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2부 3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33)

by 태양을 품은 별

이틀 뒤 2학기개학을 맞았다. 유달리 무더웠던 여름방학을 어떻게 보냈는지 서로 안부를 확인하였다.

긴장과 설렘의 한주가 순식간이었다. 토요일 방과 후 친한 친구들끼리 야구경기를 보려고 TV앞에 앉았다.

서울잠실야구장에서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개막했다. 대륙별 2개국씩 총 12개국이 참가하여 9월 4일부터 18일까지 66게임을 벌이는 일정이었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는 1938년 영국에서 영국과 미국경기로 시작해 2년마다 열렸다. 1972년부터 명실상부한 아마추어야구최고권위의 세계대회로 발전하였다. 주로 중남미권에서 개최되어 오다 재작년 제26회 대회를 일본이 주최한 바 있었다. 이번 한국에서 시행하는 제27회 대회는 1977년에 결정됐다. 한국은 경기기술과 관리능력면에서 세계최고면모를 보여주고자 정성을 들였다. 체신부는 우리나라 스포츠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한국야구팀은 이탈리아와 개막경기에서 역전패하였다. 1:0으로 앞선 7회 초에 2점을 내주는 일격을 당해 아쉬웠다. 이튿날은 강적 미국을 상대로 역전승했다. 1회 초 1점을 내주면서도 3회와 5회 말에 1점씩 추가하였다. 선발투수 선동열이 5피안타 15탈삼진으로 완투한 덕분이었다. 대한민국 야구팬들이 열광하면서 야구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됐다.

월요일아침 목포소재 고등학교전체가 술렁였다. 한 달여 만에 친구들을 만난 반가움도 잠시 친구라는 말이 무색할 비보가 전해졌다. 시내 고등학교1학년 남학생이 집단 따돌림을 당해 학교옥상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 개학 1주일 사이에 발생한 일이라 다들 놀랐다. 작년 10월경 중학교3학년 여학생 사망사고와 유사해 큰 충격을 주었다. 학생들 사이에 집단 따돌림을 뜻하는 일본어‘이지메’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였다. 짓궂은 장난을 치고 ‘이지메 시켰다’는 말로 희화화하면서 친구들 간 폭력과 가혹행위를 비난했다. 괴롭히던 학생들도 주위 눈치에 자제하였다. 그렇게 사라지는 줄 알지만 수면아래로 잠시 내려갔을 뿐 숨어서 암암리 행해졌다. 대놓고 하던 행위들이 보이지 않은 곳으로 가면서 오히려 악랄했다. 피해학생의 내상은 더욱 심각하였다.

각급 학교가 뒷북조사에 들어갔다. 학생들을 면담하고 대책마련에 분주했다. 언론보도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학부모회와 육성회가 강하게 압박했다. 문일고도 아침과 야간자습시간에 실태를 파악하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문일고와 몇몇 학교들이 ‘신고함’ 설치를 대책으로 내놓았다. 학년별로 교련시간과 체육시간에 작업인원을 차출하여 신고함을 만들어 비치했다. 학생 간 문제를 신고하면 학교가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뜻이었지만, 학생들 생각은 달랐다.

“염병, 뻘짓거리들하고 있다 참말로. 뻔히 보이는 곳에 설치해 놓으믄 퍽도 잘 적어서 넣겄다.”

“누구든 신고함 근처에 얼씬거리기만 해도 시선을 모틀거고, 특히 때린 놈이 바로 눈치챌 것인디 말이어.”

“어디 그뿐이냐? 암시랑토 안 한 일들까정 고발할 거다. 결국 우리끼리 의심하게 만드는 거여.”

학생들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탁상공론 주먹구구식이라고 힐난하였다. 신고남발과 불신조장을 염려했다. 신고행위를 용기 없는 비겁한 고자질로 폄하하며 삐딱하게 바라보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나마 문일고는 학생들 비판을 뒤늦게라도 받아들였다. 신고함을 ‘소원수리함’으로 명칭을 바꿔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으로 옮겼다. 학교에 건의할 사항도 적어 넣는 함이라는 의미였으나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소원수리? 소원을 수리한다고? 들어주지도 않을 소원을 왜 써넣으라는 거여?’라며 비아냥거렸다. 소원수리함이라는 명칭에 불만이었고, 효과도 없을 거라며 이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모르게 소원수리함을 눈여겨보는 학생이 있었다.


토요일 2교시가 끝나고 개학맞이특별대청소시간이 되었다. 전교생이 청소하느라 분주히 움직이면서 교정이 들썩였다. 학년별 반별로 보름씩 돌아가며 청소하는 학교공동구역은 2학기 시작과 함께 새로 배정됐다. 2학년 4반은 2학년이 사용하는 수돗가청소를 할당받고 1분단장 장기원에게 맡겼다.

문승협이 30여분쯤 지나 청소상태점검에 나섰다. 야외화단구역을 둘러보고 수돗가청소를 확인하러 갔다. 학교공동구역은 담임이 아닌 교무주임에게 청소검사를 받아야 해서 다들 열심이었지만, 어떤 아이는 어슬렁거리며 요령 피웠다. 1분단아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노병돈과 아이들이 청소에 열중인데 반해, 장기원은 이병규와 장난치기 바빴다. 학교생활에서 흔한 광경이나 문승협눈에는 조금 남달라 보였다.

노병돈이 조금 먼발치서 장기원동태를 살폈다. 이병규는 짓궂은 장기원장난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청소 안 하는 친구를 불만스레 바라보는 아이와 장난을 싫어하는 아이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몰래 장기원을 째려보며 분노한 노병돈눈빛과 장기원을 거부하며 괴로워하는 이병규표정이 묘했다.

