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3부 12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72)

by 태양을 품은 별

문승협과 천영기가 아침에 박정진집을 나서며 인사했다. 머무르는 동안 신세 진 감사한 마음을 전하였다. 박정진아빠가 악수하며 면접 잘 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박정진엄마는 또 보자며 등을 토닥였다.

둘은 서둘러 버스정류소를 찾아갔다. 따뜻한 배웅을 받았음에도 기분 탓인지 몹시 추웠다. 면접시간이 비슷하여 마치는 대로 서울역시계탑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각자 지원한 대학교를 향해 출발하였다.

문승협은 버스에 오르니 긴장됐다. 선배들 경험담을 생각하며 부담을 떨쳐내려 애썼다. 면접점수가 있긴 하나 동점자 처리에 반영되는 정도라고 했다. 대학입학당락에 큰 영향 없다는 조언을 되새겼다. 재작년 서울대서 있었다던 황당한 면접이야기가 떠올랐다.


당시 서울대학교법대 예상커트라인 학력고사점수가 306점이었다. 극심한 눈치싸움결과 200점 이하 5명이 합격하였다. 면접과정에서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졌다. 교수가 ‘관악산에서 노루가 뛰어논다’를 영어로 말해보라 하자, 수험생이 ‘Kwanak mountain 노루 jumping’이라 했다고 전해졌다. ‘법대교수’를 ‘Teacher of 법대’라 하고, ‘너는 참아다오’를 ‘You need no energy’라며, 희대의 콩글리쉬로 답하였단 어처구니없는 풍문도 있었다. 이로 인해 1982학년도 학력고사 이후 서울대학교입시요강에 조항이 추가됐다고 소문이 돌았었다. ‘본교 수학이 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경우, 합격을 취소할 수 있다’.


문승협이 연세대학교에 도착했을 땐 학교건물마다 수험생들로 만원이었다. 곳곳에 배치된 조교들과 선배들의 통제로 움직였다. 입학지원자수와 동일계통 단과대학별 상황에 따라 강당이나 학과강의실에서 면접을 실시하였다. 책걸상을 적게는 10개, 많게는 20개씩 배열해 놓았다. 줄줄이 순서대로 학과교수들 앞에 앉아 질문을 받고 답변했다. 마치 타이머를 맞춰놓은 컨베이어벨트처럼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문승협은 심층적인 질문일 까봐 엄청 걱정하였으나, 대학지원동기와 학과선택이유 등 기본적 내용이었다. 우려한 바에 비하면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대기하고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을 뿐이지, 실제 면접시간은 체감상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면접장을 빠져나오니 긴장이 풀리면서 후련했다. 한편으론 합격자발표를 기다리는 시간이 두려웠다.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와 잔뜩 움츠러들어 백양로를 걸어 나갔다. 뒤돌아보지 않고 서울역버스를 탔다.

서울역시계탑 앞에서 천영기를 30분째 기다렸다. 추위에 겨워 역사로 들어가니 퀴퀴한 냄새가 반겼다. TV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대포무장간첩 2명의 전향선언과 전두환대통령이 아웅산폭탄테러에 이어 이번에도 참아 넘겼단 뉴스였다. 정부의 북한보복조치가 없다며 불만을 표출한 시민과 전쟁이 아닌 평화를 선택해서 다행이란 시민들로 나뉘었다. 서울역사에서도 반공산주의와 멸공이 힘을 얻어 목소리가 높았다. 말미에 나온 여의도백화점개점과 경향신문사의 소년경향창간소식은 관심밖이었다.

문승협은 혹시 천영기가 왔는지 주위를 둘러보다 공중전화를 발견하였다. 작은집에 들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바로 내려가서 서운하단 작은엄마를 달래 보려 애교 섞인 말로 연신 죄송하다고 했다.

전화를 끓고 다시 서울역시계탑으로 가려는데, 때마침 천영기가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

“영기야, 면접 잘 봤냐?”

“잘 보고 말 것도 없드라, 그냥 예 예만 하다 나왔어.”

“나도 마찬가지야, 괜히 잔뜩 쫄았다.”

“그나저나 기차시간이 어뜨크롬 되까?”

“지금 새마을호뿐이더라, 무궁화호는 저녁시간이야.”

