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3부 13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73)

by 태양을 품은 별

다음날 방과 후, 문승협은 바삐 학교를 나섰다. 3시 아르바이트면접을 보러 레스토랑으로 갔다. 잔뜩 긴장해 20분쯤 기다리니 사장인듯한 사람이 들어왔다. 이력서 없이 개인신상에 대해 물었다. 고3이라 마땅찮다며 갸웃하였다. 연세대학교에 지원했다고 하니 호감을 보이다가, 한 달 뒤 합격자발표한단 말에 입맛을 다셨다. 원래 단기아르바이트는 안 뽑는다며 뜸 들였다. 같은 또래 조카를 생각해서 채용한다며 오후반일근무를 지정하였다. 아침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전일근무, 아침 9시부터 17시까지 오전조와 17시부터 새벽 1시까지 오후조로 8시간씩 반일근무가 있었다. 문승협은 전일근무도 불사할 각오였다. 사실상 방학에 들어가는 월요일 3학년 마지막 등교가 문제지만, 오후 5시부터 근무여서 당장 오늘부터 일하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사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불렀다.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라며 인사시켰다. 가급적 단순한 서빙과 홀청소를 맡기라고 지시했다. 문승협에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배우라며 독려하였다.

문승협은 난생처음 채용현장에 뛰어든지라 바짝 긴장했다. 고용주눈에 들기 위해 표정 하나하나 무척 애썼다. 어른들의 사회생활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종업원이 문승협을 주방 쪽으로 데려갔다. 종이와 볼펜을 건네며 주소와 연락처, 부모의 직장과 전화번호를 적으라고 하였다. 문승협이 덜컥 겁이 나 왜 필요한지 물었다. 혹시라도 엄마아빠에게 아르바이트한다며 연락할까 봐 두려웠다.

니가 일하다 사고 치믄 배상해야제,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알아 놓는 거여.

“아, 네.”

“어제가 니 생일이었제? 나는 22살이어.”

“그러고 보니, 어제 샴페인을 따라주신 분이네요?”

종업원이 동생으로 생각해서 말을 놓겠다고 했다. 문승협은 의사도 묻지 않고 형의 자리를 찬탈해 어이없었다.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사회에서 나이가 깡패라던 경우였다. 궁금하지 않은 꿈을 늘어놓는 친절 또한 거북하였으나, 쟁반에 비친 자기 모습이 웃겼다. 전혀 기분 나쁜 내색 없이 생글거리고 있었다.

종업원은 양식조리자격증을 따서 멋진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것이 목표였다. 근무경력 2년 차로 목포 근처 무안이 고향이며 순수하고 덩치가 컸다. 레스토랑에 달린 조그만 방에서 숙식하며 전일근무를 했다.

문승협이 갑자기 웃음을 빵 터트렸다. 일터도 꿈도 레스토랑주인인데 이름이 ‘서양식’이라니 참을 수 없었다. 부정적 감정들이 싹 날아갔다. ‘안 그래도 형이 한 명쯤 있었으면 했는데 잘됐네, 서양식형이 꿈을 이루도록 빌어줘야겠다’. 마음이 열리면서 한결 편안해지고 껄끄러운 질문도 하게 되었다.

“웃어서 미안합니다. 호칭을 어떻게 할까요?”

“우리 둘만 있을 땐 편하게 형이라고 해, 딴사람이나 손님 있으믄 주임이라 부르고. 일하다가 아리까리 아심찮은 것은 재깍 물어보고잉?”

“네. 참, 아까 그분이 사장님이세요?”

“아니, 전무님이어. 여사장님의 시동생인디, 실질적으로 여그를 운영하제. 자상하믄서도 쪼까 깐깐해, 삐쩍 말라갖고 날카로운 인상멩키로. 여사장님은 으짜다 한 번씩 들리고, 남편이 경찰간부여.

