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74)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려는 청춘남녀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레스토랑 또한 아베크족들로 하루 종일 붐볐다. 문승협도 ‘폭풍의 언덕’을 찾은 고객들에게 서빙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아르바이트 일주일째였다.
저녁시간이 지나고 한산했지만, 여전히 몇몇 술손님이 테이블을 차지하였다. 조금 여유가 생기자, 다정한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자신이 처량했다. 불현듯 작년 크리스마스 때 정난희와 보낸 날이 생각났다.
누구한테 들킬까 가슴 조이며 무용연구소에 들어갔다. 민망한 발레복을 입고 정난희에게 무용기본동작을 배웠다. 응접실담요를 덮어주며 머리를 기대어왔을 땐 심장이 떨렸다. ‘Poco의 Sea Of Heartbreak’를 배경음악으로 입술을 탐닉하였다. 점점 흥분해 뜨거운 체온을 느꼈다. 정신이 아득하고 몽롱했다. 갈 곳 잃어 방황하던 손이 정난희상의를 파고들었다. 첫 대면한 브래지어를 더듬고 헤매다 젖가슴을 만졌다. 성적욕구에 이성과 절제를 잃었다. 손이 조심스레 움직여 정난희하의로 향하였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본능이었다. 낮게 탄성을 지르던 정난희몸이 순간 굳어지더니 손목을 움켜잡았다. ‘안돼’. 단호한 속삭임에 멈춰야 했다. 어색한 분위기서 평상심을 찾다 눈이 마주쳤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다시 불꽃이 튀며 격정적으로 키스하였다. 성적충동이 치밀어 주체하기 힘들었다. 먼저 이성을 찾은 정난희가 밀어내 겨우 참을 수 있었다. ‘미안해, 널 사랑하는 마음에 그랬어’. 기쁜 나빴을까 싶어 한말에 정난희가 응답했다. ‘다음부턴 미안하단 말 하지 마, 나도 여자고 사람이라 키스하고플 때가 있어, 싫다고 하면 그때 내의사를 존중해 주면 돼’.
회상에 빠진 것도 잠시, 테이블에서 계산서를 달라하였다. 계산을 마친 손님을 배웅하고 프런트옆 레코드판을 뒤졌다. ‘Poco의 Cowboys And Englishmen’ 앨범을 전축에 올렸다. Sea Of Heartbreak이 흘러나오자, 서양식주임이 클래식음악만 틀어야 한다며 야단쳤다. 얼른 내리려는 찰나, 술손님이 그냥 두라고 했다. 서양식주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승협은 팝송을 들으며 테이블을 치웠다. 앨범 두 번째 트랙 ‘No Relief In Sight’가 나오면서 마지막 손님들도 일어났다. 근무시간 30분 남짓 남겨두고 종업원 모두 영업마무리에 들어갔다. 정리정돈이 끝날 무렵, 천영기와 이담이 여자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서양식주임이 퇴근하라며 째려보았다. 문승협은 재빨리 탈의실로 달려가 근무복을 갈아입었다. 퇴근하는 동료들과 메리크리스마스를 외치며 레스토랑을 나섰다.
“와, 또 눈 온다.”
“왐마, 완전한 화이트크리스마스다잉.”
“너희들한테 미안하다, 나 때문에 약속이 어긋나서.”
“오늘 놀기로 한 거?”
“응. 내가 갑자기 알바하는 바람에, 나 기다리느라 크리스마스이브가 다 지나갔잖아.”
“연설하네, 늦게라도 만났으믄 됐어.”
“아야, 지금부터 놀믄 돼, 뭔 그런 것까지 신경 쓰냐?”
“세상이 뜻대로 돌아가믄 그것이 어디 세상이다냐, 가끔은 세상에 맞춰 살아야 써.”
“하하, 난 알바하느라 뺑이쳤는데, 너흰 뭐 했어?”
“오늘 니 세상이 고독한 노동이었으믄, 우리 세상은 즐거운 영화이고 밥이었제.”
