9시가 넘어 실망하던 차에 전화벨이 울려 황급히 받았다. 목 빠지게 기다리던 정난희전화였다. 첫마디가 공중전화로 거는 시외전화라 긴 통화는 어렵다고 하였다. 별일 없이 공부 잘하고 있는지 물었다. 토요일 내려가니 일요일에 만나자고 했다. 만날 장소와 시간을 듣기도 전에 신호가 끊겼다. 기쁨도 잠시 서운함이 밀려왔다. 아무리 시외전화라지만 자기 할 말만 하다니, 보고 싶었다거나 보고 싶다고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설레던 감정도 같이 떠밀려 가버렸다. 허탈하게 수화기를 바라보다 내려놓았다. 머리가 복잡해 멍하니 앉아있었다. 전화벨이 다시 울려 잽싸게 받았다. 정난희가 생각보다 동전이 빨리 떨어졌다고 했다. 다시 전화하지 않으면 일주일 내내 공부에 방해될까 싶어 동전 바꾸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며 공치사하였다. 일요일오후 2시에 얼마 전 생긴 백제제과점서 만나자 하고는 일방적으로 끊었다. 문승협은 정확히 마음을 꿰뚫은 정난희말에 동감했다. 재차 전화 오지 않았다면 노심초사하며 한동안 집착에 사로잡혔을 것이었다. 고마우면서도 원망스러워 혼자 중얼거렸다. ‘지가 무슨 내 엄마야? 그 말할 시간에 보고 싶었다는,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 해주면 어디 덧나나? 맞는 말이지만 퍽도 생각해 주네, 오랜만의 통환데 이런저런 말할 여유 정도는 줘야지’. 그래도 잊지 않고 전화한다는 약속을 지켜줘서 감지덕지하였다.

월요일이 되면서 스터디그룹을 한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김혜경이 문승협에게 물었다.

“느그 서울친구들은 잘 갔대?”

“네, 토요일밤에 갔어요.”

“서울 무슨 친구냐?”

“부용경이라고, 친구의 친구예요.”

“누님, 승협이 서울서 전학 왔어라우.”

“아, 그래서 서울말씨였그만. 언제 왔는디?”

“국민학교 5학년인가, 맞냐?”

“으째 기원이 니가 대답하냐, 승협이 대변인이여?”

“허허, 누님말에 집중하다 본께 그라요.”

“나는 승협이가 서울말 쓴께 무자게 귀여움시로, 또 한편으로는 이상타 했어.”

“누나, 자두 좋아한다고 했죠?”

“음마, 우째 알았냐. 역시 승협이가 서울남자라서 그란가 쎈스 있다잉, 뒀다가 나 혼자만 먹어야겄다.”

“아따 나는 내일 한 트럭 사 와야 쓰겄다.”

“호호호, 잘생긴 승협이가 사 온 거 하고, 니가 사 온 거랑 같으까?”

“누님도 남자를 외모로 평가하요잉, 으째서 승협이만 이뻐하요?”

“아닌디, 니만 빼고 다 이뻐한디? 그라믄, 승협이는 여자친구 있냐 없냐?”

“있어라우, 목화여고무용부 정난희가 기여라.”

“아따, 기원이 니는 좀 빠져야. 으째 승협이한테 물어본디, 자꾸 니가 그라냐?”

“승협이가요, 깔치 있다는 말을 하기 싫어해라우. 밸스럽게 말이여.”

“야, 별나기는 뭐가 별나냐, 소문나면 여자친구가 불편할까 봐 그런 거지.”

“맞어, 여자친구를 배려해야제. 기원이 니는 승협이 따라갈라믄 한참 멀었다야.”

“그리고, 여자친구라는 말도 있고 좋은 말도 있는데, 깔치가 뭐냐 깔치가?”

“호호, 승협이가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네. 근디, 정난희믄 내가 아는 아그 같은디?”

“아마 알 것이요, 정난희가 목화여중 나왔은께.”

“맞어, 내가 목화여고 3학년 때 그 아그가 중3이었어. 얼굴은 이쁘고 한디, 보통내기가 아닐 것인디?”

“머시마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아갖고, 콧대가 허벌나게 높아라우.”

“알어, 우리 때도 유명했어. 아따, 승협이가 정난희랑 사귄단께는 좀 놀랍다야.”

김영후와 김달우에 이어 명성윤과 조운대가 들어왔다. 김혜경은 대화를 중단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영문법을 가르치면서 문득문득 문승협에게 미소 지었다. 영어독해를 마친 후 이성교제에 대해 물었다.

