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61)
11월 1일부터 전국동사무소에서 새로운 주민등록증발급을 개시하였다. 문교부가 신설예정 53개 고교에 남녀공학을 권장했다. 영화‘부시맨’이 느닷없이 입소문을 탔다. 원제목이 의외였다. ‘The Gods Must Be Crazy, 신은 미친 것이 틀림없다’. 실제 부시맨족‘니카우’가 주연이었다. 1981년 스위스국제영화제코미디부문그랑프리와 노르웨이국제영화제, 1982년 프랑스셩후쓰그랑프리 등 여러 영화상을 받았다.
어느 날 조종사가 칼라하리사막 부시맨족 마을 위를 비행하다 빈콜라병을 버린다. 부시맨들이 난생처음 본 콜라병을 신의 물건으로 받들면서 분쟁이 발생한다. 주인공부시맨‘자이’가 마을의 평화를 깨트린 콜라병을 신께 돌려주려 길을 떠난다. 세상 끝까지 가는 길에서 백인 동물학자와 기자를 만나며, 아프리카 정부군과 반군의 충돌 등 이런저런 소동을 겪는다. 마침내 빅토리아폭포에 도착하고, 장대한 광경에 세상의 끝이라 확신한다. 콜라병을 폭포 속에 던지며 긴 여정을 끝맺는다.
해학적 슬랩스틱코미디가 재미있었다. 순수한 부시맨자이눈을 통해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현대문명인들을 풍자적으로 잘 풀어냈다. 자칫 부시맨족을 문명도 모르는 이들이라고 희화화할 염려가 있었다. 결말로 보아 후속작이 나올 가능성이 분명하였다.
버마정부가 아웅산묘소폭탄테러사건을 계기로 북한과 단교했다. 많은 국가들이 줄줄이 외교중단을 선언하였다. 남북한이 제3세계를 대상으로 외교전쟁 중이었다. 상대국과 단교하고 자기들과 수교를 요구하며, 소리 없는 공방전을 벌였다. 국제사회서 외교적 정통성과 국격을 인정받기 위해 선물공세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전두환정권의 ‘늑대사냥작전’이 빛을 냈다. 외교 전에서 우위를 점하려 제3세계국가들과 북한을 단절시켰다. 숨 가쁜 국제정세에 미국과 보조를 맞추며, 북한을 세계무대서 고립시키려고 치열히 전개하였다.
대입학력고사가 불과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모든 사설독서실이 고3수험생들로 만원이었다. 문승협은 동생하소연덕택에 엄마에게 지원받은 돈으로 끊었던 독서실월권이 끝났다. 자리가 있는 곳을 찾아 반일권 또는 시간권을 끊어 전전했다. 그나마 남국민학교 주변 사설독서실이 자리가 많은 편이었다. 빼빼로삼총사는 거의 매일같이 시간을 정해놓고 만났다. 주로 독서실이 여러 개 모여있는 근처놀이터였다. 평일은 이담이 방과 후에 독서실을 맡아두거나 이용권을 끊어뒀다. 학교가 가까워 선점할 수 있었다. 주말은 먼저 도착한 사람이 독서실상황을 알아보았다.
“어서 오니라.”
“일찍왔다잉.”
“독서실은 알아봤어?”
“잉, 쩌그 정숙독서실로 했어. 으나, 좌석표 받어.”
“독서실비 대신에 이따가 점심사께?”
“그럼 내가 저녁 살까?”
“느그 맘대로 하쑈, 나는 이득인께.”
“참, 주민등록증 새로 나온 거 봤냐?”
“아직. 으짜디?”
“지금 거보다는 좋아 보이더라.”
“아야, 우리도 새로 나온 주민증으로 바꿔야 하까?”
“당연하제, 안 바꾸믄 간첩으로 몰린다잉.”
“잘됐그만, 사진이 꼭 부시맨 같았는디.”
“하하, 너 그 영화 봤냐?”
“잉, 어제 미정이하고 봤어.”
“영화는 으짜디, 재밌디?”
“난 그냥 그렇드만, 다들 재밌다고 해쌌트라.”
독서실에 들어가 자리 잡았다. 이담과 천영기가 문승협좌우에 앉았다. 각자 공부할 문제집을 꺼내 펼쳤다. 얼마 남지 않은 대입시험공부에 열중하였다.
10분도 채 안되어 고질적인 두통이 문승협을 또 괴롭혔다. 고통과 문제집 사이에서 20분가량 사투를 벌이다 책상에 엎드렸다. 금세 스르르 눈이 감겼다.