주방에서 누구냐고 물었다. 서양식주임이 주방장에게 문승협을 소개하고 레스토랑을 둘러보자며 앞장섰다. 중앙홀과 커튼룸으로 구역을 나눴다. 중앙홀은 공동담당이고, 디귿자형 커튼룸은 아르바이트생 2명이 맡았다. 서양식주임이 모든 구역을 총괄하였다. 문승협의 근무시간을 염두해 알려주었다. 주로 5시 전후는 커피와 차를 마시는 손님, 6시에서 8시까지는 식사손님, 8시 이후는 술 손님. 손님층은 대학생과 젊은 직장인 중심이며, 젊은 남녀 아베크족이 많은 반면 가족단위는 드물다고 했다. 손님응대 등 주의사항과 각종비품위치, 식음료대사용법도 설명하였다. 바쁜 저녁시간에 끼니를 거를 수 있으니, 30분 일찍 출근해서 식사를 마친 뒤 오전근무조와 교대를 권고했다. 오전조아르바이트생들을 불러 모아 인사를 주선하였다. 아르바이트생들이 서양식주임지시로 능숙하게 경양식테이블세팅과 찻잔 놓는 시범을 보였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노하우가 담겨있었다. 이유 있는 식사예절과 나름의 격식을 갖췄다. 문승협은 모든 게 생소할 따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갔다. 오후조아르바이트생들이 출근하자, 서양식주임이 문승협을 소개했다. 힘든 일은 서로 도우라고 당부하였다. 마침 주방에서 저녁으로 계란탕과 오므라이스를 내왔다. 식사 중에 남자아르바이트생 주시해가 이죽거리며 박현을 아는지 물었다. 문승협은 유선국민학교와 문일고등학교 1년 직속선배라며 친하다고 다. 여자아르바이트생 원혜연이 쳐다봤다. 족보가 밝혀지니 바로 반말이었다.

“그라믄 우리가 1년 선배여. 난 목포대학교에 댕겨.”

“나는 목포광일전문대고, 박현이랑 동네친구에 유선국민학교 동기동창이여.”

“아 그러세요.”

“나 니 잘 알어.”

“저를요?”

“잉, 니 문일고그룹사운드 윙스싱어잖애?”

“아 네, 작년 2학년 때요.”

“근디 말이어, 귀하디 귀한 태선화학손자께서 뭐 한다고 고상스럽게 알바를 다하까?”

“네?”

“거그 유선국민학교대강당 단상커튼에 떡하니 써졌잖애, 기증 태선화학회장 박동후.”


문승협이 유선국민학교에 다니던 5학년 때였다. 태선화학 박동후회장이 대강당 암막커튼과 단상무대커튼, 조명시설과 음향기기, 대형시계와 비품들을 기부하였다. 교장과 담임이 공개석상에서 감사인사를 전하란 바람에 태선화학손자라고 소문이 퍼졌다. 문승협이 할머니오빠라며 진외가큰할아버지일 뿐 친손자가 아니라고 밝히면서 수그러들었다. 한동안 재벌손자로 선망하거나 시기질투한 아이들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주시해의 돌발발언에 다들 밥 먹다 말고 문승협을 바라봤다. 이번에도 친할아버지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술렁거렸다. 주시해가 반찬을 집으며 한마디 더 하였다. 재미 삼아하는 것과 살기 위한 아르바이트가 다르단 말에 주변시선이 싸늘해졌다. 문승협은 돈이 필요해서라 하면 반감만 살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잘 대해줬던 서양식주임마저 거리 두는듯했다. 주홍글씨처럼 아르바이트현장까지 따라다니는 태선화학이 짜증 났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두 서둘러 식사를 끝냈다. 문승협은 먹는 둥 마는 둥 잔반을 정리하였다. 서양식주임에게 근무복을 건네받았다. 흰색와이셔츠와 나비넥타이에 검은색 양복조끼였다. 갈아입으니 영락없는 웨이터복장이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영 어색했다.