“이담이도 사귀는 애인 있드만?”

“허허, 애인이라 하긴 그렇고, 그냥 여자친구여.”

“으째, 누나 앞이라 부끄럽냐?”

“누님 친동생이나 가시나 꼬시는 방법 쪼까 갈쳐주쑈.”

“영후 니는 여자친구 없냐? 공부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한번 사귀어 봐, 괜찮해.”

“내가 알아서 할란께, 누나 니나 신경 써.”

“누님은 남자친구있는갑소잉.”

“기원아, 누나는 남자친구 같은 거 안 키워.”

“그라믄, 대학 가서 미팅은 해봤소?”

“한번 해보긴 했제.”

“으짭디어, 야그 좀 해주쑈.”

다들 김혜경미팅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장기원과 조운대는 대학에 가면 매일 미팅을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대학만 가면 화려한 인생이 보장되고 모든 게 잘될 거라는 확신에 찼다. 김혜경이 생각만큼 대학생활이 멋지지 않다고 하였다. 심화된 학습과정에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으나, 친구들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고등학교생활보다 자유가 있는 반면, 방종이 따라붙어 책임만 더 커진다는 말도 소귀에 경 읽기였다. 친구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대학에 다니는 김혜경을 그저 부러워하였다. 스터디그룹은 한층 공부에 열의를 높였다. 영어공부에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후에도 김혜경을 통해 대학생활정보를 얻었다. 스터디를 위해선지 김혜경을 보러 가는 게 목적인지, 2주가 번갯불처럼 지나갔다. 마지막날 토요일에는 책거리를 빌미 삼아 각자 사 온 과자를 펼쳐놓고 파티를 했다.

문승협은 책거리파티를 마치고 곧장 집으로 갔다. 서울에서 정난희가 내려오는 날이라 연락 오길 기대하였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TV를 보면서도 온통 신경이 전화기에 가있었다. 밤늦게서야 포기하고 잠을 청했다.

그래도 설렘 때문에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정난희에게 산뜻한 면모를 보여주려고 차림새를 구상하였다. 이부자리에 누워 뒹굴어도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약속시간이 남아 내키지 않은 점심을 챙겨 먹었다. 새로 오픈한 백제제과점을 찾아가야 해서 여유 있게 집을 나섰다.

백제제과점은 정난희집에서 문승협집방향으로 두 번째 버스정류소와 가까웠다. 시내중심가와 그리 멀지 않은 중앙시장 맞은편에 있었다. 정난희는 남들 시선을 피해 만나려는 의도였지만, 이제 막 개점한 탓에 오히려 손님들로 붐볐다. 아니나 다를까 문승협이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알은체했다. 아는 학생들이 많고 자리도 없어 마냥 기다리기엔 마땅치 않았다.

제과점을 나와 정난희집방향으로 걸었다. 걸어올 것을 예상하고 중간에서 만나 다른 장소로 가려하였다. 혹시 버스를 타고 올까 봐 정류장에서 기다렸다. 약속시간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20분이 지나면서 불안했다. 30분이 지나자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재빨리 백제제과점으로 뛰어갔다.

제과점 안을 두리번거리는데, 여학생이 다가와 방금 전 정난희가 나갔다고 알려줬다. 감사인사를 건네고 허겁지겁 정난희집 쪽으로 뛰었으나 보이지 않았다. 반대편 시내중심가로도 가봤지만 역시 없었다. 땀 흘리며 이리저리 분주히 찾아 헤매다 다시 제과점 앞으로 갔다. 무릎에 손을 짚고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살폈다. 길건너편에서 지켜보고 있는 정난희를 발견하였다.

정난희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걸음을 옮겼다. 문승협은 만났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지나가는 차량을 피해 서둘러 건넜다. 정난희가 오가는 사람들 시선을 의식해 가까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문승협이 눈을 흘기는 정난희에게 사과하였다. 백제제과점에 사람이 많으니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정난희가 멀찍이 떨어져서 오라며 앞장섰다. 문승협은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듯 털어내듯 하며 뒤따랐다.

정난희가 독일제과점으로 들어갔다. 문승협은 먼저 화장실을 찾았다. 화장실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초췌하였다. 정난희에게 보여주려 했던 아침에 생각한 모습과 딴판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리하였다.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늦어지면 한 소리 듣겠다 싶어 대충 마무리했다.

