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75)
독재저항을 누그러뜨리려는 전두환정권의 학원자율화조치에 따라 ‘해직교수협의회’가 발족됐다. 문교부가 1980년 5월 17일 이후의 학생운동 관련 제적생 1,363명에 대하여 복교를 허용했다. 법무부는 시위학생 131명과 형확정된 시국사범 314명, 일반사범 1,451명을 특별사면복권하였다. 해직교수와 제적학생들의 복귀로 유화국면이 형성되었다.
지하철 2호선 교대역~서울대입구역구간을 개통했다. 럭키금성스포츠가 프로축구팀 ‘럭키금성 황소’를 창단하였다. 한국전기통신공사는 전국 22개 외딴섬 무선전화를 12월 말까지 자동전화로 교체하겠다고 했다.
문승협은 첫사랑이 떠나갈 위기에 처해 심난하였다. 우두커니 거실에 앉아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꽤 오랜 시간 눈멍을 때렸다. 언젠가 책에서 봤던 ‘릴케’의 명언이 떠올랐다.
‘사람은 고독하다. 사람은 착하지 못하고, 굳세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여기저기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인다. 비참과 부조리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이 사람의 운명일지라도, 우리는 고독을 이기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 결의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릴케는 프라하출신 오스트리아문학가며, 독일어권에서 으뜸으로 평가받는 시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탐구한다’는 ‘말테의 수기’로 유명했다. 한때 프랑스조각가 ‘로댕’의 비서로도 지냈다. 백석·김춘수·윤동주가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졌다. 한국서정시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문승협은 글귀를 대뇌며 스스로 위로했다. 정난희와 이별을 눈물로 보낼 순 없었다. 아르바이트출근시간이 다가와 무기력한 감정을 달래어 일어났다.
레스토랑이 연말을 맞이한 손님들로 활기찼지만, 문승협은 몹시 침울하였다. 문득문득 정난희생각에 슬픔이 가득 찼다. 늘 웃는 얼굴임에도 서빙하면서 웃음기가 없었다. 누가 봐도 평소와 달랐다. 주시해와 원혜연이 한적한 틈에 무슨 일인지 물었다. 문승협은 씁쓸히 미소 지으며 별일 아니라고 했다.
저녁시간이 지나고 술손님이 들어왔다. 송년회 2차라며 시끌시끌하였다. 연인끼리 다정한 시간을 보내던 아베크족손님들이 불평하자, 원혜연이 술손님테이블에 찾아가 목소리를 낮춰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최소한의 레스토랑에티켓이기도 하고, 대부분손님들이 아늑한 분위기를 원해서 ‘폭풍의 언덕’을 찾는 터라 응당 양해해 줄줄 알았다. 뜻밖에도 거나하게 취해 떠들던 손님이 목청을 높였다. 손님은 왕인데 이래라저래라 한다며 발끈하였다. 주시해가 뛰어가 진정시키려 애썼으나 소용없었다. 서양식주임이 나서면서 수습된듯하다, 옆테이블손님이 불만을 표출하며 욕을 섞는 바람에 언쟁으로 번졌다. 급기야 서로 멱살을 잡았다. 룸에 있던 손님들까지 나와서 지켜봤다.
문승협이 술렁이는 손님들을 안심시키며 일촉즉발현장으로 갔다. 비슷한 또래들로 보여서 무심코 개입했다. 가뜩이나 정난희와 이별로 기분도 좋지 않은데, 여차하면 한판 붙을까 하는 심정이었다. 치미는 화를 꾹꾹 눌러가며 양쪽을 겨우 떼내고 한마디 하였다.
“손님, 즐거운 송년회를 망쳐서 미안합니다, 진정하시고 언성을 조금 낮춰주세요.”
“어허, 내 돈 내고 내가 마시는디, 내가 떠들든 말든 니들이 뭔 상관이어?”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른 손님들에게 피해 가지 않도록 양해 바랍니다.”
“못하겄다믄 니가 으짤 것인디?”
“여기 레스토랑은 떠들썩한 선술집 같은 곳이 아니잖아요,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못하는 분이라면, 더 이상 손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뭐라고? 아야, 저 째깐한 새끼가 뭐라냐?”
“못 들으셨으면 다시 말씀들일까요?”
“음마, 염장을 지르그만잉, 이런 개 상노무새끼가 어디 손님한테 고따구로 지껄여?”