장기원이 다가오는 문승협을 의식하면서도 모른척하였다. 청소 다 했느냐는 질문에도 아랑곳없었다. 문승협이 보다 못해 언성을 높이자 그제야 멈췄다.

“아따 깜짝이야, 으째 악쓰고 지랄이어?”

“대답 않고 장난만 치니까 그러지.”

“내가 장난치든 말든 니가 뭔 상관이어? 니는 눈깔 없냐? 보믄 몰라?”

“야 장기원, 노병돈이랑 애들은 아직 청소 중이잖아?”

“아야 노병돈, 청소 아직 안 끝났어? 내가 빨리 끝내라 했냐 안 했냐?”

“해 했어, 인자 다 끝나가.”

“분단장이면 솔선수범해야지, 얘들 청소하느라 열심인데, 너는 이병규랑 장난만 치냐?”

“아따 시끼, 뭐라고 씨부려쌌냐, 확 조져불란께.”

“야 기원아, 승협이가 부반장인께 한말인디 그라냐?”

“긍께 말이어, 둘이 친하믄서 뭔 그만한 일로 싸우냐?”

장기원이 주먹 쥐고 문승협을 위협하자, 1분단아이들이 재빨리 말렸다. 노병돈과 이병규는 뜻밖상황에 놀랐다. 장기원이 주변만류에 태세를 바꿨다. 어물쩍 돌아서더니 빨리 청소나 하라며 아무 상관없는 노병돈뒤통수를 때렸다. 노병돈과 이병규가 다시 겁먹은 얼굴로 청소하면서 힐끔거렸다. 문승협이 어이없어하며 장기원을 지켜보는데, 이민상이 10여 미터 떨어진 2학년 화장실뒤편에서 불렀다.

문승협은 가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새로이 싱어를 맡은 주신까지 윙스멤버전원이 모여있었다. 수돗가청소점검차 올 것을 기다린듯하였다. 윙스멤버 5명이 긴장한 문승협을 가운데로 몰아 둘러쌌다. 강동우가 실실 비웃으며 다짜고짜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무슨 돈? 교습비 빌려준 건 지난번에 다 줬잖아.”

“그것은 받았는디, 곰곰이 생각해 본께, 니가 세컨기타 빌려 쓴 값도 받아야 쓰겄다.”

“뭔 소리야? 용남이가 윙스 그만둘 때, 내가 싫다는데도 세컨드기타 교습비를 내주겠다는 것도 너고, 그 기타를 빌려주겠다고 한 것도 너야. 교습비는 미안해서 줬지만, 기타 사용료를 달라는 건 억지 아니냐?”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 이제. 안 그냐 아그들아?”

“그라제, 똥 싸러 갈 때랑 똥 누고 나올 때랑 같가니?”

“야, 너희들도 그렇다. 그룹사운드를 위해서 나도 나름 희생하겠다는 생각에 받아들였더니, 이제 와서 이런 생떼를 쓰는데 동조하냐?”

“우리가 으짜겄냐, 기타 주인이 받겄다는디.”

“너희들 내가 호구로 보이니?”

“허허, 느자구 없는 시끼 말 잘했다. 우리가 잡으믄 호구제, 호구가 별거 다냐?”

“어따 데고 눈을 부라리냐, 확 씨 눈깔 뽑아불란께.”

“음마, 잘하믄 한대 치겄다?”

“장난은 여기까지만 받아준다, 한 번만 더 이런 식이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아.”

“니가 가만히 안 있으믄 으짤래, 이 호로새끼를 그냥.”

강동우가 눈을 치켜뜨며 경고하는 문승협멱살을 쥐었다. 문승협이 강동우손을 돌려 꺾는 순간, 주신이 주먹을 날렸다. 문승협이 제압한 강동우를 주신에게 밀어버렸다. 둘이 엉켜 밀려나면서 물고랑에 걸려 나동그라졌다. 문승협이 얼른 싸우는 자세를 취하였다. 호기롭던 이민상과 우상호가 움찔하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장기홍은 잔뜩 겁먹어 손을 가로저었다. 문승협이 싸울 의사가 없음을 알고 매무새를 정리했다.

노병돈과 이병규가 수돗가청소를 마무리하다 그 광경을 목격하였다. 놀란 눈으로 서로 마주 보았다. 순둥순둥 하다고만 생각했던 문승협을 다시 봤다. 장기원이 화장실뒤편서 나오는 문승협에게 후다닥 뛰어가 청소를 끝냈다며 확인해 달라 하였다. 문승협은 요동치는 심장을 억누르며 별일 없었다는 듯 점검했다. 교무주임에게 검사 맡을 테니 교실로 먼저 들어가라고 하였다. 장기원과 다른 1분단아이들은 서둘러 가는 반면, 노병돈과 이병규는 천천히 걸으며 몇 번 뒤돌아보았다. 윙스멤버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문승협은 그룹사운드를 떠나면서 발생한 문제들이 대화로 해결됐다고 여겼으나 착각이었다. 멤버들과 계속 함께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늘 찝찝했었다.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윙스멤버들은 문승협탈퇴 이후 두 번 공연했지만 평가가 그리 좋지 않았다. 새로운 싱어 주신의 노래실력 때문에 그룹사운드 수준이 떨어졌다는 평판이 주류였다. 자연스레 리드보컬을 그만둔 문승협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악감정이 생겨 어떤 식으로든 보복하려고 별렀다. 화풀이를 궁리하다 리더 강동우의 터무니없는 아이디어에 동조하였다. 세컨드기타 사용료를 청구해서 주면 받아 챙기고, 안 주면 빌미 삼아 해코지하려는 계획이었다. 문승협이 당당하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멤버 5명이 위협하면 겁먹을 줄 알았는데 강하게 맞서 놀랐다. 정 안되면 힘으로 굴복시키려 했다.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고 망신만 당하였다.