“아야, 승협아, 승협아 일어나야.”
“아, 깜박 졸았네, 몇 시야?”
“12시, 점심때여.”
“벌써?”
“잉, 언능 인나, 밥 묵으러 가게.”
“그래, 가자.”
“니는 앉자마자 엎어지드만, 두 시간 넘게 퍼질러 자믄 으짤라고 그라냐?”
“어제 잠 못 잤냐?”
“야, 대입시험이 2주밖에 안 남았데, 잠을 잘 자는 사람이 이상한 거 아니야?”
“시험이 코앞인디, 독서실서 자는 놈은 또 뭐다냐?”
“하하, 그러네.”
“근디, 니는 자믄서 뭔 신음을 하드라잉?”
“신음?”
“흐느끼는 울음소린가?”
“꿈꿨나 보네.”
“무신 꿈인디?”
“몰라, 기억 안 나.”
문승협은 설명하기 곤란해 슬쩍 넘겼으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른 악몽이었다.
5살 전후 말귀를 알아들을 즈음부터 지금까지, 15년간 반복된 일상들이 꿈에 나타났다. 꿈속 사건들 하나하나가 현실 같고, 등장인물도 셀 수 없었다. 아버지형제자매를 포함한 직계가족들, 큰집할아버지 종갓집식구들, 진외가증조할머니 진외갓집사람들, 외할머니와 이모외삼촌들, 하물며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가 비슷한 말을 했다. 명절이든 평소 때든, 친척집이든 어디를 가든, 때와 장소 구분 없이 매번 속삭였다. 그들은 가볍게 던진 한마디지만, 문승협에게는 무거운 수천수만 마디로 들렸다. ‘니는 오빠여. 니는 장남인께. 니는 장손이어. 느그 부모는 으째 늘 그 모양이까? 느그 할미랑 엄씨는 으째 맨날 서로 욕하고 싸운다냐? 느그 할비랑 압씨는 으째 근대? 니는 느그 압씨할비멩키로 그러지 마라잉?’. 어린아이가슴에 대못을 박는 똑같은 주제였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무 말 없이 보듬어준 유일한 어른이 외할머니 윤주순이었다. 따뜻한 외할머니품을 항상 그리워하는 이유였다. 놀라운 점은 문승협의 태도와 표정이었다. 어른들의 당부와 다그침을 한마디 빼놓지 않고 묵묵히 들었다. 꼬박꼬박 고개를 끄덕이거나 알겠습니다며 수긍하였다. 무표정이었으나 절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꿈에서 깬 문승협 스스로도 소름 끼쳤다. 이제껏 유사한 악몽들을 수없이 꾸어왔고, 그때마다 지옥을 맛보았다.
점심을 먹은 후, 이담과 천영기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문승협은 독서실에 돌아와 책을 폈다. 두통과 어지럼증을 견뎌내며 공부에 집중했다.
천영기와 이담 커플들이 저녁시간에 맞춰 문승협을 찾아왔다.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주문하였다.
“이거 별거 아닌디, 하나씩 받어.”
“뭔디야?”
“모찌떡이어, 느그 시험 잘 보라고.”
“현진아, 고마워.”
“대입시험날짜가 아직 남았는디, 언제 또 만날란가 모른께 오늘 챙겨 왔어.”
“이거 코롬방제과점에서 산 거지야, 나 거그서 봤어.”
“잉, 맞어.”
“나도 느그들 줄라고 엿이랑 샀는디, 나중에 주께.”
“미정아, 니는 돈이 쌔고 쌘는갑다잉. 나만 주믄 돼, 뭐 할라고 저놈들까지 챙기냐?”
“연설하네, 니도 지금 현진이한테 받았잖애?”
“너희도 수험생인데, 우리만 받아서 미안한데?”
“아야 승협아, 니는 신경 꺼부러, 우리 가시나들은 우리가 알아서 챙길란께.”
문승협은 불쑥 떠오른 정난희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락 없이 부지불식간 들이닥쳐 괴로웠다.
백미정과 한현진이 식사를 마치고 근처 여성전용독서실에 간다며 일어났다. 천영기와 이담이 바래다주러 따라나섰다. 문승협은 계산하고 독서실로 향했다. 시험공부에 몰입해야 한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밤 11시쯤 가까워 지자, 천영기가 바람 쐬러 나가자고 하였다. 문승협은 두통과 피로, 정신 집중과 산만 사이를 오가던 터라 얼른 뒤따랐다. 천영기가 놀이터벤치에 앉아서 한현진에게 받은 모찌떡포장을 뜯었다. 이담과 문승협에게 먹으라며 하나씩 건넸다.