“인자 오늘이 아니고 어제여, 그리 시간관념 없어서 이 험난한 세상 어찌 살라 그냐?”
“그래서, 무슨 영화 보고 뭐 먹었는데?”
“어허, 지난 과거를 뭐 할라고 들쑤시냐,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냥 냅둬 부러.”
“과거를 붙잡지 마라잉, 우리한텐 지금이 중한께.”
“느그들 절대 말 마라잉, 승협이 궁금해서 디져부라고.”
“오케바리.”
“에라이 치사한 놈들아, 그게 뭔 비밀이라고.”
“하하하, 호호호.
“아따, 어제부터 내린 눈이 솔찬이 쌓였다잉.”
“아그들아, 유달산공원에 가서 눈싸움 한번 하끄나?”
“그라까? 가자.”
“이 야밤에야? 추워 죽겄그만 그라네.”
천영기제안에 이담이 냉큼 반겼으나, 여자친구들은 시큰둥히 따라갔다. 유은정이 몇 걸음 걷다 문승협신발을 보며 잘 맞는지 물었다. 얼마 전 생일선물한 아디다스운동화였다. 문승협은 편하고 좋다며 폴짝대다 정난희말이 기억났다. 유은정을 만나지 마라 하였지만 의식적으로 거리두자니 비겁한 것 같았다. 굳이 과잉차단보다는 친구사이선만 지키면 된다고 가닥을 잡았다.
“근디, 니는 뭐 할라고 뜬금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냐?”
“합격발표까정 시간 있은께 그라제 뭔 이유가 있겄냐?”
“뭐여, 은정이 니가 승협이 대변인이어?”
“영기 니가 삼척동자도 아는 뻔한 질문을 한께 글제.”
“시간이 남아돌아도 그라제, 재벌집 귀공자께서 돈 번답시고 깝친께 물어본 거여.”
“야, 그 재벌이라는 말 좀 하지 말랬지?”
“염병, 저 시끼는 재벌이란 말만 하믄 꼭 성질내드라잉. 친구지간에 농담도 못 섞냐?”
“아야, 아무리 농담이라도 친구가 듣기 싫다고 하믄, 안 하는 것도 우정이어.”
“음마, 은정이 니 이참에 승협이 비서해라, 아조 눈꼴시려 못 보겄네 참말로.”
“어허, 으째 아웅다웅하냐, 예수님 태어난 성탄절에 싸우믄 지옥 간께 그만들 해라잉.”
“아! 느그들 뭐여, 한번 해보자 이거제?”
이담과 한현진이 몰래 만든 눈뭉치를 던졌다. 천영기가 허둥지둥 눈을 끌어모았다. 문승협도 재빨리 뭉쳐 천영기를 공격했다. 백미정이 유은정에게 눈을 뿌리며 가세하였다. 수세에 몰린 천영기와 백미정이 공원으로 도망쳤다. 문승협과 이담이 눈덩이를 들고 추격했다. 천영기와 백미정이 공원엄폐물뒤에 숨어 저항하였다. 수차례 눈뭉치를 주고받았다. 백미정이 4대 2로 싸우는 건 불공평하다며 휴전을 청했다. 모두 모여 편나누기를 하였으나, 남자 셋 여자 셋이라 여의치 않았다. 한현진이 유은정목덜미에 눈을 한 움큼 넣으며 기습도발했다. 협상이 결렬되고 자연스레 둘씩 세 팀으로 나뉘어 다시 전쟁을 하였다. 문승협이 한현진머리에 눈을 한 아름 뿌려 보복하자, 천영기가 기다렸다는 듯 이담에게 눈폭탄을 덮어씌웠다. 한현진이 눈을 털어내고 백미정에게 이담의 복수를 감행했다. 서로 물고 물리는 눈싸움이 즐겁게 치러졌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천영기와 이담 커플이 급조동맹을 맺었다. 유은정이 한현진과 백미정에게 쫓겨 다니다 굴욕적 항복대신 종전선언을 하였다. 천영기와 이담의 협공으로 궁지에 몰린 문승협도 회담을 요구하면서 평화를 찾았다. 격렬한 눈싸움으로 모두 눈 범벅이었다. 옷과 장갑에 뭍은 눈이 녹아 축축했다. 여자친구들이 시린 손에 입김을 불어 녹였다. 바람이 없어 춥진 않았다. 왁자지껄하다 보니 새벽 2시가 되어갔다. 한현진집을 목적지로 정하고 하산하였다.