“훌륭한 서비스를 받으시려면, 종업원에게도 걸맞은 매너를 보이셔야죠, 말을 함부로 하면 됩니까? 손님은 왕이라 하셨는데, 그러면 손님께선 폭군인가요?”
“오매오매, 어이가 없그만잉, 니가 우리를 손님으로 안 받아들이믄 으짤 것인디?”
“그럼 송구스럽지만 여기서 퇴장해 주세요.”
“못 나가겄다, 으짤래? 아야, 계산하지 마라잉?”
“제가 대신 계산할 테니 이제 그만 나가주세요, 손님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손님들께 피해 주고 싶지 않습니다, 결례를 무릅쓰고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뭐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다 있다냐? 못 나가겄다 왜, 배째라, 배째란께.”
“아야 임마, 그만해야. 죄송허요, 우리가 잘못했소, 시방 계산하고 가께라.”
일행 중 한 명이 끌어당겨 귓속말을 하자, 흥분한 손님이 문승협을 바라보고 흠칫했다. 금세 태세전환하며 누가 먼 저랄 것 없이 자리를 떴다. 서양식주임이 따라나가려는 문승협을 붙잡았다. 배웅하러 갔던 원혜연이 들어오면서 이정국과 김부일이 누구냐고 물었다.
“어? 내 친구들인데?”
“뭐 하는 친군디?”
“지난주 봤잖아요, 여기 식사하러 왔던 덩치 큰 친구.”
“맞어, 저번에 밥 묵고 가믄서 부둥켜안고 그랬잖애.”
“아, 그 국가대표유도선수?”
“네, 걔들이 왜요?”
“방금 나간 썩을 놈들이 느그 친구들을 아는갑드라.”
“허허허, 그란께 싸가지 없이 까분 놈들이 허벌나게 쫄아갖고 튀었그만?”
“니랑 그 아그들 하고 친한 친구라믄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듯 가드라야.”
“아따, 여그서 이정국이랑 김부일이 덕을 다 본다잉?”
“시해형은 정국이하고 부일이를 아세요?”
“알다마다, 목포서 우리 또래들이 모르믄 간첩이제.”
“왐마, 승협이가 어마무시한 친구들을 빽으로 뒀네잉.”
“그나저나, 니는 뭔 돈으로 계산한다고 큰소리쳤냐?”
“그 손님들 돈 안 내고 갔어요?”
“아니, 계산했어.”
“휴 다행이다, 속으로 조마조마했는데.”
“니는 부잣집이라서 돈이 많은갑다잉?”
“제가 돈이 어디 있어요, 아르바이트비에서 까야죠.”
“음마, 니가 엿장수여? 누구 맘대로 깐다냐, 까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그만.”
“에이 왜 그러세요, 주임님이 도와줄거면서.”
“앞으로 하는 거 봐서, 맨입으로는 안되제.”
“근디, 니 아까 그 손님들하고 시비할 때 멋지드라잉?”
“하하, 제가 좀 멋있기는 하죠.”
“염병, 또 왕자병 도졌네.”
“왕자병 아니어, 오늘부터 진짜 왕자 해부러.”
원혜연방식의 고맙다는 표현이었다. 순하게만 봤는데 남자다운 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동료들도 문승협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여러모로 못마땅히 여겼던 동료들 태도가 우호적으로 변하였다.
레스토랑이 안정을 되찾고, 화장실을 오가는 손님들이 문승협에게 잘했다며 릴레이칭찬하였다. 계산하던 몇몇 손님들은 팁을 건넸다. 부족한 처사였다며 한사코 거절해도 강제하다시피 손에 쥐어줬다. 문승협은 어쩔 수 없이 받아 프런트에 공동자금으로 맡겼다. 혼자 챙길 줄 알았던 동료들이 다시 보았다. 그동안 재벌집손자란 선입견으로 문승협에게 삐딱이 대했지만, 자신들과 별 차이 없단 동질감에 경계의 벽을 허물었다.
문승협은 어느덧 아르바이트 10일째를 맞이하였다. 한층 가까워진 동료들을 본받으려 노력했다. 레스토랑 내 모두가 성실, 열심, 진심이었다. 남일도 내일처럼 챙길 만큼 친해져 감사할 따름이었다.
세상사람들이 한 해를 차근차근 마무리하였다. 각 방송사가 3일에 걸쳐 연말시상식을 거행했다. 집집마다 TV앞에 모여 어떤 연예인이 출연하고 누가 상을 타는지 주목하듯, 한적한 레스토랑도 마찬가지였다.