반아이들이 교무주임에게 검사받고 교실로 들어서는 문승협을 보며 술렁였다. 세상에 더 이상 빠른 게 없을 정도로 소문이 순식간이었다.

김부일이 하교하면서 문승협에게 따라붙었다. 이리저리 살피며 윙스멤버들과 다툰 일을 궁금해했다.

“내가 리드보컬을 맡을 때, 우리 아빠가 반대하면 그만둔다는 조건을 걸었거든. 김용남도 엄마반대로 탈퇴했고, 윙스멤버들도 다 인정하는 사실이야. 세컨드기타도 맡기 싫다고 했는데, 강동우가 교습비를 내준다며 사정사정하더라. 윙스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희생이었어. 강동우가 뻐기면서 공치사까지 했었다니까.”

“그런 내막이 있었그만.”

“이제 와서 뭔 소용이겠냐, 김용남은 무서우니까 못 건들고, 나를 만만하게 본거지 뭐.”

“맞어, 니가 참아준께 우습게 본 거여.”

“그래, 참는 게 능사가 아니고, 때로는 적절히 대응할 용기가 필요한 거 같아.”

“감히 내 친구를 건드려? 내가 손 좀 보까?”

“너 요즘 이민상이랑 친하잖아, 괜히 너 입장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니한테 그라믄 안되제.”

“생각해 보면 그럴 일도 아니야, 걔네들도 분풀이할 상대가 필요했던가 봐.”

“그란께 니도 시피뵈지 말고, 씨게 나갈 땐 씨게 나가.”

“그래도 너한테 말하고 나니까 좀 났다야.”

“허허, 으째, 그때 엄청 쫄리디?”

“그래, 쫄려서 디진 줄 알았다, 하하하.”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든 다 그래야, 근디, 한두 번 겪고 나믄 괜찮해.”

“너도 그런 적 있어?”

“그람, 허벌나부러. 한번 두 번 용기내기가 어려워서 그라제, 세 번째부터는 쉬워.”

문승협은 집에 와서도 윙스멤버들과 대치하던 상황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생각날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불안감을 떨치려고 책을 읽거나 TV를 시청하며 스스로 안정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정난희가 웬일로 일요일아침 9시 전에 전화했다. 다짜고짜 30분 후 시립도서관 앞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문승협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살짝 짜증 났다. 지난주 전화 않은 이유를 알려주지 않은 데다 외출준비시간도 부족해서였다. 부리나케 씻는 와중에 원망이 고개 들었다. 일요일아침마다 전화기 옆에 보초 세우는 것도 모자라 매번 설명을 생략한 정난희가 얄미웠다. 문득 무슨 연유로 시립도서관에서 만나자는 지 의아했다.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서면서 조금 전 불만은 사라지고 희색만연하였다. ‘얼마나 보고 싶어 안달이 났으면 9시 전에 전화했을까? 그래, 전화를 못하는 처지에 그나마 받게라도 해준 정난희에게 감지덕지해야지. 충성맹세도 모자랄 판에 분수를 모르고 불평을 하다니, 인간이라면 그래선 안 돼’. 미화된 상상은 정난희찬양을 넘어 숭배로 이어졌다. 들뜬 기분에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걷다 뛰기를 반복했다. 시립도서관에 다다라 먼 발취의 정난희모습이 천사 같았다.

“웬 땀이야, 뛰어왔어?”

“응 아니.”

“응이면 응이고 아니면 아니지, 응 아니는 또 뭐야?”

“아, 걷다 뛰다 했어.”

“천천히 오면 되지, 뭐가 급하다고 땀을 흘려?”

“괜찮아.”

“이리 와봐.”

정난희가 손수건을 꺼내 문승협의 이마와 콧등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줬다.

“향기 좋다.”

“그래? 손수건에 선물로 받은 향수 뿌렸어.”

“누구한테 받았어?”

“저번에 서울 가서 무용레슨 받을 때 교수님이 줬어.”

문승협은 향수보다 정난희가 더 향기로웠다. 정난희눈을 바라봤던 시선이 입술에 멈췄다. 순간 뽀뽀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오빠, 지금 어디 쳐다봐?”

“어 얼굴, 예뻐서.”

“무슨, 내 입술을 쳐다봤으면서.”

“아 아냐, 눈코입 다 본거야.”

“응큼하긴, 들어가자.”

“아 아냐, 얼굴 봤다니까.”

“뭐가 아냐, 내가 모를 줄 알고?”

문승협은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변명하였지만, 정난희눈치를 이길 수 없었다. 음란마귀에 씌어 변태가 됐다며 자책했다. 자연스러운 본능인 줄 몰랐다.

정난희가 먼저 시립도서관에 등록하고 입장하였다. 한적한 야외열람실로 앞장섰다. 나란히 앉아 책을 폈다.

둘만의 시간도 잠시, 금세 좌석이 반쯤 찼다. 학생들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문승협은 신경 쓰느라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난희는 동요 없이 가져온 책을 읽었다. 1시간여 지나 매점에 가자고 하였다. 주문한 오렌지슬러시를 받아 야외휴게실로 갔다.

“오빠, 어때?”

“뭐가?”

“도서관 데이트 말이야.”

“좋아.”

“나도 해보고 싶었는데, 오빠가 원할 거 같았어.”

“응, 부일이가 영이랑 도서관에 와서 공부하는 거 보니까 부럽긴 하더라.”

“미안해, 괜히 무용하는 나를 만나서.”