“그라믄 새마을호타자.”

“새마을호는 비싼데?”

“아야, 대여섯 시간을 여그서 있기는 좀 글차네?”

“하긴, 무궁화호를 탈 시간이면 광주 근처까지 가겠다.”

“우리 목포에 내려갈 때만이라도 편하게 가자?”

“그러자 그럼, 이럴 때 새마을호 한번 타보는 거지 뭐.”

둘은 큰맘 먹고 새마을호기차표를 끊었다. 점심을 김밥과 냄비우동으로 때우고 기차에 올랐다.

며칠 동안 계속 돌아다닌 데다 새벽까지 노느라 피곤하였다. 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처럼 잠들었다. 면접 보랴 서울길 찾아다니랴 종일 긴장한 탓도 있었다. 광주송정리역을 지날 즈음 깼지만, 목포에 내려서 저녁 먹자며 다시 잠을 청했다.

저녁 11시가 되어 목포에 도착하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목포역 앞 뼈다귀해장국집으로 갔다. 식사를 마치고 서로 수고했다며 위로한 뒤 헤어졌다.

문승협은 일주일가량 집을 떠나서인지 낯설었다. 초인종을 누르려다 왠지 쑥스러워 대문열쇠를 찾았다. 오랜만에 열쇠로 여는 지라 현관열쇠와 헷갈렸다. 거실로 들어가면서 ‘다녀왔습니다’라고 외쳤다. 동생 문현아만 방문을 열고 나와 반겼다. 엄마 이항리가 안방에서 졸고 있었다. 재차 다녀왔단 인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별말 없이 가서 쉬라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문승협은 서울 간 일을 묻지 않은 엄마태도에 속상하였다. 문현아가 방으로 들어가는 문승협을 뒤따랐다.

“오빠, 잘했어?”

“응, 그냥저냥.”

“많이 피곤하겠다.”

“괜찮아, 기차 타고 오면서 많이 잤어. 윤아는 자니?”

“응, 좀 전에 잠들었어.”

“너도 어여 가서 자.”

“저기, 지난 일요일에 난희언니한테서 전화 왔었어.”

“그래? 뭐래?”

“그동안 잘 지냈냐고 그러면서, 오빠 대학원서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더라.”

“그래서, 뭐라 그랬어?”

“오빠가 어디 쓰는지 말 안 해줘서 모른다고 했어.”

“엄마한테 물어보지 왜?”

“엄마도 모르던데?”

“엄마가 모른다고 그래?”

“응, 나는 몰라, 그러더라.”

“또 다른 말은 없었고?”

“오빠 언제 오냐 묻길래, 오늘쯤 올 거라고 했어.”

“그러고 전화 끓은 거야?”

“참, 오빠 오면 시간상관없이 집으로 전화하랬어.”

문승협은 재빨리 동생손을 잡고 거실로 나갔다. 혹시 정난희부모가 받을까 무서워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문현아가 거리낌 없이 다이얼을 돌렸다. 문승협은 나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동생을 바라봤다. 두세 번쯤 신호 갈 즈음 문현아가 통화하였다. 입모양으로 난희언니라며 전화를 건넸다. 문승협은 수화기를 막고 방으로 들어가는 동생에게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지막이 목청을 가다듬고 심호흡했다.

“여 여보세요?”

“응, 나야.”

“오랜만이야, 잘 있었어?”

“아니, 잘못 있었어.”

“왜, 왜?”

“오빠랑 헤어졌는데, 잘 있었다면 거짓말이지.”

“나 나는 잘 있었는데, 그럼 난 나쁜 놈인가?”

“응, 그동안 오빠가 얼마나 잘 지냈는지 다 알아.”

“무 무슨 소리야? 나는 네 소식을 잘 모르는데, 너는 어떻게 내 소식을 알아?”

“다 아는 수가 있어, 오빠가 뭐 했는지 다음날이면 내 귀에 들어와, 그것도 아주 자세히.”

“그럼 내 소식이 궁금하긴 했구나?”

“아니, 그건 아니야, 절대.”

“그렇게 정색할 것까진 없잖아.”

“아니야, 내가 왜 정색해, 오빠가 괜히 오해할까 봐서 강조한 것뿐이야.”