정난희가 자리에 앉은 문승협을 훑어보더니 쌀쌀맞게 고개를 획 돌렸다. 문승협은 조심스레 뭐 마실지 물었다. 아무 대답이 없어 시원한 밀크셰이크를 주문하였다. 무슨 말을 꺼낼지 망설이는 사이, 정난희가 화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약속시간 10분 전쯤 백제제과점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엄청 많더라고.”

“그럼 어디 갔다 온 거야?”

“어디 간 게 아니고, 너희 집 쪽 정류소에서 기다렸어.”

“거기서 왜?”

“네가 걸어오거나 버스 탔으면 거기서 내릴 줄 알고.”

“난 제과점을 지난 정거장서 내렸어, 두 번째 정류소.”

“그랬구나, 미처 생각 못했어.”

“바보 아냐? 그 정류소가 제과점 하고 더 가깝잖아.”

“그러게, 약속시간 30분 지나니까 그때 생각나더라고.”

“나 길에서 40분 기다렸어, 그것도 이 뜨거운 날씨에.”

“제과점 안에서 기다리지 그랬어, 날도 더운데.”

“자리도 없고 사람들도 많은데, 나보고 거기서 뻘쭘히 서서 기다리라고?”

“미 미안, 내가 그냥 거기서 기다릴걸 괜한 짓을 했다.”

“자꾸 변명하지 마, 그럴수록 실수를 돋보이게 하니까.”

정난희는 제과점에 사람들이 붐비고 자리마저 없어 나왔다. 들락거리는 손님들도 많아 건너편에서 기다렸다. 정난희눈에는 뒤늦게 나타난 문승협행동이 약속시간에 늦어 허둥지둥하는 모양으로 비쳤다.

문승협은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정난희를 배려해서였지만, 변명하지 말라는 말에 움찔하여 입을 닫았다.

정난희가 무심히 문승협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주었다. 문승협은 언짢았던 마음이 금세 풀려버렸다.

“아까 제과점 안에서 누가 너 왔다 갔다고 말해줬었어.”

“누군데?”

“머리를 길게 딴 여학생이었어, 누군지는 몰라.”

“아, 아마 내 후배일 거야, 제과점에서 오빠 찾는데 인사하더라고.”

“그 후배가 날 알아?”

“왜, 인기남인 거 자랑하고 싶어?”

“아 아니, 모르는 여자가 말해줘서 조금 당황했거든.”

“참, 걔 채정이하고도 잘 알아.”

“채정이?”

“응, 친하대. 채정이 전학 간다더라, 2주 전에 오빠랑 석빙고에서 만난 것도 알던데?”

“아, 부일이가 나오래서 나갔더니 같이 있더라.”

“채정이가 전학 가면 오빠 서운하겠다?”

“아 아냐, 서운하긴, 그런 거 없어.”

“그래? 그때 만나서 이별의 정을 나눈 거야?”

“정은 무슨 정, 그런 거 없다니까.”

“그러면, 이별의 슬픔을 나눈 건가?”

“아니라고, 그냥 잘 가라고, 건강 조심하라고 했어.”

“오빠가 왜 딴 여자의 건강을 걱정해?”

“그냥 인사치레 한 거야, 다른 의미는 없어.”

“이상하네. 아무 의미가 없는데, 전학 간다고 인사는 왜 하며, 또 왜 만나지?”

“…….”

“그것도, 아주 공교롭게 여자친구가 서울 간 바로 다음날 말이야, 헤어지면서 포옹도 하고 손도 잡고.”

“포옹은 안 했어.”

“손은 왜 잡았는데?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봐?”

“…….”

“내가 분명히 한눈팔지 말고 공부에만 열중하라 했잖아, 기억 안 나?”

정난희는 서울 가기 전날 당부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럼에도 서울 가고 없는 날 채정이를 만난 건 바람이라고 의심했다. 이 기회에 채정이 문제를 뿌리 뽑으려 작심하였다. 바람피운 남자친구를 잡은 듯이 추궁했다.

문승협이 김부일을 만나러 갔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며 항변하였으나 통할 리 만무했다.

“그리고, 내가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말이야, 최선경은 또 누구야?”

“최 최선경은 어떻게 알아?”

“왜, 알면 안 돼?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어?”

“국민학교동창.”

“방송부아나운서였고, 복숭아알레르기도 있고, 둘이 얼 척 없는 사이였다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예쁘고 인기도 많았고, 둘 사이가 후배들도 다 아는 순애보라 던데?”

“…….”