“아니야, 나는 좋아. 내가 좋으면 됐지, 그런 말을 왜 해.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 없어서 이러는 거야.”

“왜 그래, 오늘따라 이상해.”

“이만한 일에 이상하다니, 내 마음이 좀 그렇다.”

“별일 없는 거지?”

“응, 별일은 무슨.”

“진짜지?”

“그래, 진짜 진짜로 아무 일 없어.”

“휴, 다행이다.”

“근데 오빠, 나 이제 가야 돼.”

“벌써?”

“응, 이제 무용연습하러 가야지. 미안해, 오래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

“또 토라진다 또.”

“아니야, 토라지긴 아쉬워서 그런 거지.”

“그게 그거지 뭐, 그런 표정 지으면 내 맘이 편하겠어?”

“알았어 알았어, 미안. 가자, 내가 바래다줄게.”

“아냐, 오빠는 여기서 계속 공부해, 나 혼자 갈 테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 내가 바래다줄게, 응?”

“조르지 마시고 내 말 들으세요, 알았죠?”

“그래도 그렇지, 너무해.”

“어허, 내 말 들으셔야 또 이런 기회가 있습니다, 다음 기회가 싫으면 바래다주고?”

“다음에 언제, 언제 그럴 건데?”

“호호, 이럴 땐 꼭 애기 같아.”

문승협은 단호한 정난희성격을 알기에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서운함이 앞서 우겨봤다. 역시나 정난희는 이미 정한 생각을 바꾸지 않고 가방을 챙겨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문승협은 도서관담벼락에 서서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시야에서 사라지고서야 아쉬움을 접고 야외열람실로 갔다. 공부하려 해도 정난희여운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너무 일찍 헤어진 섭섭함에 산만하였다. 지나가버린 시간을 붙잡고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아야, 난희 어딨데?”

“너희들 언제 왔어? 난희 온 줄은 또 어떻게 알고?”

“방금 왔는디, 폴쎄 도서관에 쫙 퍼졌드만.”

“와따메, 소문도 빠르다 참말로.”

“아따 뭔 일이데, 난희가 도서관에 다 오고?”

“갔어, 조금 전에.”

“뭐 한디 벌써 갔대, 우리도 좀 보고가제는.”

“아마도 너희들 만날까 봐 겁나서 간 것 같다.”

“우리가 잡아묵냐, 뭐가 무섭다고.”

“야, 너희들 만나면 이렇게 난리 칠까 봐 그런 거야.”

“아야, 정난희 왔다메?”

천영기와 이담이 설레발치는 사이, 김영후와 김달우가 명성윤과 조운대를 뒤따라왔다. 이구동성으로 정난희를 찾았다. 다들 정난희에게 관심이 많았다. 이미 갔다는 말에 다들 아쉬워하였다.

“근데, 너희들 왜 그렇게 난희를 찾냐?”

“뭐 한디 찾겄냐, 친구애인인께 그라제.”

“더군다나, 정난희가 도서관에 나타날 줄은 호랭이도 몰랐을 것이다.”

“하하하, 긍께 말이어, 놀랠 노자다.”

“영기야, 정난희 왔다드만 어디 갔데?”

“담아, 난희 왔다믄서?”

“아야, 느그들은 느그 남자친구는 안 찾고, 뭣 땀시 난희부터 찾아 쌌냐?”

“연설하네, 오랜만인께 반가워서 그라제.”

“누구대?”

“아, 천영기하고 이담이 여자친구야.”

친구들 관심이 류연경과 한현진으로 옮겨가면서 계속될뻔한 정난희의 도서관방문소동은 소강되었다.

문승협은 정난희가 더 보고 싶어졌다. 정난희와 1시간여 시간이 무척 짧게 느껴졌다. 긴 시간 데이트를 기대했으나 물거품이 되어 허전하였다. 그래도 도서관데이트를 계획하고 함께해 줘서 고마웠다. 정난희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존재감과 자존감이 높아졌다. 1주일 뒤 정난희전화가 벌써 기다려졌다.

어느덧 서울세계야구권선수권대회가 순탄하게 진행되어 막바지에 이르렀다. 대한민국과 일본이 7승 1패 동률을 이뤄 결승전을 앞뒀다. 18:30분 잠실야구장은 한일전승리를 염원하는 함성과 열기로 가득 찼다.

한국이 2점 차로 끌려가다 8회 말에 1점을 냈다. 1점 차 뒤진 1사 3루 상황에서 어우홍감독이 사인을 냈다. 타석에든 김재박이 워낙 감각 좋은 선수여서 얼마든지 3루 주자를 불러들이리라 판단했다. 일본투수가 스트라이크존을 크게 벗어나게 던졌다. 포수가 일어나 받으려는 순간, 김재박선수가 배트를 가로누인 채 폴짝 몸을 날려 번트를 댔다. 강공사인을 스퀴즈작전으로 착각하였다. 참극을 불러올 사인미스의 절체절명위기가 최대기회로 돌변했다. 일본배터리가 스퀴즈작전에 대비하여 공을 뺏음에도, 김재박선수의 야구배트에 맞은 공이 3루 쪽 페어그라운드 위를 떼굴떼굴 굴러갔다. 실로 교묘한 속도와 얄궂은 방향이었다. 3루 주자 김정수선수를 홈에 불러들여 동점을 만들고, 타자 김재박선수까지 1루에서 세이프됐다. 운명적인 덕택에 찬스가 이어졌다. 한대화선수가 쓰리런홈런을 치는 기적을 이뤄냈다. 대한민국대표팀이 5:2로 역전시켜 서울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였다. 가위바위보도 이겨야 한다는 한일전을 이겼으니 나라가 들썩일 정도로 온 국민이 열광했다. 선동열투수가 역투 끝에 완투하여 승리투수와 최우수선수가 되었다. 대회올스타에 선동열선수와 김재박선수가 선정됐다. 재미있는 센스로 명명한 개구리번트가 출현함과 동시에, 한국야구대표팀승리가 8회에 결정된다는 전통의 서막을 알렸다.