“알았어, 오해 안 할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코롬방제과점에서 여자도 만나고 무척 잘 지내더구만.”

“내가? 여자를? 언제?”

“지난달에, 왜, 아니야?”

“지난달이면, 아, 채정이?”

“채정이든 누구든 난 상관없어, 오빠가 어떤 여자를 만나든 나는 관심 없으니까.”

“그 그건 김부일이가 그냥 나오라 해서 나간 거야, 채정이가 있는지도 몰랐다고.”

“어디 그뿐이야? 여자랑 소주 마시고, 밤늦게 디스코텍인가 나이클럽인가도 가고.”

“그 여자애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친구들하고 어찌 어울리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래서 볼링장도 가고, 레스토랑도 가고?”

“통화 오래 해도 괜찮아?

“응, 훈희랑 나랑 둘만 있고, 엄마아빠 모두 안 계셔.”

“동생 훈희는?”

“자기 방에 있어.”

“그러면 내가 다 설명할게.”

“오빠변명 듣고 싶어서 전화하라고 한 거 아니야.”

문승협은 채정이와 유은정을 만난 것과 어느 대학에 지원하였는지 일거수일투족 꿰고 있어 깜짝 놀랐다. 당황을 숨기며 해명하려 했으나 기회조차주지 않았다. 오랜만의 통화라 애틋하였지만, 어느 순간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바뀌어버렸다. 정난희가 침묵하는 문승협의 무안함을 풀어주려 다시 입을 열었다.

“연세대학교 썼다며?”

“어떻게 알아?”

“내가 오빠소식 다 안다고 했잖아, 무슨 과야?”

“경제학과.”

“2,3지망은?”

“경영학과 하고 통계학과.”

“합격할 거 같아?”

“잘 모르겠어.”

“그런데 말이야, 오빠대학원서를 어디 쓰는지 어머님이 어떻게 모를 수 있어?”

“아, 최종적으로 어떤 과에 쓸지 모른다는 뜻이야.”

“어느 대학에 지원했는지도 모르시던데?”

문승협은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또 말문이 막혔다. 엄마가 대학원서를 어디에 냈는지도 모른다니 기가 찼다.

“내가 일요일저녁 7시쯤 오빠집에 전화했었는데, 그때 그 시간 서울에서 뭐 했어?”

“일요일?”

“응, 오빠탄생일이잖아.”

“아, 서울친구들하고 종로 연타운에서 만났어.”

“만나서 뭐 했는데?”

“그 그냥 놀았어, 애들이랑 맥주 마시며 이야기하고.”

“어? 말을 더듬는 것이 좀 수상한데?”

“아니야, 술 마셨다고 말하는 게 좀 그래서 그런 거야.”

“아직 졸업도 안 한 고등학생이 술이나 마시고 잘한다, 범생이 도련님께서 타락하셨네?”

“나는 안 마셨어, 아니 술 못 마셔.”

정난희가 전화한 날은 문승협생일이고, 서울명동로얄호텔레스토랑에서 채정이와 식사한 시각이었다.

문승협은 가뜩이나 채정이와 유은정을 만났다는 일로 뾰로통한데, 서울에서 또 채정이와 만난 이야기를 차마 할 수 없었다. 특별한 잘못이 없으면서도 마음한구석이 찔렸다. 화제를 돌릴 겸 전화한 이유를 떠봤다. 혹시나 다시 만나자는 의도는 아닌지 기대했다.

“나를 심문하려고 전화한 건 아닐 테고.”

“그냥 했어, 우리가 헤어지긴 했지만 전화 못할 사이는 아니잖아, 안 그래?”

“그거야 그렇지. 무용은 잘돼?”

“응, 당연하지. 오빠랑 헤어지고 나니까, 심적 부담이 없어서 그런가 너무 잘돼.”

“그럼 다행이다. 근데, 네 말이 되게 섭섭하게 들린다.”

“섭섭할 게 따로 있지, 여자친구가 잘되는데 서운해?”

“여자친구?”

“응, 그냥 과거에 사귀었던 옛날여자친구.”

“난희야, 우 우리 다시 만나면 안 돼?”

“무슨 말이야?”

“나 아직 너 사랑해, 아니,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거야.”