“아따 맛있다잉?”
“긍께, 쫄깃하고 달달하다야.”
“역시, 코롬방제과 거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야.”
“느그 진짜 쫄깃하고 달달한 거 한번 보여주까?”
“그것이 뭔디야?”
“쩌그 심야다방에 가믄 있어, 으째, 갈래?”
“뭔디, 먹는 거여?”
“먹는 건 먹는 건디, 입이 아니라 눈으로 먹는 거여.”
“염병, 뭔디 그래, 언능 말해보란께?”
“포르노영화.”
“뭐? 포르노?”
“진짜 거그서 포르노비디오를 틀어준다고?”
“잉, 내가 몇 번 가봤잖애. 갈래?”
“가자, 한번 가보자.”
“뭣이어, 승협아, 니 으째 그냐?”
“왜, 내가 뭐 어때서, 가보자니까?”
문승협이 벌떡 일어나 입가에 묻은 모찌떡 하얀 가루를 털어냈다. 천영기와 이담이 오히려 당황했다. 천영기가 설마 싶어 재차 확인하였다. 문승협이 이담에게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먼저 움직였다.
천영기는 앞서가면서 문승협에게 정말 갈 것인지 몇 번을 물었다. 이담도 심야다방에 다다를 때까지 시간낭비 말고 돌아가자며 내심을 계속 떠보았다. 문승협은 단호한 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승협이랑 나랑 오늘 처음인디, 해필 경찰이나 꼰대한테 걸리믄 뭔 우세까?”
“담이야, 겁나냐?”
“니는 겁 안 나냐?”
“나도 겁나, 근데, 한번 가보고 싶어.”
“승협이 니 아조 겁을 상실해부렀다잉?”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까짓것 걸리면 걸리는 거지 뭐, 죽기야 하겠어?”
“시끼들 쫄기는, 다 방법이 있는께 걱정 붙들어 매, 단속 나오믄 미리 연락 와서 암시랑 안 해.”
문승협은 호기심에 마약중독으로 이어진다는 경고문구를 철석같이 믿었다. 자라오면서 단 한 번의 일탈도 자신에게 용납하지 않았다. 조금의 유혹조차 용인하지 않을 만큼 누구보다 준법정신이 투철하였다. 천영기는 그러한 문승협을 현혹시켰다기엔 납득되지 않았다. 문승협내면에서 변화하려는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음을 직감했다. 문승협과 이담의 최초탈선이 포르노에 대한 궁금함 반, 단속에 걸릴까 두려움 반으로 시작되었다. 앞날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도 못하였다.
아웅산묘소테러사건으로 일시 중단됐던 심야다방영업이 한 달 만에 재개했다. 천영기가 앞장서 다방문을 열었다. 덩치 큰 사내가 몇 명이냐며 손을 내밀었다. 천영기가 1,000원짜리 세 장과 신분증을 건넸다. 사내가 신분증은 거들떠보지 않고 돈을 확인하며 비켜섰다. 다방레지가 쪼르르 다가와 천영기팔을 끼고 안쪽구석자리로 안내하였다. 정상영업땐 자리공간이 여유 있었지만, 의자와 소파들을 바짝 붙여놔서 겨우 지나갈 수 있었다. 최대한 좌석수를 늘려 심야손님을 한 명이라도 더 받으려는 심산이었다. 미스리가 문승협을 아는척하며 싱긋 웃었다. 문승협은 부끄럽고 낯선 분위기에 외면했다. 몇 번 와봤다는 천영기에게 물었다.
“여기 입장료가 1,000원이야?”
“잉, 기본요금 500원에 비디오 보는 값 500원 추가.”
“아까 저기 기도한테 내민 신분증은 뭐야?”
“아, 염기형이 형의 학생증이어.”
“사진이 붙어 있던데?”
“사진은 보도 안 해, 그냥 시늉으로 하는 거여.”
“남의 학생증인지 알면서도 모른척한다고?”
“잉, 여그서는 다반사여, 다 그렇게 해.”
“경찰이 단속 나오믄 으짜고야?”
“단속하믄 미리 알려준께 괜찮해, 연락 오는 날은 비디오 안 틀어,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여.”
