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글과 나

by 세템브리니

글쓰기는 나를 어디까지 데려왔나요?

“내면에 있는 것을 꺼내 놓는다면, 당신이 내놓은 것이 당신을 구원할 것이다. 만약 내면의 것을 꺼내 놓지 않는다면, 갇혀 있는 그것이 당신을 파멸시킬 수 있다.”

미국 작가 앤 라모트가 남긴 문장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저는 SNS에 짧고 긴 글을 남겨왔습니다. 시작은 엉망이었습니다. 읽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누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많았습니다. 넘쳐흐르던 자의식을 그대로 쏟아낸, 말하자면 배설에 가까운 글쓰기였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도 얼굴이 붉어질 만큼 부끄러운 글이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 글은 아주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적어도 저를 아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습니다. 다행히 책은 꾸준히 읽고 있었습니다. 읽고 있는 작가의 문장을 흉내 내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는 긴 시간을 지나며 조금씩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제는 누군가 제 글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는 말을 전해 줄 만큼은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다 보니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생각이든 실제로 있었던 일이든 감정에만 치우치면 저조차 다시 읽고 싶지 않은 글이 나왔습니다. 제 글쓰기가 애초에 남들에게 제 생각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었기에, 혼잣말로만 머물 수는 없었습니다. 읽은 책들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어떤 작가는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했는데, 제게도 비슷한 면이 있었습니다. 온몸이 전율할 만큼 좋은 책을 만나면, 그 문장들 곁에 제 생각을 덧붙이고 싶어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쓰다 보니 글을 쓰는 제 자신을 조금씩 인정하게 되었고, 쑥스럽지만 문장으로 드러나는 제 모습에도 서서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글쓰기를 이어가는 동안 저는 분명히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이 변화는 처음으로 책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쓴 『자소설』에서 더 또렷해졌습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 그랬습니다. 반평생을 등을 돌리고 살았지만,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예상하지 못한 생각과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이미 끝난 관계였으니 한쪽으로 밀어두고 더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 저는 계속해서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제 의지와는 다르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글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나간 장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에는 스스로 다짐한 무심함으로 덮어두었던 순간들, 충분히 민감하게 바라보지 못했던 시간들이 글을 쓰면서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1화 「나를 만든 첫 장면」이 그렇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 낡은 집의 천장을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저 막연히 알고 있던 기억이 글을 통해 형태를 갖추자, 이후의 삶과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제 인생인데도, 저 역시 그것을 처음 다시 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글쓰기 덕분에 저는 효도를 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혈액암으로 어머니는 생사를 오갔습니다. 이생에서의 이별을 마음속으로 준비하면서도, 만약 어머니가 이 시간을 이겨내신다면 제 삶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드리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식이 어떤 삶을 어떻게 지나왔는지를 알게 되는 기쁨만큼 큰 효도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표적치료제 덕분에 기적처럼 일상을 되찾은 어머니는 지금 제 브런치의 가장 열렬한 독자입니다. 제가 봐도 쑥스러울 만큼 솔직한 『자소설』을 읽으며, 아들이 직장 생활과 일상 속에서 어떤 감정과 어려움을 겪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느낀 미세한 감정들을 어머니와 나눌 수 있는 지금의 관계는 글쓰기가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남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은 가족이라도 쉽지 않습니다. 어머니를 비롯해 아내, 이모, 가까운 친구들이 제 글을 통해 저를 다시 알게 되었다고 말할 때마다 저는 적지 않은 뿌듯함을 느낍니다.

이 모두가 글쓰기가 저를 데려온 자리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입니다.


『자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저는 매일 새로 태어납니다. 저를 만든 첫 장면이 죽음의 인식이었다면, 오늘의 끝장면은 탄생의 재인식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탄생은 생물학적 출생이 아닙니다. 인간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깨달음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인간의 조건, 곧 ‘탄생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은 태어났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자소설』을 쓰며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미리 정해진 길은 없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곧 새로운 길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나는 어제와는 다른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자주 어제의 실패와 지금까지의 이력을 근거로 오늘의 자신을 묶어둡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는 반복 속에서도 다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은 글을 쓰는 특별한 시간을 지나고 있지만, 대체로는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다만 그 평범한 삶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사연을 안고 하루를 견뎌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상의 기준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좋은 학교, 대기업, 고가의 아파트, 수입 자동차. 우리는 이런 것들에 삶을 맞춰 넣는 인생을 흔히 성공이라고 부릅니다. 그것들이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삶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고, 타인의 부러움을 사는 조건을 동경하는 마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기도 합니다. 다만 선천적으로 그 출발선에 설 수 없는 사람도 있고, 과정에서 미끄러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번 제도권에서 이탈하면 곧바로 낙오자로 규정되는 구조가 저는 오래 불편했습니다.