지난 8월 미국영화배우 헨리폰다와 스웨덴출신 잉그리드버그먼이 사망한대 이어, 그레이스켈리 모나코왕비까지 사망하였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연이은 미국할리우드영화배우 사망소식은 수많은 세계 팬들을 슬픔으로 몰아넣었다.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1학년아이들이 장비까지 다 갖추고 야구를 했다. 문승협이 김부일과 교정에 앉아 지켜보았다. 김부일이 모나코왕비사망뉴스를 언급하자, 문승협은 다이아나비를 동경한 채정이가 생각났다.

“부일아, 채정이는 잘하고 있냐?”

“잉, 전학 간 학교적응하랴 연예활동하랴 정신없는디, 아직까정은 잘 지낸다드라.”

“다행이다, 걱정했는데.”

“니 난희한테 이른다, 정이 걱정했다고.”

“야이씨, 죽을래?”

“큭큭큭, 난희가 무섭긴 무서운 갑다잉?”

“무서워서 그러냐, 신경 쓰게 하기 싫어서 그러지.”

“고것이 고거제 뭐대?”

“그래 무섭다, 됐냐? 야, 너도 영이 무서워하잖아?”

“나는 무서운 것이 아니라 겁나부러, 영이가 허벌나게 이뻐갖고 나를 버릴까 비.”

“하하, 하긴 영이가 너랑 사귀는 게 불가사의긴 해.”

“승협아, 저그 민상이 간다. 아야, 이민상!”

“이민상, 잘 지내냐?”

“어? 잉, 잘 잘 지내. 승협아 미안하다, 우리가 그때 메락 없는 짓을 했다야.”

“그래, 미안하면 됐다.”

“강동우만 아직 쪼까 그러고, 딴 멤버들은 그날 일로 니한테 미안해하고 있어.”

“강동우가 사바사바했다믄서? 그 시끼 손 좀 보까?”

“부일아, 그럴 필요 없어. 강동우도 시간이 지나면, 뭔가 느끼는 게 있을 거야.”

“그래 쪼깨 시간 지나믄, 아마 강동우가 사과할 것이다, 걔도 심성은 착해.”

“민상아, 윙스 아그들에게 전해, 한 번만 더 승협이한테 그라믄 내가 가만 안 둔다고.”

화장실뒤편사건 이후, 윙스멤버들이 하나 둘 문승협을 찾아가 사과하였다. 다들 예전처럼 우호적으로 대했지만, 아직 강동우만 두고 보자는 식이었다. 그날 싸움도 마다하지 않은 문승협몸놀림은 순하게만 알았던 윙스멤버에게 놀람자체였고, 그 광경을 지켜봤던 노병돈과 이병규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힘없는 아이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문승협이야기가 오르내렸다.

김부일과 이민상이 교실에 들어가고, 문승협은 한문노트를 사러 매점으로 향하였다. 본관옆을 지나가다 몸을 숨긴 채 어딘가 유심히 바라보는 이병규를 발견했다. 이병규시선 끝에 ‘소원수리함’ 근처를 서성이는 노병돈이 있었다. 노병돈표정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초조하였다. 이병규에게 다가가 무슨 일인지 물었다. 이병규는 놀란 표정을 감추려 애쓸 뿐 답하지 않았다. 문승협이 직접 확인하러 노병돈에게 가는 사이, 이병규가 쏜살같이 교실 쪽으로 뛰었다. 노병돈도 눈치채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문승협이 따라잡아 붙들었다. 노병돈은 강하게 뿌리치면서도 도망가지는 않았다.

“노병돈, 너 무슨 일 있지?”

“…….”

“내가 너희들 몇 번 봤어, 너랑 이병규랑 소원수리함 근처에서 서성이는 거, ”

“니가 뭔 상관이어, 고따구 허접한 관심은 필요 없은께, 그냥 넣어둬라잉.”

“그래 알았어, 그럴게.”

“…….”

“그런데 말이야, 담임선생님한테는 내가 본걸 말해야겠다, 그건 괜찮지?”

“뭐시어?”

“그게 싫으면 나한테 말하던가.”

“…….”

“알았어, 그럼 시간을 좀 줄게, 이따 저녁식사 후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니가 뭣 인디?”

“나? 난 아무것도 아닌디? 그냥, 친구가 무슨 일 있나 궁금한 것뿐인디?”

“시방 장난하냐?”

“네가 장난이라 생각하면 어쩔 수 없고, 나한테 말할지 말지 잘 생각해 봐.”

문승협은 당장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었으나 부작용을 우려해 다그치지 않았다.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 어느 정도 먹혔다. 흔들리는 노병돈의 눈동자를 보고 성공을 확신하며 교실로 갔다.

이병규가 교실에 들어서는 문승협을 곁눈질로 봤다. 뒤이어오는 노병돈의 동태를 살폈다. 빤히 바라보는 문승협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오후수업시작종이 울렸다. 문승협은 자꾸 신경 쓰여 노병돈을 관찰하였다. 장기원이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장난치는 것처럼 노병돈을 괴롭혔다. 주변에서는 문제의식 없이 일상처럼 여겼다. 노병돈은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문승협을 의식했다. 이병규는 노병돈과 문승협의 시선이 마주치는걸 여러 번 목격하였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노병돈이 문승협을 한번 쳐다보고는 교실밖으로 나갔다. 문승협은 재빨리 따라나섰다. 노병돈이 안내하듯 3층 창고로 들어갔다. 구석에 있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천장문을 열었다. 문을 나서니 지붕이 나왔다. 3학년교실 부속건물은 맨 위층이 옥상인 반면, 1∙2학년교실 본관은 재래식 건물이라 지붕으로 이뤄졌다. 지붕경사가 완만하여 앉거나 눕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노병돈이 자주 와본 마냥 익숙하게 자리 잡고 문승협에게 옆자리를 권했다.