“그나저나, 오늘 진짜로 고2 때 염기형이랑 윤공규가 말한 성인비디오를 보는 거여?”
“잉, 으째, 흥분되냐?”
옆사람이 들을까 봐 소곤거리는데, 미스리가 쟁반에 요구르트와 삶은 계란을 가져왔다. 문승협옆자리에 엉덩이를 들이밀며 앉더니 하나씩 내려놓았다.
“아니, 우리 샌님이 이런 야심한 시간에 으짠 일이까?”
“왜요, 나는 비디오 보러 오면 안 돼요?”
“안되다고는 안 했는디, 쪼깐 놀랐은께 그라제.”
“나도 그런 거 볼 수 있는 나이잖아요.”
“호호, 그런 것이 뭔디?”
“뭐긴 뭐예요, 포르노지.”
“포르노를 본 적은 있고?”
“안 봤으니까, 오늘 보러 온 거라고요.”
“보다가 쏠리믄 으짤라고? 나랑 실습 한번 하까?”
“못할 것도 없죠.”
“왐마, 인자 진짜로 남자가 돼부렀다잉?”
“근데, 혹시 단속 나오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저그 비상구등 보이제, 거그로 빠져나가믄 돼야.”
문승협이 말을 돌릴 겸 걱정돼서 물었다. 미스리가 알려주며 앙큼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문승협은 지레 찔려 고개를 돌렸다. 이담도 덩달아 불안해하였다.
“근디, 단속에 걸리믄 으짠다우?”
“거의 없는디, 만약에 걸리믄 벤허를 봤다고 해.”
“그 찰턴헤스턴이 나온 명화 벤허요?”
“잉, 혹시 몰라갖고 저그다가 따로 준비해 뒀어.”
“심야영업은 몇 시까지 해요?”
“저녁 12시부터 아침 여섯 시까지. 4편 정도 틀어줄 건디, 비디오상영 중엔 못 나간다잉.”
“이 시간에는 으짠 사람들이 여그에 오요?”
“각양각색이제, 먼디서 왔다가 배나 기차를 놓친 사람도 있고, 다 말하자믄 입 아퍼.”
“여인숙에 가서 편히 자제, 뭐 한디 이리 오까?”
“돈이 없은께 그라제.”
“하기사, 돈이 없으믄 그럴 수도 있겄네.”
“아침 일찍 섬이나 도시에 갈라는 사람도 있고.”
“아, 그란께 목포역하고 여객터미널근방에 심야다방이 많은갑네, 맛지라우?”
“잉, 느그들멩키로 호기심에 왔다가 포르노에 중독된 사람들도 쪼까 있고.”
“중독이요?”
“그람, 절제 안 하믄 중독되부러. 나는 12시 반쯤 퇴근한께, 필요한 거 있으믄 불러.”
미스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막 들어온 손님을 맞으러 쪼르르 달려갔다. 12시에 가까워지자 빈자리 없이 가득 찼다. 술 취해 자는 사람, 쌍화차를 후후 불어 마시는 사람, 테이블 위 띠운세재떨이에 동전을 넣는 사람, 무슨 걱정이 있는지 시계만 보며 연신 한숨짓는 사람, 행색행태도 다양하였다.
12시에 실내등이 꺼졌다. 주방조명등 하나만 남겼다. 빛이 밖으로 새나가는지 일일이 커튼을 확인하며 철저히 외부와 차단했다. 다방문도 굳게 잠겼다. 입구에서 돈을 받았던 남자가 주방 어디쯤에선가 비디오테이프 두 개를 꺼내왔다. 다방양쪽에 설치된 비디오기기에 넣고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두대의 금성사골드스타 20인치 칼라 TV에서 시그널이 떴다. 도둑맞을까 싶어 시건장치가 돼있었다. 밖에 들릴까 봐 소리를 최대한 줄였다. 영상과 내레이션이 나왔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마마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지만,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불법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주방등이 꺼지고 비상구등만 흐릿하였다. 어둑한 다방에서 초롱초롱 빛나는 수많은 눈동자들이 TV를 향해 끔벅였다. 드디어 심야다방 포르노비디오상영이 개시되었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강간당하는 외국포르노였다. 연인인지 부부인지 자동차여행 중에 우연히 불량배들을 마주쳤다. 여자는 성폭행충격으로 죽고, 겨우 살아남은 남자가 복수에 나섰다. 그냥 죽이는 정도의 보복이 아니라, 불량배들의 연인이나 가족과 강제로 성관계를 하고 살해했다. 모든 장면이 모자이크처리 없이 있는 그대로 노출되어 잔인하였다.