MBC연기대상 최우수상은 일일연속극‘갓난이의 정혜선’ 배우에게 수여됐다. ‘황신혜, 원미경, 이미숙’이 시선을 끌었다. 드라마‘아버지와 아들’로 데뷔한 MBC16기 공채탤런트 황신혜는 컴퓨터미인이라 불렸다. 문승협은 KBS드라마‘고교생 일기’를 종종 봤었다.
MBC10대가수가요제에서 ‘송골매, 전영록, 조용필, 이용, 최백호, 김연자, 방미, 윤시내, 이은하, 혜은이’가 10대가수로 뽑혔다. 조용필이 ‘나는 너 좋아’ 곡으로 최고인기가수상과 최고인기가요상을 석권하였다. 작년엔 ‘잊혀진 계절의 이용’이 수상했었다.
KBS방송음악대상은 ‘황인용과 서동숙’을 MC로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렸다. 남자가수상 조용필, 여자가수상 ‘공부합시다의 윤시내’, 남자신인상 ‘독도는 우리 땅의 정광태’. ‘정수라’는 ‘아! 대한민국’으로 여자신인상을 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밤늦은 시각에 정치경제사회문화별 총결산프로가 방송되었다. 아나운서가 각 분야 페널들과 대담형식으로 진행하였다. 문승협은 가요부문에 관심이 갔다. 강변가요제대상‘이름 없는 새’와 ‘그대는 나의 인생’이 가슴에 와닿았다. ‘손현희와 한울타리 최진희’ 음성이 애절하여 마치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듯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으로 데뷔한 ‘이문세’도 인상 깊었다. ‘송골매의 처음 본 순간, 한줄기 빛, 빗물, 아가에게’를 자주 흥얼거렸었다. 친구들이 좋아한 곡을 돌이켜보았다. 천영기가 ‘민해경과 김현준의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담은 ‘산울림의 어머니와 고등어’. 백미정이 ‘김수희의 멍에’. 한현진은 ‘전영록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유은정이 ‘송창식의 우리는, 푸르른 날’이었다.
문화분야패널이 ‘패티김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와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을 잊을 수 없는 노래로 손꼽았다. 전 국민의 심금을 울린 KBS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타이틀곡이 됐다고 하였다.
팝송을 선호한 친구들은 ‘마이클잭슨, 신디로퍼, 폴리스, 유리드믹스’ 노래를 즐겼다.
너나없이 앞다퉈 영화‘안성기와 장미희주연 적도의 꽃, 사관과 신사, 람보, 숀코너리의 007네버세이네버어게인, 홍금보의 홍콩액션 오복성’을 관람했다.
어린아이들은 ‘KBS의 개구장이 스머프와 요술공주 밍키’를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다.
‘정비석의 소설손자병법’과 ‘미야자키하야오동화 슈나의 여행’이 베스트셀러였다. 책을 잘 안 읽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다.
남녀노소소통에 사용한 유행어가 재밌었다. 이산가족상봉시 탄성‘맞네, 맞아!’. MBC쇼2000 이덕화멘트‘부탁~해요’. MBC드라마 야망의 25시 박규채배우의 일성‘나 돈 없슈’. 코미디언 김병조‘왜 떫으유?’. 아기공룡 둘리‘호~이’. 공포의 외인구단대사‘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등이었다.
경제분야는 신상품출시소개를 먼저 하였다. 식음료는 ‘농심의 너구리우동얼큰한맛·안성탕면·크레오파트라포테토칲·자갈치·양파링, 롯데제과의 빼빼로·죠스바·꼬깔콘, 롯데삼강 돼지바, 롯데리아 치킨버거, 롯데칠성음료 참두유·델몬트의 스카시오렌지50%·오렌지주스100%무가당, 동서식품 맥스웰스틱형커피믹스, 매일유업의 매일맘마·밀루파매일, 빙그레 요플레, 한국야쿠르트유업의 팔도라면쇠고기·참깨’.
자동차와 가전제품도 있었다. ‘현대자동차 스텔라, 대우자동차의 로얄프린스·로얄XQ·맵시나, 거화 코란도, 기아산업아시아자동차의 봉고나인·세레스·AM805콤비, 금성사의 패미콤30·전천후냉장고3도어·백조세탁기레이디’. 자동차는 아버지들에게 로망이 되고, 가전제품은 맛들이기 시작한 엄마들에게 인기였다.