“이제 전화 끓어야겠다, 곧 엄마 올 때 됐어.”

“난희야, 우리 다시 사귀자, 응?”

“오빠 잘 지내, 끓는다.”

“여보세요, 나 난희야 정난희, 여보세요?”

정난희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이불을 뒤집어썼다.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입을 틀어막았다. 여전히 미련을 떨치지 못한 문승협이 가여워 엉엉 울었다. 그동안의 근황을 주변사람들에게 들어와서 알고 있었기에 짠하였다. 이별여파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 아이. 건강까지 나빠져 악전고투한 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있었다며 거짓말을 하다니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사랑을 갈구하는 여린 마음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문승협은 멍하니 전화를 바라봤다. 잠시 연결된 정난희와의 관계가 또다시 단절돼 슬펐다. 바깥대문소리에 수화기를 어쩔 수 없이 내려놓았다. 슬퍼할 틈을 주지 않고 아빠 문경준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응’. 문승협인사에 짧게 답하고 안방으로 직행했다. 시선도 주지 않은 아빠에게 서운하였다. 거의 일주일간 집을 비웠는데도 모르는 건지 의아했다. 가타부타 한마디 없는 아빠행동과 정난희에 대한 그리움이 겹쳐 서러움이 복받쳤다. 눈물을 머금고 방으로 들어갔다.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한 아빠도 그렇고, 무관심한 엄마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박정진부모라면 어땠을까’ 자문하였으나, 비교자체가 불효라는 가책에 그만뒀다. 불현듯 정난희말이 뇌리를 스쳤다. ‘오빠대학원서를 어디 쓰는지 어머님이 어떻게 모를 수 있어?’. 엄마가 묻지 않아 말을 안 했지만, 어찌 됐든 나도 문제라며 반성하였다. 부모가 관심 가져주길 바라기보다 스스로 관심받도록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씻고 와서 이부자리에 누우니 다시 정난희가 떠올랐다. 좀 더 오래 통화할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미련 가득한 조급증에 괜한 말을 해서 전화가 빨리 끊겨버렸다며 후회하였다. 그래도 정난희목소리가 예전처럼 씩씩해서 좋았다. ‘난희에게 좀 더 다정히 할걸 그랬다. 난희가 갑자기 왜 전화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런저런 상념으로 미로를 헤매다 잠들었다.

일주일 만에 등교해서 보는 반친구들이 반가웠다. 대학입학원서를 내러 간 이야기는 끼리끼리 모여 숙덕였다. 반에서 전후기대학진학을 희망한 20여 명 중에 전기대학지원자가 10명 남짓인 데다, 나머지 40여 명은 대학진학을 포기한지라 눈치를 보았다.

점심을 먹고 책거리파티준비에 들어갔다. 3학년담당선생들이 대부분 참석해 뜻깊었다.

다음날 사관학교 최종합격자가 발표되었다. 장기원이 육군사관학교에 붙어 수학여행 때 설악산흔들바위길 돌탑에 빈 소원을 성취했다. 공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도 각각 2명씩 합격하였다. 문승협은 부정맥·재생불량성빈혈·저혈압진단으로 공군사관학교 2차 시험에 응시하지 않아 그다지 아쉬움 없었으나, 2차 시험도 통과한 이민상이 불합격돼 충격받았다. 둘째 누나의 운동권이력이 문제였다. 정부가 연좌제폐지를 공표해 놓고도 공공연히 자행했다. 단순신원조회를 넘어 친족의 이력과 사상까지 검증하였다.

공군사관학교가 영화‘사관과 신사’ 영향으로 유행을 타긴 했지만, 이민상에겐 하늘을 날고 싶어 한 ‘이카로스’의 꿈과 같았다. 밀랍으로 만든 이카로스날개가 태양에 녹아내리듯, 오래전부터 품어온 이민상의 꿈이 연좌제로 추락하였다. 이민상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미노스명령으로 만들어진 미궁에 영원히 갇혀버렸다’며 눈물을 흘렸다. 항상 책가방에 붙이고 다니며 자랑삼았던, 이카로스가 새겨진 그리스공군사관학교마크를 떼버렸다. 문승협은 이민상말이 기억났다. 꿈을 향한 도전이라는 의미로 그리스공군사관학교를 이카로스스쿨이라 부른다고 했었다. 조운대와 함께 찾아가 진심을 다해 위로하였다. 연좌제로 동생의 꿈과 인생을 망친 죄책감에 괴로워할 누나마음을 헤아려보라 조언했다. 이민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성윤도 경찰대학교에 붙었다. 친구들이 사관학교와 경찰대학교 합격자들을 선망하였다. 합격기쁨은 당연하고 졸업과 동시에 미래직업이 어느 정도 정해졌다. 특히 입학해서부터 부모에게 한 푼 도움 없이 모든 의식주비용을 전액 국비로 지원받는 장점이 있었다.