근무시간이 되어 본격 업무에 들어갔다. 문승협은 주시해와 원혜연을 따라다니며 보조하였다. 준비단계부터 찻잔 놓기와 식기세팅순서 등을 암기하려 열심이었다. 주시해와 원혜연이 상황별 서빙법을 한차례 씩 시범 보인 뒤 직접 해보라 했다. 손님을 맞아 주문받기, 나르기와 세팅, 마지막 테이블 치우기까지였다.

문승협은 첫 손님응대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도구를 떨어뜨렸다. 클래식음악이 흐른 고요한 실내에 포크와 티스푼 떨어진 소리가 유독 컸다. 반복된 실수로 심장이 요동쳤다. 주시해가 귀하신 몸이 언제 해봤겠냐며 쫑코를 줬다. 원혜연이 보다 못해 매번 수습하였다. 문승협은 위기를 넘긴 안도감보다 쌀쌀맞은 원혜연태도에 속상했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해도 무반응이었다.

저녁 9시까지 식사손님으로 정신없었다. 이후 많지 않은 술손님에 숨통이 좀 트였다.

밤 12시가 넘어가면서 커튼룸과 홀이 비었다. 정리정돈을 마치고 퇴근준비를 하였다. 문승협이 유니폼을 벗으며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뻘쭘히 레스토랑을 나섰다.

새벽퇴근이라니 감정이 오묘하였다. 노동을 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독서실서 나오거나 밤거리를 헤매다 새벽별을 보며 집에 들어갈 때와 달랐다. 학교 다닐 적엔 어른만 되면 장땡인 줄 알았다. 막상 닥쳐보니 직업을 선택하고 구하는 일이 여간 힘들었다. 고용주눈에 들려고 얼굴근육을 총동원해 미소 짓던 순간이 떠올랐다. 안타까우면서도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직장상사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마음가짐. 아르바이트생들과 동료애를 발휘해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 전혀 배우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와닿아 신기했다.

다음날, 당구장에 모여있는 친구들과 만났다. 어제 구박받은 직장스트레스를 토로하였다. 어느 놈하나 들어주거나 공감해주지 않아 입을 꾹 닫았다. 당구 치며 노는 친구들을 남겨두고 출근해야 해서 아쉬웠다. 직장으로 향한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레스토랑사람들이 어제처럼 문승협을 경계했다.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눈빛이었다. 문승협은 불편함 속에서 시행착오를 줄여갔다. 요령 없이 누구보다 성실하게 빠릿빠릿 움직였다. 그럼에도 다들 얼마나 갈까 하는 표정이었다. 여전히 재벌손자가 왜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갸우뚱하였다. 문승협은 행동 외에 딱히 보여줄 것이 없었다.

저녁 늦은 시간 술손님이 많았다. 서양식주임이 고난도서빙기술을 시전 했다. 왼손에 안주 두 접시를, 오른손에 맥주 다섯 병을 들었다. 문승협이 무심코 한마디 던졌다가 또 한 번 마음상하였다. 엎어버리면 큰일이라며 손수레 같은 카트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동료들이 편하게만 일하려는 유전자라며 비아냥댔다.

전무가 퇴근시간에 문승협을 불렀다. 서양식주임에게 보고받아 알면서도 태선화학 박동후회장과 무슨 관계냐며 미간을 찡그렸다. 도대체 그런 집안이 뭐가 부족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냐고 노려봤다. 여기 있는 동안 절대 문제 일으키지 말라며 신신당부하였다.

문승협은 오늘도 착잡하게 퇴근길에 올랐다. 힘겨운 사회와 어른세계를 체험하느라 고단했다. 불쑥 짜증이 밀려와 허공에 외쳤다. ‘대답도 듣지 않을 거면서 왜 묻냐? 졸업까지 남는 시간에 용돈 벌고, 경험도 하려 한다 우짤래? 일만 잘하면 되지 별 걸 시비야.’