천영기와 이담이 여자친구손을 포켓에 넣어 따뜻이 해 주었다. 뒤따라 가던 문승협과 유은정이 다정한 두 커플을 바라보았다. 문승협이 부러운듯한 유은정표정을 발견하고 가죽장갑을 벗어 건넸다. 차마 커플들처럼 손을 끌어다 호주머니에 넣을 순 없었다. 유은정이 괜찮다며 거절했다. 문승협은 털장갑을 벗겨내고 끼워줬다. 유은정이 오므렸다 폈다 하며 해맑게 웃었다.
“털장갑이 다 젖었네, 손 시렸겠다.”
“참을만했는디. 니는 괜찮해?”
“응, 주머니에 넣으면 돼.”
“니 가죽장갑 안에 털이 있어갖고 따듯하다잉.”
“아깐 고마웠어. 영기가 재벌이라고 들먹일 때 내가 버럭 했는데, 네가 도와줘서.”
“그라믄, 이 장갑이 그 고마움에 대한 뇌물이여?”
문승협은 아르바이트이유를 답하기 어려웠다. 왜 돈을 모아야 하는지 말할 수 없었다. 적당히 둘러댄들 꼬치꼬치 질문이 반복될게 뻔하였다.
“아따, 언능 안 오고 뭐 하냐, 느그 둘이 데이트하냐?”
“간다 가, 가고 있잖아.”
“저것들 앞에서는 숭늉도 못 마신단께 그냥.”
“현진이네 들어가기 전에 점빵서 먹을 것 좀 사가자.”
새벽이라 시내상점이 다 닫혔다. 다행히 한현진집 근처 구멍가게가 영업 중이었다. 술과 안주에 라면과 과자 등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양껏 샀다.
한현진이 대문을 열며 현관 앞에서 잠시 기다리라 했다. 따라 들어간 유은정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손짓하였다. 어두운 현관 안으로 들어서니 스위치를 켰다. 아담한 크리스마스추리와 예쁜 장식이 반짝거렸다. 거실테이블 위 케이크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한현진이 촛불을 붙이고 카세트를 틀자, 캐럴송이 울렸다. ‘징글벨’과 ‘루돌프 사슴 코’를 손뼉 치며 합창하고 촛불을 껐다. 유은정이 잽싸게 샴페인을 가져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들으며, 미성년자로서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자축했다. 한현진과 유은정이 사전에 정성 들여 꾸민 파티였다. 상점에서 사 온 먹거리를 안주로 술을 마시며 몇 가지 게임을 치렀다. 출출해서 라면을 끓여 먹고, 동틀 녘까지 화투와 카드놀이를 하였다. 여자친구들이 날밤 새워 졸리다며 한현진방으로 갔다. 남자들도 거실에 널브러져 잠을 청했다. 문승협은 말똥말똥 천장을 응시하다 부스스 일어났다. 집밖으로 나가면 동네사람들 눈에 띌까 봐, 현관옆 테라스에 쪼그려 앉았다. 쌓인 눈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문소리가 났다.
“청승맞게 거그서 뭐 하냐?”
“답답해서 바람 좀 쏘이려고.”
“안 추워?”
“조금 쌀쌀한데 괜찮아, 왜 자지 않고?”
“화장실 갈라고 나왔는디, 니가 안 보여서 나와봤어.”
“은정아, 지난번에 네가 나한테 써준 Yazoo의 Only You 중간가사 생각나니?”
“내가 필요했던 것은 당신 사랑뿐,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오로지 당신. 그거?”
“기억하는구나.”