문승협 또한 부러울 따름이었다. 대학에 붙든 떨어지든 고민이 깊었다. 전혀 지원해 줄 의사가 없어 보인 부모태도에 대학학비나 재수학원비를 어찌할지 막막했다. 더욱이 아빠자신만을 위한 과소비와 곗돈사기를 당한 엄마로 인해 가정형편이 어려워졌다. 몇 달 전부터 돈 때문에 부부싸움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런 마당에 용돈은 언감생심이었다.

저녁 늦은 시간 천영기에게 전화가 왔다. 내일 친구들과 만나자며 6시에 ‘폭풍의 언덕’으로 오라고 하였다. 예전 정난희와 갔던 추억의 레스토랑이었다.

이튿날 방과 후 버스를 탔다. 어슴푸레한 차창밖을 바라보며 골똘히 회상했다.


작년 11월 말 그날도, 정난희는 늘 그랬듯 내의사와 상관없이 음식을 주문하였다. 레스토랑이름이 책제목과 똑같다고 하니, 자기가 권한 책을 다 읽었는지 물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꼭 읽고, 테스도 시간 내서 보라 했다. 테스가 야한 책이냔 질문에 다른 남자들과 똑같다며 속물 취급하였다. 한 여자의 불운한 일생에 주안점을 두고 읽으라며 충고했다. 친구들과 도서관에 몰려다닌다고 나무라면서 월말고사성적을 챙겼다. 장학퀴즈학교예선탈락에는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내 생일에 영화를 보자 하고, 칼질해 준 햄버거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어줬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이야기하였다. 맹목적 사랑의 결말은 이별이란 말도 거침없었다. 레스토랑좌석커튼을 풀어 가리더니, 옆자리로 건너와 왼손을 깍지 껴 잡으며 갑자기 입을 맞췄다. 자존심 상해 작아진 내 마음을 풀어주려는 대범함이었다. 무용친구 외 일반친구가 없을 정도로 무용에서만큼은 주관이 뚜렷했다. 무용을 수호하는 남자친구가 되겠단 말에 감격해 줬다. 일방적으로 사귀는 조건들을 제시하며 강요도 서슴지 않았다. 무용하는 여자의 연애가 왜 힘겨운지 진리와 학설까지 동원하였다. 나를 남자친구로 선택한 이유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항상 자신을 바라봐주고,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며, 어떤 행동을 해도 이해해 줄 거라는 확신을 느꼈다고 했다. 사랑에 빠진 무용수는 무용을 등한시한다며 항상 절제를 택하였다. 많은 교감을 갈망하는 나를 주도적으로 통제했다. 무용연습 중 불현듯 내가 떠올라서 혼란스러워한 인간적 면모를 갖춘 18세 꽃다운 소녀였다. 무용하다 마음대로 안되거나 힘들면 투정 부리고 의지하고 싶으면서도,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다잡았다. 또래여자애들처럼 남자친구가 보고 싶고 함께 놀고 싶은데 무용을 해야 해서 무용이 싫어지는, 그래서 남자친구 때문에 무용을 망각하게 한 잡념들로 번민하였다. 무용시간 사이에 자투리시간을 이용해서라도 나를 보려 애썼다고 했다. 돈맥클린의 Vincent를 들으며, 고흐그림의 별이 빛나는 밤을 이야기하였다. 별을 바라보는 시선도 감성적인 나와 달리 현실적이었다. 언제나 논쟁이 있을라치면 정난희정리로 마무리됐다. 나는 원론을 훈계하듯 한 언변에 눌려서 하고픈 말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난희의 뚜렷한 주관과 독선적 행동에 갈등이 반복됐었다.