“나는 학교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야, 너는 여기를 어떻게 알았어?”

“1학년 때 창고청소당번하다가, 아까 그 문은 지붕수리할라고 내놓은 통로여.”

“그럼 1학년 때부터 여기 올라온 거야?”

“잉, 심란할 때.”

“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니, 장기원이랑 친하제?”

“응, 친하다면 친하고 아니라면 아니고.”

“친하믄 친한 것이제, 그런 미지근한 말이 어딨대?”

“친하다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어서, 왜, 중요해?”

“나한텐 중하제, 장기원이랑 같은 편이믄 할 말 없어.”

노병돈은 친하지 않다면 장기원에게 당한 일들을 기억에서 모두 끄집어내려 하였다. 자기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고 자기편에 서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정쩡한 문승협대답에 주변이야기로 대충 둘러대려고 생각을 바꿨다. 자기가 한 말을 확인하리라는 걱정과 이후에 뒤따를 장기원의 보복이 두려웠다.

“그럼 안 친해.”

“장난하지 말고야, 진짜 뭐여?”

“병돈아, 내가 여기까지 따라 올라왔는데, 나랑 장기원이랑 친한 게 중요해?”

“잉, 나한테는 생사가 걸린 일이어.”

“나는 누구 편을 들어주려고 온 게 아니야,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온 거지.”

“그라믄 비밀로 할 거여?”

“그래,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말이 있긴 한데, 다른 건 몰라도 이 비밀은 내가 꼭 지킬게.”

문승협은 노병돈이 꺼내려는 이야기가 장기원과 관련 있다는 걸 눈치챘다. 무턱대고 호불호관계를 단정 지어 버리면 속마음을 터놓지 않거나 진실을 과장할 거라고 추측했다. 사실 장기원과 자주 어울리면서도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다.

노병돈은 문승협을 반신반의하였지만, 둘 관계가 분명치 않다는 말이 오히려 솔직하게 들렸다. 평소 한쪽 편에 치우치지 않는 문승협의 행동거지로 보아 조금 안심되었다. 수다스럽지 않고 주로 경청하면서 할 말만 하는 태도와 헤실이나 순둥이 같은 별명이 문승협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가 장기원과 친하다고 인식했으나 동상이몽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감춰진 내막은 전혀 달랐다. 노병돈은 무엇보다 중립적인 문승협언행에 희망을 얻어 입을 열었다.

“나는 니랑 장기원이랑 친한 줄 알았다잉.”

“나도 너희들이 자주 장난치길래 엄청 친한 줄 알았어.”

“니한테 친구는 뭔디?”

“친구라고 해서 별거 있을까? 그냥 이 시대 이 장소에 같이 있으면 다 친구 아닐까?”

“아니어, 친구라는 명목으로 같은 시간과 장소에 있어서 웬수인 경우도 있어야.”


노병돈은 말을 더듬는 게 흉이 되어 중학교 때 집단따돌림당하였다. 치열한 노력 끝에 말투를 고쳤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과거 악몽에서 벗어났다고 여겼다. 장기원과는 1학년 때 같은 반 짝꿍으로 만났다. 장기원이 처음엔 친절히 대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노병돈의 중학교시절 흑역사를 알았다. 약점을 놀려먹는 재미에 몰두하였다. 노병돈은 평상시엔 별문제 없었으나, 화낼 때면 말을 더듬는 습성이 튀어나왔다. 장기원은 놀려먹으려고 의도적으로 화를 돋웠다. 점점 장난의 정도가 심해졌다. 노병돈이 대항하지 않고 속절없이 당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장난이 지나치긴 해도 장기원혼자만 알고 반친구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지옥 같았던 중학교시절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 장기원장난만 참아내면 된다며 감내했다. 장난에서 멈춰줘 고맙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장기원장난이 더욱 심화되었다. MBC에서 방송 중인 만화영화 ‘톰과 제리’를 모방하고, KBS ‘딱따구리’를 현실화시켰다. 한 번은 노병돈이 의자에 앉으려는 찰나 뾰쪽한 연필을 대서 엉덩이에 꽂힌 적이 있었다. 심하게 박혀 거의 한 달 내내 고생했다. 장난이 괴롭힘으로 진화하였다.

어른들은 모든 어린이들이 좋아하리라 믿고 수많은 만화영화를 탄생시켰으나, 세심하지 못한 부주의로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를 응징하는 통쾌함과 권선징악추구는 큰 틀에서 동의하지만, 아이들 시각에서 세부적으로 살보면 완전히 달랐다. 딱따구리의 주인공 ‘우디우드페커’ 경우는 장난꾸러기라기보다 정신이상 사이코에 가까웠다. 보복을 코믹하게 순화하면서도 상당히 직설적이고 잔인한 동심파괴였다. 딱따구리가 복수 후에 ‘으헤헤헤, 으헤헤헤, 으헤헤헤 헤헤~’웃음은 통쾌하기보단 조롱이고 약 올리는듯하였다. 아무 생각 없이 모방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악당은 막대해도 괜찮다는 시그널로 착각을 줬다. 어찌 보면 월트디즈니가 악동‘미키마우스’를 미화시킨 만행에 피해자는 노병돈이었다.