월요일, 고등학교3학년 마지막 등교였다. 방학식이 며칠 남았으나 3학년들만 사실상 겨울방학에 들어갔다. 저녁 무렵 김부일이 채영이와 이정국을 데리고 레스토랑을 찾았다. 문승협을 볼 겸 아르바이트격려차였지만 근무시간이어서 합석할 수 없었다. 그나마 문승협의 서빙을 받으며 몇 마디 나눴다.

이정국이 식사를 마치고 나가면서 서울연락처를 문승협에게 주었다. 곧 서울로 갈 거라며 아쉬운 마음에 사정없이 껴안았다. 문승협이 숨 막혀 억하고 소리 지르는 바람에 따가운 손님들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동료들의 날카로운 눈빛은 덤이었다.

수요일저녁은 조금 한가하였다. 문승협이 손님을 기다리며 입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뜻밖의 인물이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그토록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정난희였다.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몸을 숨겼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멍했다. 곧이어 서양식주임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망설이다 하는 수 없이 프런트로 갔으나, 정난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손님이 언제 올지 모른디 뭐 하냐? 손님 온가 안 온가, 항시 입구를 지켜보라 했잖애?”

“계속 서있었더니 다리가 아파서 잠시 의자에 앉아있었어요, 죄송합니다.”

“벌써부터 요령 피울 거여?”

“아니요, 다신 안 그럴게요.”

“또 한 번 그래 봐 그냥, 저그 1번 방에 가봐.”

문승협은 1번 룸으로 가면서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사라져 버린 정난희를 찾으며 무심결에 룸커튼을 젖히고는 깜짝 놀랐다.

“어? 나 난희야.”

“소문이 사실이었네?”

“무 무슨?”

“오빠가 여기서 아르바이트한다는 소문. 앉아, 왜 그러고 멀뚱멀뚱 서있어?”

“근무시간이라서.”

“내가 양해 좀 구했어, 5분만 이야기하고 가겠다고.”

“네가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오빠, 나들어오는 거 보고 숨었지?”

“아 아냐, 알바가 무슨 죄짓는 것도 아닌데.”

“알바?”

“아, 여기서는 아르바이트를 알바라고 하더라.”

“알바 유니폼치고는 잘 어울리는데?”

문승협은 그렇게 보고팠으면서도 정난희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흰색와이셔츠와 나비넥타이에 검은색 양복조끼의 웨이터복장이 왠지 부끄러웠다. 아까 무의식적으로 숨었던 이유이기도 하였다.

“놀리는 거야?”

“아니, 기특해서 그래. 왜, 창피해?”

“너한테 이런 모습 보여주는 게 좀 그래서.”

“오빠가 알바를 하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그냥, 시간도 남고 하니까.”

며칠 전 통화했지만 반년만의 재회였다. 이별한 사이인지 의심될 정도로 정난희행동이 자연스러웠다. 헤어진 전여자친구가 서먹하던 문승협도 금세 동화되었다. 엊그제도 만난 연인 같아 혼란스러웠다. 오랜만의 대면에 엄청 떨리면서도, 표시 내지 않으려 애쓰는 자신이 오히려 대범하지 못한 것 같았다.

“오빠집에서 알면 난리 나는 거 아냐?”

“집에선 나 알바하는 거 몰라, 비밀로 했어.”

“오늘은 오빠가 근무해야 하니까, 내일 만나서 이야기하자, 내일 시간 괜찮아?”

“응, 괜찮아.”

“그럼 내일 오후 3시 30분에 석빙고에서 봐.”

정난희가 예전처럼 자기 용무만 이야기하고 홀연히 가버렸다. 동료들과 서양식주임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문승협주변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누구대? 무자게 이쁘드만.”

“쪼까 전에 프런트서 여자친구라고 하든디?”

“주임님, 만날 수 있게 배려해 줘서 고마워요.”