다들 관심법에 신기를 가진듯했다. 자막 없이도 포르노배우들 표정만으로 이해하였다. 효과음이 필요한 장면에서 음량을 올려달라는 요구가 잇따랐다. 노골적 성행위와 신음소리에 꼴딱꼴딱 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부풀어 오른 바지 앞섬을 잡고 화장실을 오가면서도 창피하거나 부끄러움이 없었다. 누군가 산만해서 집중이 안된다며 화장실 좀 그만 가라고 했다. 순간 웃음이 빵 터졌다.
문승협은 포르노비디오를 보면서 죄책감이 들었다. 마치 범죄를 저지른 기분이었다. 첫 편이 끝나자 속이 울렁거려 그만 나가자고 채근하였다. 천영기가 한편만 더 보자며 버텼으나, 이담도 가자고 동조해서 일어났다. 문승협이 선뜻 다방문으로 갔다. 덩치 큰 기도가 문 열고 닫기 귀찮단 표정으로 째려보았다. 순한 인상에도 목쪽문신이 살짝 보여 위압감을 주었다.
“와, 밖에 나오니까 좀 살겠다.”
“뭔 담배를 그리 피워대는지, 죽는 줄 알았다잉.”
“그러게, 진짜 오소리소굴이 따로 없더라.”
“이참에 우리도 담배 한번 배워 보끄나?”
“지랄, 왜, 술도 먹자고 하지 그러냐?”
“그라까?”
“주여, 타락해 가는 우리를 용서해주쑈.”
“허허허, 염병 그만 떨고, 오늘 포르노를 처음 본 감상이 으짠지 을퍼나 보셔들.”
“뭐라 해야 쓰까, 더럽단 생각이 든디 가슴이 막 뛰어.”
“나는 그런 강간이나 성행위를 처음 봐서 충격 먹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어, 다 연출이란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버젓이 성행위를, 그것도 성기를 다 보여주면서.”
“포르노를 영화라고 할 수 있으까?”
“그걸 만든 제작자들 주장일 뿐이야, 일반사람들이 거부감 갖지 않게 하려고.”
“좀 솔직해져라, 느그도 한번 그렇게 해보고 싶잖애?”
“아니 아니어, 우린 인정 못하제. 성은 신성한 것이라고 했어, 그것은 범죄여 범죄.”
“대체 왜 그런 포르노를 만드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누군가 본께, 누군가 찾은께, 그라고 돈이 된께.”
“와따 씨 열불 나네잉, 아까 그 섞을 노무 장면들이 으째서 자꾸 어른거린다냐?”
“봐라 봐, 성은 본능이란께?”
“야, 그런 동물적 본능을 다스려야 인간이야.”
“아무튼, 느그는 운 좋은 줄이나 알아라.”
“아니, 거그에 뭔 운까지 있대?”
“오늘멩키로 내용이 있는 포르노는 재미난디, 성행위만 줄창 나온 거는 재미없어.”
“뭐여, 포르노도 장르가 있어?”
“나는 지금 생각해도 웃긴 게 하나 있어.”
“뭔디?”
“한글자막도 안 나오고 TV음량을 완전히 줄였는데도, 다들 내용을 아는 눈치더라?”
“입모양만 보고도 아는 독화술이 있는 갑제.”
“영어대사라서 영어로 말하는 입모양을 알아야 할 텐데, 다들 그렇게 영어를 잘한다고?”
“이런 촌노무시끼들을 봤나, 동물적이고 원초적인 예술에는 굳이 언어가 필요 없단께.”
“영기 니는 포르노에 통달한 도사 같다잉?”
“음, 도사는 아니고 박사, 아니 석사쯤 되까?”
“그 포르노석사 딸라고, 돈 무자게 들어서 좋겄다.”
“아야, 근디 느그 봤냐?”
“뭘?”
“우리 뒤 뒤에 가시나도 있드라?”
새벽 두 시가 넘어가는 시각, 셋은 어둠을 헤치고 걸어가며 포르노관람소감을 나눴다. 문승협은 비행청소년이 된 것 같으면서도 뭔지 모를 해방감을 느꼈다. 성적쾌감이 아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함이었다. 쾌감을 쫓다 신세망친단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담이 말한 섞을 놈의 장면들이 불쑥불쑥 떠올라 허탈했다.