문승협은 버스에서 내려 걷다 석가모니처럼 깨달았다.

‘맞아, 나는 사귀면서 만족스럽지 않아 무척 서운했는데, 정난희입장에선 최선의 노력이었어. 그것이 정난희가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하는 이유이자 사랑이었던 거야. 그래, 그러면서도 무용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여자가 바로 정난희지. 지적호기심과 지적욕망이 강하고,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함의 매력을 지닌 내 여자친구였는데, 이젠 내 곁을 떠나버려서 더 잘하고 싶어도 어찌할 수 없구나. 나는 월남 이상재선생님의 유시유종하란 말씀을 잘 지키고 있는 건가 아닌 건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1년 전과 달리 오늘은 정난희가 곁에 없어 허전하였다. 무의식 중에 웅얼거렸다. ‘Starry starry night~’. 레스토랑계단을 오르다 벽에 붙은 아르바이트생모집공고를 봤다. 지난번 친구들과 놀면서 유흥비부족에 돈이 필요함을 느꼈었다. 용돈 좀 달랬다가 엄마에게 야단맞은 일도 생각났다. 대학학비나 혹시 재수하면 학원비 때문에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 고민해선지, 관심 있는 곳에 눈길이 갔다.

레스토랑문을 열자 잔잔한 클래식음악이 흘렀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유은정과 마주쳤다.

“어이 문승협씨, 오랜만이요.”

“오매 유은정씨 아니오, 아따 여그서 다 만나네요잉.”

“음마, 서울 다녀오드만 꺼꾸로 사투리가 늘어부렀소?”

“하하, 애들은?”

유은정이 자리로 앞장섰다. 천영기와 백미정, 이담과 한현진 커플이 와있었다. 자연스레 문승협과 유은정은 마주 보고 앉았다. 각자 대입원서를 쓰러 다녀온 후 만남이라, 반갑게 서로 잘 있었는지 안부를 물었다. 백미정이 눈치를 살피며 케이크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문승협의 귀빠진 날을 기념하자며 촛불을 붙였다. 친구들이 나지막이 축하노래를 불렀다. 문승협은 뜻밖인 데다 집에서도 넘어간 생일이라 뭉클했다.

“언능 소원 빌고 촛불 꺼. 식사는 폴쎄 주문했다잉.”

“후, 후. 며칠 전에 서울친구들하고 했는데, 또 하려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다야.”

“음마, 서울친구들은 사람이고 우리는 동네 강아지여?”

“아니,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쑥스러워서 그러지.”

“그라믄 그냥 고맙다고 해, 쓰잘데기없는 소리 말고.”

“그래, 다들 고맙다.”

“승협아, 이거. 울 아부지회사서 취급한 제품인디, 내가 가 갖고 몰래 하나 쌔벼왔어.”

“어? 아디다스신발이잖아?”

“아디다스가 뭐여, 난 처음 보는 메이커인디?”

“요즘 새로 나온 수입브랜드인데, 엄청 인기 있더라.”

“근디, 은정이가 승협이 신발문수를 으째 아까?”

“저번에 느그랑 같이 볼링 칠 때 알았제.”

“은정아, 나도 한 켤레 어뜨크롬 안되까?”

“알았어, 니 생일에 한 켤레 쌔벼오께.”

“이 케익은 미정이하고 현진이가 보태서 샀고, 담이랑 내가 오늘 저녁 사께.”

“아니야, 나 돈 좀 있어, 내가 살게.”

“니 생일인께 넣어둬. 근디, 그 지갑 처음 본다?”

“서울 다녀오드만 지갑도 쌔삥까로 바뀌었다잉.”

“비싼 거 같은디? 선물 받았냐?”

“그 정도 안목이믄, 분명 여자가 준건디?”

“하하, 그럼 2차는 내가 살게.”