삼성반도체통신 64KB D램 국내최초개발은 놀랄만했다. 액면가 5,000원짜리 주식이 연일 상한가를 찍으며, 발표한 지 한 달 만에 8,700원으로 치솟았다. 국민들이 주식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면서, 과연 주가가 얼마나 뛸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전문가들이 삼성그룹의 패스트팔로우전략을 주시하며 장단기투자를 권유하였으나, 대다수국민들은 미래가치를 상상도 못 했다.
정치분부문은 전문가멘트로 이어졌다. ‘올해 1983년 대한민국은 유난히 국난 수준에 가까운 사건사고가 많아 온 국민이 시름한 해였습니다’.
연초 북한이 한국의 팀스피릿83훈련에 대응하면서 준전시상태였다. 북한공군파일럿 이웅평상위가 MiG19기를 몰고 귀순하였으며, 납치된 중국민항여객기가 강원도춘천공군비행장에 불시착해 공중경계경보가 발동됐다. 또한 중공군파일럿 쑨첸롄이 MiG21기를 몰고 한국공군기지에 비상착륙하는 과정에서, 휴전 이후 최초 중공기의 한국영해침범으로 수도권에 공습경보가 울리기도 했다. 9월 첫날에는 사할린부근상공을 날던 대한민국민항기가 소련전투기에 피격당하였다. 뉴욕발 서울행 KAL007편 B747기 탑승자 269명 전원사망한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면서, 역사 이래 두 번째 데프콘3가 발령되었다. 미국대통령 로널드레이건이 소련을 악의제국이라 지칭하기에 이르렀다. 미소관계가 냉전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소련군핵미사일관제센터당직장교가 핵전쟁을 막은 일촉즉발사건도 발생했다. 소련을 향해 날아오는 미국ICBM대륙간탄도탄미사일을 컴퓨터오류로 판단하여 위기를 넘겼다. 최악의 미소갈등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제정세였다. 버마랭군시내 아웅산묘소폭탄테러도 터졌다. 전두환대통령의 17박 18일간 서남아시아와 대양주 6개국 해외순방길이었다. 경제부총리 등 수행원 17명이 숨지고 14명이 부상당하여 온 국민이 패닉에 빠졌다. 부산다대포무장간첩침투사건까지 북한만행으로 밝혀지면서 반공멸공열풍이 무서운 기세로 전국을 뒤덮었다.
아나운서엔딩멘트가 인상적이었다. ‘대한민국국민 모두에게 다사다난하였던 1983년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됐으며, 대한민국국민에게 부푼 희망으로 새로운 1984년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문승협은 낮엔 친구들을 따라 당구장과 볼링장을 다니고, 밤엔 아르바이트로 한주를 보냈다. 레스토랑에서 올해 마지막 날이니 가족과 보내라며 일찍 퇴청하라고 했다. 2시간 빠른 퇴근에 시간이 남아 어정쩡하였다. 오늘 저녁 10시에 친구들과 송년회를 약속했었다. 일단 레스토랑을 나와 걸었다. 때마침 반대편에서 유은정이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어딜 가시까?”
“그냥 정처 없이 방황하는 중이야”
“뭐여, 아르바이트 끝났냐?”
“응, 퇴근하래.”
“우리 약속까정 2시간이나 남았는디?”
“너도 얘들이랑 같이 만나기로 했어?”
“잉, 현진이가 백미정도 온다고 알려주드라.”
“아 그랬구나, 난 남자들끼린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온께 껄쩍지근하단 거여?”
“아 아니야, 내가 싫고 좋을 게 어디 있어.”
“음마, 으째 니 표정이 아리까리한디?”
“에헤이, 아니라니까 그러신다. 넌 어디 가는 중이야?”
“미장원에, 머리가 길어서 쪼깐 짜를라고.”
“누구에게 예뻐 보이려고?”
“니, 니한테. 니 갈데없으믄 나랑 같이 가까?”
“하하, 남자가 미장원에 가긴 좀 그렇다야.”
“연설하네, 요즘은 남자들도 다 미장원서 짜르드라.”
“진짜? 나는 금시초문인데?”
“내 말이 거짓갈인지 아닌지, 가보믄 될 거 아니어.”