“방금 그 가시나가 무용하는 정난희 맞제?”

“난희를 아세요?”

“잉, 내가 졸업한 목화여고후배여.”

“선남선녀라서 그란가, 둘이 잘 어울리드라야.”

“정난희가 허벌라게 콧대 쎈 가시난디, 역시나 재벌집손자가 애인이었그만?”

“혜연누나, 그 재벌이란 말 좀 그만하면 안 돼요? 진짜 재벌이 들으면 웃어요.”

아르바이트소문을 확인하려 방문한 정난희를 화제로 홀이 시끌벅적하였다. 주방사람들까지 모여 무슨 일이냐며 술렁였다. 다들 무용하는 예쁜 여자친구를 둬서 좋겠다고 놀렸다.

문승협은 쑥스러워 얼른 자리를 피했다. ‘난희가 왜 만나자고 할까? 혹시 다시 만나자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처신해야 가장 자연스러울까?’. 점점 기대가 부풀면서 행복한 궁리에 빠졌다.

다음날 정난희를 만나러 가면서도 어찌 대할지 고민하였다.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편으론 혼자 김칫국 마시는 것은 아닌가 의심됐다. 그럴 경우는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할는지 노심초사했다.

문승협이 석빙고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난희가 자리 잡고 있어 불길하였다.

“아직 10분 남았는데, 언제 왔어?”

“방금. 왜, 내가 일찍 나오니까 놀라워?”

“응.”

“어쭈, 솔직해졌네?”

“하하, 그런가? 나도 조금 변했나 봐.”

“하긴 안 변한 것도 이상하지, 나도 마찬가지니까.”

“근데, 조금 불안하기는 해.”

“왜?”

“너 생일이고 화이트데이날에 이별편지를 받았잖아, 그때도 네가 먼저 와있었거든.”

“참나, 오빠는 진짜 별것을 다 기억한다, 내가 의도적으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럼 다행이고.”

“그 신발 예쁘네, 아디다스인가?”

“아 이거, 응.”

“뭐야, 살짝 당황하는 거 같은데?”

“내가? 아 아냐.”

“왜, 우리 헤어진 사이에, 내가 모르는 여자친구라도 생겼나? 그런 거야?”

“여자친구는 무슨, 그럴 시간도 없었어.”

문승협은 아무 생각 없이 유은정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신발을 신었다. 그럴 거면 표정관리라도 잘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의심을 샀다.

“사실은, 나 학력고사 이후에 무용연구소하고 집 앞에서 몇 번 기다렸었어.”

“왜?”

“네가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미치겠더라.”

“아직도 내가 좋아?”

“응, 사랑해.”

“내가 그렇게 매몰찼는데도?”

“나 공부하라고 그런 거잖아, 이해해.”

“바보.”

“내가 왜 바보야?”

“나는 나만 아는 무척 이기적인 애야, 오빠가 사랑하는 그런 애가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 너를 사랑하는 거야,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정난희를 사랑한다고.”

“나랑 다시 만나고 싶어?”

“응, 우리 다시 사귀자, 내가 더 잘할게.”

“아냐, 더 잘할 필요 없어.”

“거 거절이야?”

“나는 그럴만한 자격도 없어, 착한 오빠를 엄청 힘들게 만들었으니까, 안 그래?”

“그럼 승낙하는 거야?”

“오빠가 나 때문에 지칠지도 몰라, 아니 지칠 거야.”

“그건 내 몫이잖아, 내게 맡겨.”

“오빠를 못 믿어서가 아니야, 내가 나를 믿지 못해.”

“내가 괜찮다잖아, 내가.”

“난 나를 잘 알아, 나를 위해서면 언제든 오빠를 희생시킬 거야, 이미 그랬고.”

“상관없어, 너도 날 사랑하잖아, 맞지?”

“오빠를 행복하게 지켜줄 자신이 없다니까?”