유은정이 지갑을 보고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문승협은 채정이에게 받은 생일선물이라 선뜻 대답을 못했다. 궁지에 몰리기 전에 황급히 2차 약속으로 화제를 돌렸다. 마침 천영기가 상자를 이담에게 건넸다. 황갈색소가죽혁대와 손바닥 반만 한 버클이었다. 이담이 착용한 벨트를 풀고 교체하니, 여자아이들이 청바지와 잘 어울린다며 호응하였다. 자기들은 뭐 없냐며 뾰로통했다. 문승협이 웃으며 포장된 동전지갑을 들어 보였다. 여자아이들이 풀어보고 너무 예쁘다며 좋아하였다. 천영기가 문승협과 이태원에서 사 왔다며 우쭐댔다.

종업원이 주문한 식사를 가져오자, 다들 서울기념선물을 집어넣었다. 문승협은 무심코 서빙하는 종업원을 살펴봤다. 생일서비스라며 샴페인을 흔들어 소리 나게 따서 한잔씩 따라주었다. 다들 이담의 건배제의에 잔을 부딪쳤다. 늦게나마 축하한다며 한 모금씩 마셨다. 한현진이 새콤달콤 샴페인맛을 품평했다.

천영기가 돈가스를 썰어 먹으며 6박 7일간 서울유람기를 시작하였다. 이태원구경거리들을 영웅담처럼 늘어놓았다. 친구들은 선물 받은 게 있어서 귀 기울였다. 문승협은 같이 다녀온 죄로 잠자코 들었다. 천영기가 백미정 때문에 우산속나이트클럽방문기를 쏙 뺐으나, 송골매공연을 봤다며 자랑하다 고비를 맞았다. ‘세상에 비밀은 없고, 거짓말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역시 격언은 명언이요 진리였다. 문승협이 천영기를 구출하려고 이담과 한현진에게 질문했다.

“참, 너희들 그날 왜 그랬어?”

“언제야?”

“10여 일전 학력고사성적발표날, 너희 따라 볼링치고 레스토랑에 갔었잖아. 그때 왜 은정이랑 나를 남겨두고 너희 둘만 쏙 빠져나갔냐고?”

한현진이 고개 숙이며 빙긋 웃었다. 문승협이 모른척하는 한현진과 이담을 번갈아 보았다. 당시 누가 어떻게 알고 레스토랑에 전화하였는지, 무슨 급한 일이었길래 말도 없이 갔는지 다시 따졌다. 백미정이 천영기이야기에서 벗어나 한현진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한현진이 이담과 비밀리 계획해서 유은정과 문승협의 데이트를 주선한 거라며 이실직고했다. 문승협은 무안할 한현진을 배려해 더 이상 타박하지 않았다. 덕분에 유은정아빠를 만나 좋은 친구로 인사드린 행운을 누렸다며 매듭지었다. 위기를 넘긴 천영기가 윙크하였다. 문승협도 무언의 눈짓을 보냈다. 종로연타운에서 채정이와 만난 일을 절대 말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각자 대학원서 쓰러 다녀온 경험을 나누다 크리스마스로 화제가 돌아갔다. 백미정이 크리스마스이브에 뭉치자고 했다. 한현진이 부모님 출타로 집이 빌 예정이라며 동조하였다. 유은정과 남자들도 적극 반겼다.

천영기가 2차 가자며 일어섰다. 모두 소지품을 챙겨 나와 길거리서 어디 갈지 의논했다.

문승협이 레스토랑에 볼일이 있다며 다시 올라갔다. 유은정이 무슨 일인가 싶어 어물쩍 뒤따랐다. 문승협은 프런트에 아르바이트모집을 문의하였다. 사장이 있는 내일 3시쯤 면접 보러 오라고 했다. 돌아 서는데 유은정이 있어 뻘쭘하였지만 무시하고 내려갔다.

한현진을 중심으로 넷이 숙덕거리다 문승협과 유은정 등장에 화들짝 놀랐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아니, 이것들이 서울 갔다 오드만 담배를 피운다야? 으짜믄 조으까잉.”

“나는 서울도 안 갔는디 뭔 소리여, 그냥 영기 따라서 한번 피워본 거란께.”

“야, 어른흉내 내지 말고 빨리 꺼.”

“느그가 언제부터 담배 피웠다고 그라냐, 째깐 한 것들이 아조 잘하는 짓이다.”

“아까 오다가 한번 피워볼라고 산거여, 담배 한 까치 피웠다고 지랄들 해쌌네.”

“아야, 피울라믄 당당하게 피워야제, 사내시끼들이 골목서 그게 뭔 꼬라지여?”

