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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츠나 Jul 04. 2024

#3 피자 모양을 한 사랑에 대하여

우리 시아버지, J가 확실하다

유달리 더운 하루였습니다. 오후 햇살이 모로 누워 깊은 데까지 들어오자 금세 방 안이 따뜻하고 바삭해졌습니다. 양지바른 자리에 고양이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낮잠이나 청하면 딱 좋겠다 싶었습니다. 볕 잘 드는 침대에 눕자 또각또각 규칙적으로 칼이 나무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옵니다. 오도도도도 부엌을 뛰어다니는 딸의 발소리도 들려옵니다. 누워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더없는 행복이 밀려옵니다.



거드는 척이라도 해야 해


저의 나른한 평화를 깬 것은 저의 한 줌 양심이었습니다. 고소하면서 어딘가 달큰한 피자 냄새가 기어이 방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불현듯 어디선가 친정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저를 캐나다 시댁으로 보내면서 "시아버지 급식을 먹는다니 다행"이라면서도 "거드는 척이라도 해야 해."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요리를 잘 못합니다. 친남동생은 저더러 "누나는 요리하지 마. 연금술을 펼치면 누나는 팔다리를 잃고 나는 깡통이 돼버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주인공 연금술사 형제가 세상의 이치를 거스를 대가로 형은 팔과 다리를 잃고 동생은 갑옷에 갇히게 된 것을 빗댄 말. 


참으로 정성 어린 비난이 아닐 수 없는데, 사실상 흘려듣기에는 실제로 사달을 내고 말 실력이긴 합니다. 5년 전 시댁에서 시아버지 밥상을 받아만 먹기가 민망해 처음 삼계탕을 만들었을 때, 한식을 처음 맛본 시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삼계탕이 뭔지 먹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이건 아닐 것 같아."라고요. 이후로 친정엄마 말마따나 '거드는 척'이 그나마 가장 괜찮은 성의 표시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시아버지는 계획이 다 있구나


억지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나와보니 시아버지가 앞치마를 입고 오븐 앞을 바삐 오가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제 딸이 오도도도 따라다니며 피자 재료로 올라간 파인애플이며 파프리카 같은 것들을 참새처럼 받아먹었습니다. '거드는 척'을 할 참이었는데 할 게 없어 "앞치마가 멋지다."고 칭찬하니 시아버지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오릅니다. 앞치마를 여러 개 두고 기분에 따라 달리 입는 시아버지에게 꽤 마음에 드는 칭찬이었던 모양입니다.


부엌을 어슬렁거리는 제게 "네가 딱 좋아할 만한 스포츠음료가 있다."며 달콤하고 예쁜 색 음료를 건네줍니다. 돌아보니 다른 식구들도 저마다 좋아하는 음료를 받았습니다. 식탁에 앉아 기다리자 건네는 피자 역시 크기도 재료도 다릅니다. 으음- 으음- 식구들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식사를 시작하면 시아버지 얼굴에도 뿌듯함이 서립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저는 '눈치를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무던하고 과감한 사람이 되고 싶어 아무리 노력해 봐도 상대방과 장소의 분위기를 살피고 때때로 위축됩니다. 이게 유년기에 사랑받지 못한 증거일까 싶어 때때로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시아버지는 저에게 아주 완벽한 사람입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를 끊임없이, 끼니마다 부엌 카운터와 식탁에 알알이 늘어놓아 주시거든요.


제 몫의 피자 접시에는 버섯과 블랙올리브가 가득 올라가고, 크러스트 부분이 많은 피자 조각이 담겨 있었습니다. 가족 중 저만을 위한 피자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단단한 사랑이 접시 위에 버티고 있습니다. 얼굴이 조금만 어두워져도 어깨를 토닥여주는 손이 말해줍니다. 걱정할 것 없어. 괜찮아. 





남편을 사랑했을 뿐인데, 온 가족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행운을, 손에 만져지는 행복을 제 아이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구획(?)에 따라 다른 피자는 가족 구성원의 취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나는 양송이버섯과 블랙올리브가 많고 파인애플은 적은 피자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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