문승협은 딱히 갈 곳도 없어 호기심에 따라갔다. 유은정말대로 남자 두 명이 있었다. 한 남자가 머리에 이상한 비닐모자를 쓰고 미용잡지를 봤다. 다른 남자는 처음 본 광경이라 꽤나 이상하였다. 동그란 통을 어깨에 두른 채 앉아있고, 미용사가 남자머리카락을 플라스틱뼈다귀에 감아 고무줄로 고정했다.
유은정이 신기하게 쳐다보는 문승협에게 파마를 권유하였다. 미용사가 말꼬리를 물어 멋있겠다며 동조했다. 때를 놓칠세라 다른 미용사가 남자파마사진첩을 들이밀었다. 문승협은 마지못해 펼쳐보았다. 유은정이 요즘 유행한 남자파마머리를 물었다. 미용사가 아예 문승협옆에 앉아 이것저것 권유하였다. 최근 졸업을 앞둔 고3남학생들이 파마를 많이 한다고 했다.
“승협아, 니도 이참에 해부러?”
“남자가 무슨, 이상할 거 같아?”
“저그 남자손님 두 분도 파마하는 거여라우.”
“이쁘장하게 생겨갖고, 하믄 더 멋질 거 같은디?”
“내가 시켜주께, 한번 해보잔께?”
“이것이 핑클파마고요, 이짝 것이 펑클파마여라우, 처음인께 핑클파마가 좋겄소.”
“아짐씨들멩키로 곱슬거리지 않고, 벨로 표시도 안나요. 손으로 쓱 넘기믄 바람머리만치로 자연스럽고, 관리하기도 무자게 편해라우.”
“얼마나 걸리요?”
“한 시간이라, 오래 말고 있어도 쪼까 거시기한께.”
“그라믄 해주쑈, 시간도 충분하네.”
“정말 괜찮을까?”
“내가 책임지께, 이상하믄 다시 풀어불믄 돼야.”
문승협은 미용사호객과 유은정권유에 넘어갔다. 무엇보다 정난희와 결별로 심경이 복잡한 데다, 자신의 모습이 권태로워 변화를 주고 싶었다.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의자로 끌려갔고 흰 천이 둘러졌다.
유은정은 옆자리에 앉아 머리카락을 커트하였다. 중간중간 문승협머리가 말려가는 것을 보며 웃었다. 얼마 후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됐다. 문승협은 아까 남자들처럼 수건을 두르고 커다란 비닐모자를 썼다.
부끄러운 시간이 지난 뒤, 고무줄을 푼 머리가 곱슬곱슬하여 당황했다.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하니 한결 자연스러웠다. 파마약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눈이 따가웠지만, 왜 여자들이 기분에 따라 파마를 하거나 머리스타일을 바꾸는지 알 것 같았다.
유은정이 이리저리 살펴보며 배시시 웃었다. 매주일요일아침 8시에 방영된 ‘들장미소녀 캔디의 알버트’라며 흡족해하였다. 문승협은 원조꽃미남으로 생각한 ‘앤서니’나 ‘테리우스’가 아니어서 시큰둥했으나, 순정만화남자주인공을 닮았다니 안심하였다.
유은정이 굳이 알버트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캔디의 키다리아저씨이자 첫사랑이 된, 어린 시절 ‘포니의 동산’에서 만난 왕자님이 알버트였다. 다들 안소니로 착각했지만, 유은정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스스로 캔디가 되어 문승협을 알버트라 생각하였다.
문승협인생 첫 미용실방문은 성공적이었다. 외투를 입고 안주머니에서 선물을 꺼내 유은정에게 건넸다. 그동안 생일선물등 여러 가지로 마음 써줘서 준비했다. 유은정이 포장을 뜯으며 미소 지었다. 안에 털 달린 가죽장갑을 끼고 문승협 것과 똑같다며 신나 하였다. 미용실을 나서며 장갑 낀 손을 계속 쥐락펴락했다.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천영기와 이담이 펑클파마를 하고 등장하였다. 문승협은 보자마자 깔깔댔다. 천영기와 이담이 어색해하며 뽀글뽀글한 머리를 만졌다.
“어른스럽게 보일라고 했는디, 으째, 이상하냐?”
“하하하, 괜찮아, 꼭 아줌씨 같아.”
“아줌씨?”
“응, 아줌마 같은 아저씨를 줄여서 아줌씨, 하하하.”
“연설하네, 그만 웃어라잉, 어려 보이믄 나이트클럽서 안 받아준께 했그만은.”