“그것이 으째서야?”
“아, 무슨 뜻인가 해서.”
“너여, 바로 너.”
“뭐? 나라고?”
“토끼멩키로 놀라긴, 농담이여 농담. 그때 내가 친구로 지내자고 거그다 썼잖애?”
“맞아 그랬지, 난 또 네가 나한테 흑심 품고 있나 했다.”
“호호, 연설하네. 춥다, 언능 가서자자.”
유은정이 잘 자라며 한현진방문을 열었다. 문승협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담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Yazoo의 Only You’ 중간가사에서 ‘당신’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동안 ‘당신’을 정난희로만 여겼다. 최근 유은정입장에서는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였다. 유은정의 여러 언행으로 보아 혹시나 의심했었다. 조금 전 답을 듣고 나니 안심됐다.
오후 3시쯤 되어서야 하나 둘 깨어났다. 여자친구들이 부엌에서 뚝딱거리는 동안, 남자들은 대충 청소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한현진집을 나섰다.
모두 문승협아르바이트장소까지 바래다주겠다며 동행했다. 유은정이 친구들 몰래 쪽지를 문승협에게 건넸다. ‘폭풍의 언덕’에 다다르자, 친구들끼리 볼링 치러 간다며 약 올렸다. 출근시간이 남아 레스토랑 앞에서 밤새 놀던 이야기를 하며 떠들었다.
문승협은 볼링장으로 향한 친구들을 배웅하였다. 부러움을 접고 산업역군자세로 레스토랑계단을 올라갔다. 뜻밖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 화들짝 놀랐다.
“나 난희야, 어쩐 일이야?”
“왜, 아르바이트 때려치고 볼링이나 치러 가지 그래?”
“아, 들었어?”
“됐고, 내일 3시 석빙고에서 봐.”
“난희야, 그 그게 말이야.”
문승협이 해명하려고 쫓아가 붙잡았지만, 정난희가 차갑게 뿌리치며 가버렸다. 문승협은 출근시간이라 하는 수 없이 레스토랑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르바이트 내내 정신이 정난희에게 가있었다. 이런 때 실수한다며 집중하려 애썼으나, 손님호출소리를 못 들어 서양식주임에게 혼났다. 쓸쓸히 퇴근하며 주머니에 종이쪽지를 펴보니 유은정집전화번호였다.
다음날 아침 문현아가 문승협방문을 두드렸다.
“오빠, 어제 아침에 난희언니한테서 전화 왔었어.”
“그랬어? 뭐래?”
“오빠 있냐고.”
“그래서, 뭐라 했어?”
“뭐라 하긴, 집에 없다고 했지. 오빠, 요즘 외박하고 왜 그래, 무슨 일 있는 거야?”
“아 아냐, 그냥 일이 좀 있어.”
문승협머리가 띵하고 복잡했다. 친구들과 노느라 외박한 사실을 정난희에게 들켜 덜컥 겁이 났다. 뭐라 설명할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튿날 오후 3시, 두 사람이 석빙고서 마주 앉았다. 흡사 여자경찰과 남자죄인 이었다. 문승협이 취조에 마땅한 구실을 찾지 못해 묵비권을 행사하였다. 정난희가 화난 요인은 뚜렷했다. 문승협에게 유은정을 만나지 않겠단 선언을 들은 지 불과 며칠 전이었다. 더욱이 함께 밤새운 것만큼은 어떤 핑계로도 용서되지 않았다. 문승협은 정난희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됐기에 유구무언이었다. 참회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였다.
“미안, 정말 미안해, 진심으로 미안해.”
“미안 미안 미안, 지겹다 진짜, 친구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이라도 해.”
“맞아, 친구들 때문에 그랬어.”
“뭐라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
“그리고, 확인할게 한 가지 더 있어.”
“뭐 뭔데?”
“오빠생일날 서울에서 누구 만났어?”
“서울친구들.”
“서울친구들하고 또 누가 있었잖아?”
“누 누구?”
“채정이.”
“어 어떻게 알았어?”