노병돈은 2학년에 올라와서도 장기원과 같은 반 짝꿍이 됐다. 1학년 때부터 받는 스트레스로 폭식하여 살이 심하게 쪘다. 장기원이 돼지라고 놀려먹기 딱 좋은 이를 내버려 둘 리 만무했다. 괴롭힘마저 시큰둥하였는지 급기야 빵셔틀을 시키고 때로는 돈도 뺏었다. 최근에는 노병돈이 이혼한 편모가정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노병돈은 다른 건 그래도 견딜 수 있었으나, 엄마까지 대상으로 삼는 것은 도저히 참기 어려웠다. 결국 소원수리함을 눈여겨보았다. 학생들 시선에 잘 띄지 않는 후미지고 옴팡진 곳에 설치된 소원수리함주변을 며칠째 어슬렁거리다 문승협에게 포착된 것이었다.

문승협은 그동안의 고충을 묵묵히 들어줬다. 노병돈이 목멘 소리로 ‘이혼이 흠이 안 되고, 많이 먹는 게 자랑이믄 좋겄다’고 했다. 중얼거리듯 ‘여그서 뛰어내려 죽고 싶다’며 충격적인 말을 뱉어냈다. 문승협은 흘려들어선 안된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노병돈마음을 이해한다는 신호를 주고 싶었다.

“병돈아,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너 없는 세상이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고, 너희 엄마는 또 어떻겠니?”

“…….”

“그래도 네가 정 죽고 싶다면, 그래, 뛰어내리자. 내가 같이 뛰어내려줄게.”

“…….”

“하지만 말이야, 어차피 뛰어내릴 건데, 엄마랑 이별을 나누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만화도 못 본 거 다 보고. 더 이상 할 게 없어 지루할 때, 그때 와서 뛰어내리자.”

“…….”

“너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하려고, 너희 엄마가 한순간 고통을 참고 힘을 쏟았듯이, 너도 한 번만 그 두려움과 괴로움을 이겨내려고 용기 내봐. 엄마가 널 위해 용기 낸 걸 의미 없게 하지 말자, 응?”

“흑흑흑.”

“여기 3층 지붕이야, 여기선 뛰어내려도 안 죽어, 아마 최악의 경우 반신불수정도 될걸? 너희 엄마는 또 얼마나 슬퍼하겠어, 끔찍하지 않아?”

노병돈이 무릎사이에 고개를 박고 흐느꼈다. 서럽고 분한 마음에 등을 들썩였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주먹 쥔 손을 깨물고 울음을 멈추려 애썼다.

문승협은 아픔에 공감되어 눈물을 글썽였다. 안쓰러워서 보듬어주려다 참았다. 동정한다고 생각할까 봐 스스로 추스르도록 시간을 주었다. 왜 이런 사실을 자신뿐 아니라 반친구들이 몰랐는지 의아하였다. 1학년 때는 서로 다른 반이었으니 그렇다지만, 2학년이 된 지금은 같은 반이었다. 조심스레 어찌 된 일인지 물었다.

장기원은 노병돈을 심하게 괴롭히다가도, 주위눈치가 이상하다 싶으면 장난으로 치부하고 어르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장난강도를 조절해 눈속임하였다. 때와 장소를 가려 주변에서 알아채지 못하게 했다.

문승협은 철저히 계산된 장기원의 교묘한 행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노병돈에게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이 지경까지 안 됐을 거라는 안타까움에 마음이 무거웠다. 학교생활에서 장기원과 노병돈의 관계처럼 유사한 친구들이 많으리라 짐작됐다. 친구 때문에 행복하고 괴로워하는 친구들을 상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야간자습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정을 울렸다.

“병돈아, 너 많이 힘들었겠다. 나도 같이 고민해 볼게, 오늘은 이만 내려가자?”

“…….”

“토요일수업 끝나고 나랑 다시 만나. 혹시 약속 있어?”

“읎어.”

“그때까지 서로 방법을 찾아보자, 너무 상심하지 마.”

“장기원이한테는 비밀이다잉?”

“야, 두말하면 잔소리다. 걱정 마, 오늘 이야기는 무덤까지 갖고 갈 테니까.”

“내가 그 무덤을 파제끼는 경우는 없었으믄 한다잉?”

“하하, 걱정 말래도, 내가 입은 또 엄청 무거워.”

노병돈은 친구 앞에서 눈물을 흘렸기에 시선을 피했다. 옷소매로 눈두덩을 닦아내며 쑥스러움을 숨겼다. 속마음을 떨어놔 한결 편안해지면서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문승협은 별일 없었다는 듯 최대한 자연스레 행동하였다. 혹시 몰라서 노병돈을 앞장 세워 지붕을 내려갔다. 야자시간이 시작된 조용한 교실문을 살며시 열었다.

“음악실 청소는 잘했냐?”

“네 선생님, 지금 마치고 오는 길입니다.”

“수고했다, 자리에 가서 공부해.”

“네. 병돈아 수고했다, 들어가자.”

노병돈이 영문을 몰라 흠칫 놀랐다. 문승협은 태연히 노병돈어깨를 두드리고는 자리로 갔다. 눈치에 둔감한 노병돈은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담임선생이 야간자습시작종이 울렸을 때 자리를 비운 문승협과 노병돈을 찾았었다. 반장 강원종이 음악실에 청소하러 갔다고 하였다. 문승협이 강원종에게 미리 말해뒀기 때문이었다. 저녁식사 후 청소시간에 노병돈과 음악실교제정리하러 간다며 조금 늦을 수도 있다고 했다. 또한 아이들이 찾으면 음악실에 갔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라고 당부하였다. 만에 하나 노병돈을 찾아 나설지 모를 장기원을 막으려는 심산이자, 행여라도 의심받지 않으려는 나름의 궁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문승협이 자리로 가는 동안 의혹에 찬 장기원시선이 따라왔다. 자리에 앉으면서 바라보니, 장기원이 위압적인 눈빛으로 노병돈을 억압했다. 이병규가 문승협과 노병돈을 의미심장하게 번갈아 보았다.