“그 언니 심장병인가 뭔가로 죽어서, 지금은 저 하늘의 별이 됐다며?”

“옛날이야기야, 그만해.”

“왜,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같다더니, 생각하니까 마음이 찢어져?”

“…….”

“오빠 친구들도 참 이상해, 왜 남의 연애사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야?”

“친구니까 그러겠지.”

“친구면 그래도 되는 거야? 나는 오빠친구들이 이해가 안 가고 싫어.”

문승협은 말하는 내용으로 보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짐작하였다. 얼마 전 서울친구들이 왔을 때, 부현지가 정난희에게 전화하여 최선경이야기를 했다고 추측하였다. 그날 정난희와 통화하면서 집에 빨리 들어가라고 정색해 왜 그러나 싶었는데, 조각을 맞춰보니 납득이 갔다. 처음으로 목포라는 도시가 작게 느껴졌다. 소문이 금방 도는 좁은 목포가 싫었다. 항상 소문을 의식하는 정난희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친구들을 부정하는 부분은 수긍하기 어려웠다. 큰 박정진과 얽힌 염문 때문이라 생각하면서도, 서울친구들과 목포친구들을 기피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정난희와 오랜만에 만나는 애틋하고 가슴 떨린 설렘이 산산조각 났다. 썰렁한 분위기라 궁금했던 지난 2주간 정난희의 서울생활을 차마 묻지 못하였다.

급기야 정난희가 홍지아까지 재소환했다. 문승협을 바람둥이로 취급하며 짜증 냈다. 앞으로 계속 만날지 생각해 봐야겠다고 겁을 줬다. 이 상태로는 헤어질 수밖에 없다며 협박하였다. 어느 정도 분이 풀리고서야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진짜 끝이라며 용서했다.

문승협은 장장 2시간여 동안 질책을 들었다. 처분만 기다리는 죄인처럼 시무룩이 앉아있었다. 5시쯤 되어 정난희가 집에 가겠다고 해도 토를 달지 못하였다.

묵언수행하며 쫄래쫄래 뒤따라갔다. 집 근처에서 헤어질 때 잡아주는 정난희손이 유일한 위로였다. 다음 주에 전화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가는 정난희뒷모습이 불만스러운 것도 처음이었다. 딱히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는데도, 오늘만큼은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진 기분이었다. 자꾸 말끝마다 헤어진다느니 그만 만난다느니 하는 정난희발언들이 머리를 아프게 하였다.

집에 돌아와서는 더욱 심난했다. 조금 뜸하다 싶던 부모싸움이 있었다. 몸싸움 없이 험한 말만 오갔다는 동생들 말에 그나마 안심됐다. 부모심사를 거슬리지 않으려 조심하였다. 엄마하소연들을 준비를 하느라 공부는 엄두 내지 못했다. 평소 한 시간가량 넋두리면 견딜 만하겠으나, 오늘은 정난희영향으로 용량이 초과해 꽤나 힘들었다. 아침에 짊어지고 나간 희망이 집에 돌아와 보니 절망으로 바뀌어있었다.

다음날 오전에는 방학숙제를 마무리하고 이틀 앞으로 다가온 개학을 준비하였다. 점심을 먹은 후 도서관에 갔다. 김부일이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심드렁한 문승협에게 잠시 쉬자며 밖으로 불러냈다.

“으째, 뭔 일 있냐?”

“아니.”

“어허, 니 얼굴에 나 뭔 일 있소 하고 써있는디?”

“아 아니야, 별일 없어.”

“연설하네 진짜, 언능 말해 보란께?”

“나 사실 난희 때문에 조금 고민이야.”

문승협은 여자친구 정난희문제로 딜레마에 빠졌다. 스스로 해법을 찾느라 고민했다. 망설이다 어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김부일이 한숨을 푹 쉬더니, 정난희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며 뜻밖의 답을 하였다.

“그런가?”

“그람, 난희 입장에서는 당연하제.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라, 니라믄 안 그러겄냐?”

“하긴, 나라도 그렇긴 하지.”

“아야, 백설공주계모도 질투하고, 얼마 전에 끝난 연속극 장희빈 봐라야.”

“MBC여인열전시리즈 드라마 장희빈?”

“잉, 거그서 이미숙이가 질투 땜시 난리디야, 가시나들은 다 그래.”

“그렇지, 여자는 질투 빼면 시체라고 하니까.”

“근디, 말끝마다 헤어지자느니 그만 만나자고 하는 건 쪼깨 문제 있다.”