“여보시게 숫총각들, 느그 화장실에 가 갖고 상상하믄서 딸딸이 치지 마라잉?”
“염병, 너나 그 짓거리하지 마.”
“허허허, 내가 느그들 화장실에 갈 때마다 쫓아가서 몰래 지켜볼라니까, 알았냐?”
“와따, 오늘 독서실화장실이 만원이겄다.”
“인자 싹 다 잊어 불고, 시험공부나 열심히 하란 말이어, 이 순진무구한 놈들아.”
“지랄도 병이여, 그러코롬 걱정해 주는 놈이 그런델 데꼬 가냐, 이 오살할 놈아?”
문승협과 이담은 서울친구들에게 여자 꼬시는 방법과 장소들을 들어보긴 하였다. 폰팅·락카페·나이트클럽이 등장했으나, 세상 한복판서 난잡한 포르노가 버젓이 상영될 줄은 전혀 몰랐다. 별천지에 다녀온 것 같았다. 각기 다른 원인의 비슷한 스트레스가 세 사람 가슴에 응어리져있었다. 대입시험공부압박과 가정에서 쌓인 울분을 잠시 잠깐 해소하기엔 딱이었다.
역시 나쁜 짓은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문승협과 이담은 다음날도 천영기꼬임에 넘어가 또 심야다방을 찾았다. 천영기가 말한 성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포르노를 봤다. 어제처럼 한편만 보고 나왔다.
“으째, 내 말이 맞제?”
“잉, 어제 거는 그래도 내용이 있은께 볼만하던디, 오늘 거는 영 벨로드라.”
“나는 계속 성행위하는 장면을 보다가 토할뻔했어.”
“미스리말이 일리가 있어, 포르노에도 중독된다드만, 진짜 그럴 수 있겄드란께.”
“그러게 말이야, 중독을 경고하면서 왜 도박마약섹스를 언급하는지 알겠어.”
섹스는 타락과 친밀하였다. 도박과 마약처럼 학생들을 현혹하기에 충분했다. 주변자취생들이 술과 섹스로 나락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문승협 또한 대입학력고사와 포르노 사이에서 내적갈등하였다. 온통 달콤한 유혹뿐인 세상으로 느껴졌다. 탈선과 입시공부의 경계선을 아슬아슬 줄타기했다. 제우스막내아들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움켜쥘지, 머리카락이 없는 뒤통수를 잡으려다 놓칠지 기로였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눈앞에 다가온 대입학력고사를 잘 치러 인생기회를 잡을지, 수렁에 빠져 인생쓴맛을 볼지 갈림길이었다. 기회의 신 카이로스가 이미 스쳐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복된 가정불화로 우울감에 허덕였고, 심하게 앓은 고3병으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자조가 부쩍 늘고 점점 자포자기하였다. 탈선 쪽으로 기울어 방황이 훨씬 더 가까웠다.
“아야, 우리 시험도 며칠 안 남았는디, 이래도 되까?”
“에이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뭐.”
“음마, 승협이 니 요즘 이상하다잉, 이 중차대한 시기에 흔들리믄 무자게 곤란한디?”
“담이야,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데 나라고 별수 있냐, 어떻게 든 되겠지 뭐.”
“아 씨벌, 스트레스받아서 디지겄네, 염병할 시험이 하루빨리 끝났으믄 좋겄다.”
“영기야, 대입학력고사 좀 못 친다고 죽기야 하겠어, 그리고 또 죽으면 어때?”
“어허 승협아, 그래도 시험까지 며칠 안 남았은께, 우리 인내심 갖고 힘내 보자.”
“하기사, 오늘부터 시작해서 학력고사 10일 작전에 들어간다는 놈들도 있은께.”
“후, 그래야지, 하는데 까진 해봐야지.”
셋은 이구동성으로 한숨지었다. 문승협이 스스로를 냉소하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내 인생인데 뭘. 케세라 세라, 될 대로 돼라. 뭐가 되든 어떻게든 되겠지’
금요일에 사관학교우선합격자가 발표됐다. 공군사관학교 이민상 등 3명, 해군사관학교 조운대 등 2명, 육군사관학교 장기원 등 2명이었다. 담임선생이 문승협을 따로 불러 위로하면서, 대입시험에 철저히 대비하라 했다. 문승협은 저혈압·부정맥·재생불량성빈혈진단으로 신체검사체력검정면접이 있던 2차 시험을 불참하였기에 아무렇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