“우리가 헤어진 뒤, 처음엔 너를 기억에서 지우려 노력했어. 그리고 지운 줄 알았어, 정말 난 그런 줄로 믿었어. 그런데 내 곁에 네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 내가 그토록 사랑한 너의 미소도 여전히 예뻐, 넌 내게서 지울 수 없는 그런 존재였던 거야, 내 사랑이 변한 건 없다고.”

“…….”

“난희야, 기회를 줘. 아니, 서로에게 기회를 주자, 응?”

“오빠, 그럼 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줘.”

“그래, 지금까지도 기다렸는데, 얼마든지 기다릴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오빠 대학합격발표할 때까지는 내 마음을 정할게.”

문승협은 주어진 시간과 선택에 진심을 다했다. 정난희는 귀 기울여 들었다. 문승협은 마음의 소리를 전하고 나니 가슴이 벅찼다. 종국적인 재결합은 아니었으나 이미 정난희를 새롭게 얻은 기분이었다.

“난희야, 나 지금 너무 좋은데 눈물이 나. 사랑을 다시 품을 수 있어서 행복한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이런 감정 내 평생 처음이야.”

“여기서 울면 어떡해 창피하게, 빨리 이걸로 닦아.”

“미 미안.”

“이그,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내가 오빠 울린 줄 알겠다.”

“울린 건 맞지 뭐.”

“오빠, 내가 생각해 본다 했지 다시 사귄다고 한 건 아냐, 숭늉부터 마시면 어떡해?”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그리고, 짚고 넘어갈 게 있어.”

“말해봐, 뭔데?”

“단도직입으로 말할게. 유은정 만나지 마, 채정이 만나지 마. 그럴 수 있어?”

“나도 거두절미 대답할게. 알았어, 안 만날게.”

문승협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어 새삼 놀랐다. 확신을 주려 즉답하였다. 정난희성격상 구구절절 설명하면 자존심 상해할 게 뻔했다.

정난희는 문승협에게 벌어진 일들을 꿰고 있었다. 목포에 내려온 채정이를 코롬방제과점에서 만나고, 이담커플에게 유은정을 소개받은 것을 알았다. 우연을 가장해 주선한 한현진이 이해되면서도 불쾌하였다. 채정이와의 관계에 위기감을 느끼고 질투했다. 무엇보다 문승협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정난희는 무용연습실에 가야 하고, 문승협은 아르바이트출근시간이었다. 둘은 석빙고제과점을 나와 어색하게 헤어졌다. 문승협은 걸어가는 정난희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쉬워하였다. ‘시간이 좀 더 있더라면, 그동안 헤어진 회포를 풀 수 있었을 텐데’. 한 번 꼭 껴안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미련이 남았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발길을 돌렸다. 앞으로 정난희와 함께할 시간이 더 많을 거라는 희망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저절로 노래가 나왔다.

‘달빛처럼 고요한 그대는 누구인가, 햇살처럼 화사한 그대는 누구인가, 그 누구의 사랑으로 여기에 서있는가, 영롱한 그대 눈빛은 내 모든 우울에 빛을 던지고, 조그만 그대 입술은 외로운 마음에 위로를 주네, 그대와 나의 만남은 보배로운 약속, 내일은 그대의 것 내일은 소망의 날, 나의 사랑아~’

얼마 전 서울친구들과 갔던 신촌우산속나이트클럽에서 그룹사운드 송골매가 부른 ‘아가에게’란 노래였다. 레스토랑에 도착해서도 소리 죽여 흥얼거렸다. 눈코 뜰 새 없는 아르바이트마저 즐거웠다.

그러나 아르바이트 끝나고 집 가는 길에 불안한 뭔가가 스멀거렸다. 이별의 슬픈 상처 때문인지, 예전과 다른 감정 하나가 마음한구석에 똬리 틀고 있었다. (계속)


이전 12화단테의 별 – 2권 3부 1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