“그건 왜? 화나니까 하는 말 아닐까?”

“그건 성격문제여, 좋게 내 맘이 그란께 하지 마라잉 그래야제, 그걸 무기 삼으믄 안 되제.”

“나도 사실 그게 마음에 걸려, 기분도 좋지 않고.”

“그라고, 내가 이런 말 해도 될란가 모르겄는디. 솔직히 말하믄, 나는 난희가 영 맘에 안 들어.”

“왜, 뭐가, 어떤 부분이?”

“말해도 되냐?”

“응, 괜찮아 말해봐.”

김부일입에서 정난희와 연관된 단어들이 술술 나왔다. ‘강한 자존심, 도도함, 자기중심, 이기적, 막무가내, 고집’등이었다. ‘단속, 구속, 조종’등의 표현을 써가며 문승협을 좌지우지하려 한다고도 했다. 남자에게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의리인데, 친구까지 문제 삼는 건 남자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거라고 하였다. 천영기와 이담이 말했던 정난희약점들과 비슷하였다.

“내가 난희에 대해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어?”

“아야, 그걸 꼭 말해야 아냐. 옆에서 지켜보믄 답이 나와, 척하믄 척이제.”

“그게 연애경험이라는 건가?”

“그건 그렇고, 니 난희친구들 만나봤냐?”

“아니, 아직 본 적 없어.”

“으째서야?”

“난희가 무용하느라 바빠서겠지, 난희친구들은 왜?”

“아니다, 그냥 물어봤어.”

문승협은 씩 웃는 김부일미소에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김부일이 어깨를 툭 치고 열람실로 가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니도 난희를 좋아하믄 참지만 말고 할 말은 해’. 인간관계에서 존중과 배려가 중요하지만, 자신을 버릴 정도면 오히려 결핍이다.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문승협은 의미를 해석하느라 머리를 빠르게 돌렸다.

‘사랑한다면 너를 말하길 주저해서는 안돼, 그게 지나치면 방관이 될 수 있고, 계속된 인내는 한순간에 포기를 하게 해. 상처 준다는 두려움에 멈춰서도 안돼, 좋은 방법을 찾아 너를 말해야 해, 인간은 상호작용으로 살아가는 거니까. 투정과 짜증을 받아주는 것을 헌신이나 희생이라고 착각하지 마, 그럴 가치가 없어지는 순간에 경멸, 멸시, 무시로 돌변해서 분노가 폭발하게 돼.’

어디선가 들려오는 충고 같았으나 생각에서 나온 독백이었다. 무언가 알듯하면서도 명쾌하지 않아 복잡했다. 머리가 지근지근 쑤셔왔다. 정난희문제점이라는 친구들 의견을 하나씩 곱씹으며 정리하였다.

‘나는 친구들이 걱정하는 나쁜 여자 신드롬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야. 사랑하는 방법이 비슷할 순 있어도, 자기만의 디테일에서 다르니까 사랑의 모습은 다양할 수밖에 없어, 당연히 사랑은 다채로워야 해. 만약 사랑이 다 같은 형태라면 모범답안이 있을 것이고, 그걸 알게 되면 사랑은 떨림 없이 지루할 거야, 다 다르기에 둘만의 사랑이 아름다운 거야. 난희의 강한 자존심은 자존감에서 오는 자신감이고 그게 바로 도도함이지. 난희를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지만 어찌 보면 주도적인 책임감이야. 막무가내와 고집도 자기주장이잖아. 난희가 자주 짜증 내는 이유는 부모에게 억압과 통제를 받고 무용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일 거야. 설사 내가 난희의 스트레스를 담아내는 쓰레기통이어도 좋아. 앞으로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고 절대의리로 감싸 안을 거야. 설사 난희가 크게 잘못한 뒤 반성 없이 미안하다고 말뿐인 사과만 하더라도 상관없어.’

문승협은 친구들이 헤어지라며 거론한 단점들과 그동안 만나 오면서 느낀 모든 문제들을 정난희장점으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심리배경에 이별트라우마가 크게 작용했다. 어릴 적부터 부모, 최선경, 서수연선생 등에게 겪은 수많은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속깊이 내재됐다. 정난희와 첫 입맞춤이 순정인 문승협에게 당연한 귀결이었다. 옳은 방향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씩 마음을 정리해 가면서 뭔가 정립되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난희에게 깊숙이 빠져있었다. 서서히 평상심을 찾아가면서 김부일에게 괜히 털어놨다는 창피함과 후회가 몰려왔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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