문승협은 책을 펴다가 교실풍경을 둘러봤다. 고개 숙이고 공부하는 흔한 친구들 모습이었다. 불현듯 친구라는 미명아래 숨어있는 계급과 권력이 눈에 보였다. 평등을 배우면서도 불평등을 즐기는 이율배반을 느꼈다.

2학년 4반 학생들이 3단계로 나뉘어있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었다. 우등생과 학급임원의 권력자. 중상위성적에 분단장의 집행자. 열등생과 청소당번의 수행자. 학교는 이런 신분차별을 학급통솔이라는 명목 하에 합법적으로 장려하였다. 학생들은 불평등이라 생각하기는커녕 통념이라는 말 앞에 수긍했다. 학교생활이 전부이기에 또래 간 명령과 복종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스스로가 역할이라고 합리화하였다. 불만스러운 학생조차도 자신이 못나서 어쩔 수 없다는 자학으로 치부하며 넘겼다. 모두 이러한 잘못된 악습을 일반화된 상식으로 알았다. 학교가 강요해 만든 합법과 상식이 되어버린 표면적인 계급과 권력은 그나마 순기능이라도 있었으나, 학생들 사이에 보이지 않게 만들어진 계층은 친구라는 말이 무색했다. 학교생활에서 실질적인 부조리가 발생하는 원인이었다. 힘없는 약자들은 신분상승과 하급계층탈피를 위해 몸부림쳤다.

세계사수업시간에 인도신분제를 배우면서 학생들 스스로 카스트제도와 견주어 계층을 나누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다. 상위계층학생에게는 떠들거나 반의 공기를 지배하는 다양한 권리가 주어졌다. 하위계층학생은 발언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학생들끼리 일반적으로 분류한 계층이 존재하였다. 소위‘브라만’이라는 1군은 공부를 잘해 학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며, 활동적이고 사교성 있는 인기 많은 학생들이었다. 2군‘크샤트리아’는 1군과 3군 사이에 자리 잡고, 선생과 친하거나 1∙3∙4군과 모두 친했다. 3군‘바이샤’는 1군보단 덜하지만, 학급균형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분위기파악이 빨랐다. 4군‘수드라 또는 불가촉천민 찬달라’는 소극적 인간관계와 특징 없는 것이 특징이며 주로 혼자 지냈다. 친구들을 구분하는 자체가 해서는 안될 일임에도 성적과 성향, 친구관계로 분류하였다.

실제 학교생활에서 진짜문제는 계층분류에 빗댄 싸움서열이었다. 힘으로 가해하는 1진이 있고, 힘이 없어 피해당하는 학생은 4진에 속했다. 1진은 폭력과 차별로 지배하며 4진을 노예 부리듯 약탈하였다. 학생들은 1진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 노심초사했다. 표적이 될까 두려워 1진의 강탈과 폭행을 목격하고도 외면하기 일쑤였다. 묵인을 넘어 방관하였다. 더욱이 1진에게 찍소리 못하면서 덩달아 핍박하는 비열한 학생이 있었다. 노병돈을 괴롭힌 장기원이 비슷했다. 장기원은 야비한 짓임을 알기에 더욱 주위 친구들 모르게 하였다.

또한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을 극빈자라거나 기생충이라는 놀림으로 멍에를 씌웠다. 개인능력에 의한 계급차이면 이해라도 하겠으나, 당하는 학생은 학교폭력이상으로 큰 상처를 받았다. 이외에도 내년 교복자율화를 앞두고 패션센스와 외모, 연애경험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일부만 국한된 데다 아직 교복을 착용하여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문승협은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바로 곁에 있는 친구가 가해자며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위를 속인 디테일한 장기원행동에 놀랍기 그지없었다. 다들 당하는 사람이 자기만 아니면 된다는 심리에 복종하였다. 누구도 불편부당에 발 벗고 나설 용기가 없었다. 약자들이 도움을 청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언젠가 수업시간에 김생출선생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선생은 원천권력을 직접 행사하기보단 분배와 감시를, 반장부반장은 권력집행자로서 절제하라. 권력은 학생들의, 학생들에 의한, 학생들을 위해야 한다. 권력자 잘못은 국가에 불행이고, 권력집행자 잘못은 국민개개인에게 피해다. 반장부반장이 권력을 맞보고 권력에 취하면 그 반은 곧 파국이다. 정작 우리 주변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사람은 권력에 기생하는 기회주의자다. 권력에 맹목적 충성은 무시무시한 결과로 나타난다. 너희들이 자기 몫을 빼앗기고도 분노할 줄 모르고, 불의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면, 나는 너희들의 비겁함을 비난할 것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마라. 제군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Boys be ambitious!’

국가지도자를 선생으로 가정하고, 권력집행자를 반장부반장으로 묘사하며, 국민을 학생으로 비유한 권력함수관계가 이제야 조금 이해되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헌법 제1조 2항과 미국링컨대통령연설문을 인용었다.

문승협은 다시 친구들 얼굴을 살펴봤다. 해맑은 모습으로 행복한 일상을 보내도 시원찮을 나이에, 계급을 나누고 차별하는 친구들과 자신이 애처로웠다. 어떻게든 노병돈을 돕고 싶었다. 무엇보다 당사자의 자각과 한계를 넘으려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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