“인자 나도 어른인디, 술집만 가믄 단속당한단께.”
“야, 그런다고 달라지냐, 원판불변의 법칙도 몰라?”
“호호호, 아야, 느그들도 승협이멩키로 그냥 핑클파마할 것을 그랬나 부다야.”
“괜찮해야, 처음이라 낯설은께 그래, 며칠 지나믄 자연스럽게 금방 펴져부러.”
“그래서, 오늘 그 꼴로 어디 갈건 데?”
“우리가 요로코롬 머리한 목적이 있제, 따라들 와.”
천영기와 이담은 백미정파마체험담을 위안 삼았다. 이전에 못 들어갔던 ‘유니콘’으로 향했다. 종전과 달리 줄 서서 기다리지 않았다. 한 달 새 디스코텍이 몇 군데 생겼단 소문은 사실이었다. 서너 번 가본 천영기가 앞장섰다. 펑클파마는 건물 4층 디스코텍 앞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자신감에 어깨를 곧추세웠고, 별다른 검문도 없었다. 음악이 건물을 흔들 정도로 쿵쾅쿵쾅 울렸다. 비슷한 또래로 보인 사람들이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송년과 신년을 가족과 함께하란 사회적 분위기를 무시한 청춘남녀들이 수두룩했다.
문승협이 처음 왔을 적엔 별천지였다. 음악소리와 춤추는 사람들뿐 아니라, 각종시설들이 신비로웠다. 지금은 서울신촌‘우산속’ 나이트클럽보다 초라해 보였다. 훨씬 작은 무대와 조명까지 모든 면에서 비교됐다.
웨이터가 문승협일행을 자리로 안내하였다. 손님이 많아 빈좌석이 없다며, 4인용 테이블에 의자 두 개를 붙여줬다. 계산은 여섯 명이라고 두 테이블값을 요구했다. 서울나이트클럽에선 후불이었으나, 목포디스코텍은 먹튀를 우려해 선불이었다.
술과 안주를 금방 가져왔다. 맥주는 다를 게 없지만, 과일안주가 질적양적으로 부실하였다.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경험을 무시할 수 없었다. 우산속을 가보지 않았다면, 모든 게 놀랍고 그런가 보다며 감지덕지했을 터였다. 천영기가 웨이터에게 따지려다 문승협제지로 그만뒀다. 기분을 달래려는 듯 맥주를 따라 건배를 제의하였다. 여섯 명은 송구영신을 목청 것 외치고 잔을 부딪친 후 시원하게 들이켰다.
‘마이클잭슨’ 히트곡이 이어지자, 천영기가 백미정에게 춤추자며 스테이지로 데려갔다. 이담과 한현진도 뒤따랐다. 유은정이 어찌할지 몰라 문승협을 쳐다보았다. 춤을 좋아하진 않으나 제안하면 따라나설 참이었다. 문승협은 친구들이 벗어놓은 외투를 챙겨놓고, 플로어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여러 사람이 똑같은 동작으로 춤췄다. 신촌우산속에서 봤던 형태였다. 서울춤이 목포에 전파돼 신기하였다. 패션과 노래는 그렇다지만, 춤이 유행하다니 흥미로웠다. 군무처럼 멋스럽게 뽐내며 춤추는 표정 또한 재미있었다.
한현진이 같이 놀자며 데리러 왔다. 뾰로통 앉아있던 유은정이 따라나가면서 문승협에게 손을 내밀었다. 친구커플들이 문승협과 유은정을 가운데로 몰아넣었다. 문승협은 부득이 무대에 올랐으나 유행춤을 곧잘 췄다. 방금 전 관찰효과였다. 친구들에 둘러싸여 부끄러워하면서도 흥이 났다. 다들 ‘신디로퍼’ 노래에 한바탕 신나게 놀았다. 블루스곡이 나오자, 천영기와 이담이 여자친구들 손을 붙잡았다. 문승협은 멋쩍게 웃으며 자리로 들어갔다. 유은정도 뻘쭘하긴 마찬가지였다.
문승협이 서먹한 분위기를 타개하려 맥주잔을 집었다. 유은정도 이심전심으로 잔을 들어 부딪혔다. 둘은 얼떨결 단번에 마셔버렸다. 술기운이 은근히 퍼졌다.