“지금 그게 중요해?”
“…….”
“참나, 이실직고해도 시원찮을 판에, 나를 속이려고 숨기기까지 해?”
“난희야, 진짜 속이려는 건 아니야, 솔직히 털어놓으면 네가 화낼까 봐 그랬어.”
“어이없다 정말, 오빠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깨졌어.”
“미안해, 이제부턴 안 그럴게.”
“대학 가면 미팅이다 뭐다 해서 예쁜 여자들 만날 텐데, 그때마다 거짓말 할거 아니야.”
“난 안 그래, 미팅 같은 거 안 할 거야. 다른 여자 절대 안 만나, 나 맹세할 수 있어.”
“유은정, 채정이랑도 그런데, 안 봐도 뻔해.”
“아 아니라니까, 결코 그럴 일 없어. 어떻게 해야 믿어줄래, 내가 혈서라도 쓸까?”
“어휴, 이러는 내가 너무 비참하고 구차해서 그만할래, 우리 그냥 여기서 끝내자.”
“난희야, 미안하다고. 앞으로 다신 안 그럴게, 응?”
“아냐, 이쯤 끝내는 게 맞아. 어차피 오빠대학합격해서 서울 가면 서로 만나기 힘들고, 설사 내가 무용교습 차 서울에 가도 시간내기 어려워서 자주 못 볼 거야.”
“그럼 내가 수시로 연락하고 자주 내려오면 되잖아?”
“내가 엄마 때문에 집전화받기 어렵고, 오빠가 내려와도 무용 때문에 시간 내서 만나기 어려운데, 그게 가능하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아무 소용없다고.”
“서로 노력하다 보면, 무슨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오빠, 문승협씨. 현실을 직시해,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라고.”
“난희야, 그게 무슨 현실직시야 현실도피지. 혹시, 이별이유를 만드는 거 아니야?”
“그래, 오빠가 뭐라 하든 상관없어. 나는 이미 마음먹었어, 우리 현실을 인정하자.”
“난희야, 제발.”
정난희는 헤어질 결심을 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승협은 넋 빠진 사람처럼 앉아있었다. 어렵사리 다시 재회하려는 찰나에 또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지 괴로웠다. 이별하고 만나기를 세 번째라 지치기도 했다.
정난희가 유은정과 어울린 일을 질투하고, 생일날 서울서 채정이를 만난 것을 빌미로 재차 결별선언하였다. 사실 몇 가지 배경이 있었다. 본인의 대학입시를 위한 고된 무용교습이 주이유였다. 대학에 입학해서 서울로 갈 문승협과 만남을 이어가기가 순탄치 않으리라 판단했다. 다른 하나는 며칠 전 친구 부현지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문승협이 채정이에게 정난희와 헤어진 소문을 공식 인정하였다는 부분이었다.
문승협은 아르바이트하러 가면서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어떻게 서울에서 채정이와의 만남을 정난희가 알았을까’. 채정이와 서울친구들을 만난 다음날이 기억났다. 박상인이 부용경과 통화하면서 문승협생일 등을 언급했었다. 아마도 정난희친구이자 부용경여동생 부현지를 통해 전해진 것으로 추측하였다. 세상에 비밀은 없단 말이 진리임을 새삼 깨달았다. 일방적 정난희이별선언으로 짧은 재회가 끝나 답답했다. 갑자기 최선경과 서수연선생에게 느꼈었던 감정은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하였다. ‘왜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수록 마음이 다칠까’. 무척 자괴감이 들었다.
정난희와 헤어진 아픔이 반복되어선지 체념도 쉬워졌다. 처음보단 두 번째가, 두 번째보단 세 번째가 덜했다. 국민학교 최선경과 중학교 서수연선생의 절망적 이별경험도 한몫하였다. 모두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외치며 즐긴 성탄절이었지만, 문승협만 정난희와 이별사유가 돼버린 슬픈 크리스마스였다. 채정이로부터 자각한 문승협첫사랑이 기사회생한듯했으나, 또다시 과거와 미래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