“알았다 알았어, 가자.”

“어디로 가는데?”

“아, 그냥 찢어지기로 했어.”

“왜, 2차 간다고 했잖아?”

“가시나들이 피곤하다고 집에 가잔다야.”

“그래, 나도 쪼까 글타. 오늘은 여그서 째지고, 2차는 크리스마스이브에 하자.”

“그라믄 담주 토요일에 만나자, 우리 먼저 가께.”

“그라자 그라믄, 우리도 갈란다.”

천영기커플에 이어 이담커플도 가버렸다. 문승협과 유은정만 덩그러니 남았다. 문승협은 뜬금없는 상황에 어찔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유은정이 잠시 지켜보다 다음 주에 보자며 걸음을 옮겼다. 문승협이 바래다주겠다면서 따라잡았다.

먼저 흩어진 커플들은 가는 척하다 근처골목에 숨어서 두 사람의 동태를 살폈다. 유은정을 쫓아가는 문승협을 보고 소리 죽여 쾌재를 불렀다. 레스토랑에 둘이 올라간 동안, 이담과 한현진제안으로 둘만의 시간을 주기로 했었다. 넷이 둘을 보고 혼비백산한 것도, 담배가 아니라 작당모의를 들킨 줄로 알았다.

문승협과 유은정은 정류소로 갔고, 10분쯤 후 버스를 탔다. 버스가 코롬방제과점을 지나 목포극장으로 갔다. 차창 밖에 짝지어 걸어가는 친구들이 눈에 띄었다. 문승협이 한마디 해주려 창문을 여는 찰나, 유은정이 말렸다. 문승협은 어이없는 놈들이라며 웃었다. 조금 전 상황을 돌이켜봤다. 갑자기 여자들이 동시에 피곤할 리 만무한 데다, 2차 생일턱을 크리스마스이브로 미뤄 미심쩍었었다. 계략을 꾸민 줄도 모르고, 친구커플들이 가버린 바람에 얼떨떨하였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유은정이 친구들 수작을 모른척하자며 왜 아르바이트를 하려는지 물었다. 문승협은 대학합격자발표까지 남는 게 시간이라고 했다. 돈을 모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자니 구차하고, 왜라는 질문이 반복될게 뻔해서였다. 더구나 친구커플들 의도와 달리 유은정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예전 홍지아와 또 달랐으나,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비슷하였다.

“근디 으째 우리 집 전화번호는 안 물어보냐, 내가 사귀자고 생각할까 비 부담돼서?”

“부담은 무슨,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야.”

“으째 나한테 아무 생각이 없으까?”

“서로 편한 게 좋잖아, 안 그래?”

“내가 조까 안 편하게 하믄 으짤건디?”

“그 글쎄, 생각 안 해봐서 잘 모르겠다.”

“그라믄 지금부터 한번 해보끄나?”

“뭘?”

“내가 여자로서 벨로 매력이 없냐?”

“아 아냐, 그런 거.”

“호호, 뭘 그리 놀라냐? 심심한께 해본 말이어.”

“너 혹시, 마음 상했어?”

“아니, 니가 편하믄 나도 편한 게 좋아, 서로 신경 쓰덜 말고 지금멩키로 지내자.”

“은정아, 말 나온 김에 너희 집 전화번호 알려줘.”

“싫어, 버스 지나간 지 오래여.”

“화났어?”

“아니, 내가 알려주고 자플 때 알려줄라고.”

“와, 이제 알았다, 전화번호 알려달라 했다가 거절당하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유은정이 버스에서 내리며 싱긋 웃었다. 집에 들어가면서도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계속 표정을 살핀 문승협시선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문승협은 집에 들어와 내일 아르바이트면접을 생각했다. 아르바이트뜻이 궁금해 백과사전을 펼쳤다. ‘독일어 Arbiet, 노동. 제2차 세계대전직후 경제적 어려움에 휴학한 대학생들이 많았다. 독일 정부와 대학이 학생들에게 부업자리를 소개해주면서 정착됐다.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시간단위근무란 의미를 얻어 들어왔다. 경제가 발전하던 1970년대부터 시간제근무개념이 생기면서 대중적 일상용어로 자리 잡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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