친구커플들이 블루스를 추고 자리로 왔다. 둘에게 미안한 마음에 맥주를 마시자며 보챘다. 문승협은 어쩔 수 없이 들이켰다. 세 잔 째다 보니 취기가 올랐다.
신나는 노래 ‘DonnaSummer의 Hot Stuff’가 나오자, 춤꾼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스테이지 앞쪽을 선점하려 우르르 나갔다. 블루스로 잠잠하던 디스코텍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좌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본 사람들에게 열심히 춤을 뽐냈다. 천영기가 시끄러운 음악소리 때문에 큰소리로 물었다.
“승협아, 니 E.T춤을 언제 배웠냐?”
“이티춤이 뭐야?”
“니가 아까 추드만, 요즘 서울서 유행하잖애.”
“배운 적 없어, 저기 스테이지 앞에서 춤추는 얘들을 그냥 따라 해 본 거야.”
“연설하네, 니가 무슨 춤 천재냐? 저걸 한번 보고 따라 했는디 그 정도게?”
“정말이야, 내가 언제 배우겠어?”
“진짜믄 니 허벌나게 소질 있다야, 이참에 무용 쪽으로다가 진출해부러?”
문승협은 순간 정난희말이 떠올랐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날 무용연구소에서였다. ‘오빠, 무용에 소질 있고 체격도 적격이야, 진짜 무용해라’. 잠시 잊었던 정난희가 생각나면서 우울감이 몰려왔다. 답답한 마음에 맥주를 벌컥벌컥 넘겼다. 유은정이 깜짝 놀라 바라봤다. 문승협은 약간 어지럽고 눈꺼풀이 무거웠다.
음악이 ‘Blondie의 Call Me’로 바뀌었다. 젊은 남녀들이 뒤죽박죽 섞여 흥겨운 음악과 현란한 조명에 들썩였다. 천영기와 이담이 춤추러 나가자고 선동했다. 유은정이 함께 어울리자며 문승협을 플로어로 이끌었다.
친구들이 구석으로 한데 모였다. 문승협은 춤추다 홀린 듯이 스피커 앞에 섰다. 커다란 스피커를 뚫고 나온 엄청난 음량이 자신을 튕겨내는 것 같았다. 음악을 온몸으로 느끼며 서서히 움직였다. 점차 무아지경에 빠져 혼자서 열정적으로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휘황찬란한 불빛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Dooleys의 Wanted’와 ‘Goombay Dance Band의 Eldorado’가 이어졌다. 문승협의 얼굴과 목덜미에 땀방울이 흘렀다. 걱정스레 지켜보던 유은정이 친구들을 유도해 문승협을 에워쌌다. ‘The Weather Girls의 It's Raining Men’을 마지막곡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디스코텍 DJ가 곧 12시라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하였다. 제야의 종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자, 모두 함성을 질렀다. 디스코텍에서 1983년 계해년을 보내고, 1984년 갑자년 새해를 맞이했다. 이담이 새해를 기념하자며 건배를 외쳤다. 문승협은 다섯 잔 째 맥주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불안해 한마디 하였다.
“승협아, 니 취하겄다, 그만 마셔라.”
“안 마셔도 뭐랄 사람 없은께, 억지로 마시지 말어,”
“저번에 본께, 맥주 한잔에도 취하드만.”
“아 아직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하알게.”
“니 시방 혀 꼬부라진 소리 한디?”
“승협이 이러는 거 생전 처음 본다야.”
“아야 냅둬, 지도 뭔 생각이 있은께 그런 거여.”
“그래, 승협이 니 하고픈 대로 해부러, 내가 책임지께.”
유은정과 백미정도 만류했지만, 문승협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천영기와 이담이 그냥 두라고 하였다. 문승협이 취해있는 와중에도, 디스코텍은 새해를 맞이한 기쁨에 흥분의 도가니였다. 모두가 신난 음악에 맞춰 광란스러울 정도로 흔들어댔다. 문승협일행이 새벽 1시 즈음 빠져나갈 때까지도, 스테이지에 춤추느라 바쁜 청춘남녀들이 가득했다.
이담과 유은정이 비틀거린 문승협을 부축하였다. 천영기가 근처술집으로 길잡이 했다. 문승협은 와중에도 흥청망청 만신창이가 되려 하였다. 정난희를 잊으려는 괴로움에 영혼이 가출하여 정신을 놔버리려 했다. 이대로 아케론강을 건너 지옥에 들어가 나락의 끝까지 떨어지고 싶었다. 그래도 정신없이 춤추고 나니 후련해지며 야릇한 쾌감을 얻었다. 춤인지 디스코텍인지 묘하게 끌렸다. 서울신촌우산속나이트클럽에선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하였으나, 오늘 목포 유니콘디스코텍에서는 춤에 흠뻑 빠져 좋았다. 야간유흥업소영업종료를 알리는 ‘딕훼밀리의 또 만나요’를 못 듣고 나온 것이 서운했다. 아쉬운 마음에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빠빠빠 빠빠빠 빠빠빠빠빠빠빠 빠빠빠빠 빠 빠빠빠~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친구들은 술주정으로 알았다. 유은정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천영기가 들어간 곳은 지난번 소주집이었다. 디스코텍서 짝짓기 하여 나온 남녀들이 앉아있었다. 서울에서 눈에 불을 켜고 여자를 찾아 헤매던 남자들이 역겨웠었는데, 목포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전엔 테이블가운데에 연탄불을 넣은 양철원통에 둘러앉았지만, 술 취한 문승협 때문에 방으로 들어갔다.
이담이 소주를 채운 찰나, 문승협이 벽에 기대어 졸다 눈을 떴다. 호기롭게 테이블에 다가앉아 잔을 들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며 일일이 친구들 잔과 부딪치고 단숨에 털어 넣었다. 뜬금없는 서울나이트클럽의 노래와 춤을 이야기하면서, 목포가 서울보다 유행이 한발 늦다고 횡설수설하였다. 1분도 채 안되어 고개를 떨궜다. 유은정이 잠시 누우라며 챙기자, 문승협이 무의식 중에 괜찮다고 했다. 유은정이 재차 벽에라도 기대라며 이끌었다. 모두가 걱정스레 지켜봤다. 정난희와 이별로 괴로워한 문승협은 맥주 다섯 잔과 소주 한잔에 완전히 취해 잠들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고, 친구들이 흔들어 깨웠다.
“승협아, 일어나 봐, 인자 집에 가자.”
“아야, 정신 차려봐야?”
“으응, 그 그래. 집, 집에 가야지.”
“이러코롬 취했는디, 집에 잘 들어갈 수 있으까?”
“으짜까, 우리 집에는 손님들이 와있어 갖고, 승협이를 데꼬 가기는 그런디잉.”
“우리 집도 지금 이 시간엔 울 아부지 땜시 쪼까 그래.”
“그라믄, 우리 집서 재우까?”
“은정이 느그 집서?”
“잉, 오늘 우리 집 비었어.”
“은정아, 나랑 나가서 택시 잡자.”
“잉, 알았어.”
“승협이 신발 어딨냐?”
“여그, 이거제?”
“승협아, 정신 차리고 신발 좀 신어봐.”
“환장하겄네 참말로, 술도 못 마시는 것이, 뭐 한다고 술은 퍼마셔갖고는 그냥.”
“택시가 한대도 안 보인디?”
“그라믄 가까운 여관이나 여인숙으로 가끄나?”
“우리 6명이서 남녀혼숙이 안될 것인디?”
“그라믄 방을 두 개를 잡아서 남자끼리 여자끼리 자든가, 아니믄 세 개 잡든가?”
“뭐야, 방을 세 개 잡아서 으짤라고야?”
“쌍쌍이 자믄 돼제?”
“뭣이라고? 그람 승협이랑 은정이랑 한방서 자라고?”
“아따, 여관주인이 뭐라 하믄 별수 있냐? 그라고 승협이가 저러코롬 취했는디?”
“나 나는 승협이랑 자도 괜찮해, 승협이를 믿어.”
“봐라, 은정이도 믿는단디, 으째 현진이 니가 난리여?”
“은정이가 내 친구라서 그란다 왜?”
“니는 승협이를 겪어보고도 뭔 이상한 생각을 하냐?”
“그 그거야 그렇지만, 승협이도 남자잖애?”
“일단 방이나 있는지, 가서 물어보고 결정하자.”
문승협의식이 오락가락하였다. 중간중간 친구들 대화가 들렸으나, 의사표현이 어렵고 몸조차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난생처음 집 밖에서 송년과 신년을 맞이했다. 고교시절 청소년의 삶과 첫사랑이 1983년과 함께 흘러갔다. 청년 문승협인생을 가를 1984년이 걱정과 기대로 성큼 다가왔다. (2권 3부 끝. 2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