학창 시절의 저는 문제학생이었습니다. 삼수 끝에 전문대학에 들어갔다가 가까스로 서울의 대학으로 편입했습니다. 졸업 후 군대를 다녀와 중소기업에 취직했지만 몇 달씩 급여가 밀렸고 결국 회사를 떠났습니다. 잠시 좋은 회사에 몸담기도 했지만 야망을 좇아 이직했습니다. 이후 옮긴 두 곳에서는 1년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들어간 회사는 다시 다른 회사에 인수되었고, 저는 또 이동해야 했습니다. 마지막 회사에서 자리를 잡는 듯했으나, 불쑥 밀려든 글쓰기의 욕망 때문에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백수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혈액암으로 투병 중이었고, 한 달 약 값은 삼백만 원에 달했습니다. 등을 돌리고 살던 아버지는 임종 직전에야 연락을 받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제 삶도 제법 복잡하지 않습니까? 특별히 내세울 만한 성취는 없습니다. 다만 제 앞에는 단 한 번도 정해진 길이 놓여 있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버티고, 선택하고, 다시 시작하는 일의 반복이 있었을 뿐입니다. 만약 과거의 제가 지금의 저를 묶어두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매번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삶에 대한 희망도 오래 유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정해진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새로 태어나는 존재입니다. 어제까지의 자신이 오늘의 자신을 모두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부디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신의 삶도 너무 일찍 단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직 달라질 수 있으며, 아직 시작할 수 있다고 믿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제가 『자소설』을 쓰며 독자에게 가장 전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이제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준비가 되었나요?

첫 책만 내면 두 번째 책부터는 정말 술술 써지는 걸까요. 작가를 꿈꾸며 글을 쓰는 동안 자주 품었던 기대입니다. 꺼내고 싶은 내면의 세계는 넓고도 많은데, 허술한 『자소설』 한 권으로 그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 부족한 책 한 권을 써내는 일조차 지금까지 제가 겪어온 다른 어떤 일과도 결이 다른 노력을 필요로 했기에, 또 다른 책을 다시 쓴다는 생각은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책은 더 쉽다는 말이 정말 사실인지, 아니면 높은 산을 오를 때 흔히 듣는 “거의 다 왔어” 같은 말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자꾸만 건드려보고 싶은 분야가 있습니다. 『자소설』을 쓰며 지금까지의 인생을 훑어보는 동안에도, 미처 다 담지 못한 맥락과 사정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세한 결까지 함께 전해야 독자도 조금 더 제 자리에서 생각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글을 쓰는 내내 남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음 책에 대한 생각도 조심스럽게, 아직은 상상에 가까운 수준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하나는 노동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책에도 노동의 장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각각의 순간들은 노동의 전체 맥락을 보여주기보다, 그것을 계기로 제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드러내는 데 머뭅니다. 인사 업무는 어느 회사에서나 필요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욕망을 다루는 일이라는 점에서 다른 직무와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기계적이거나 기능적인 상황보다 사람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 훨씬 많습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은 제가 인사 업무를 하며 마주했던 의미 있는 발견들을 조금 더 넓은 맥락 속에서 보여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후안옌의 『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나 마이아 에켈뢰브의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를 읽을 때마다, 치열한 노동의 현장 속에서도 사유와 성찰을 멈추지 않는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특별하지 않은 제 노동의 자리에서 발견한 삶의 특별하고 소중한 장면들을 언젠가 나누고 싶습니다.

다른 하나는 소설입니다. 소설은 오래 도전하고 싶었던 분야이지만, 쉽게 말로 꺼내기 어려운 욕망이기도 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소설가를 동경했습니다. 제가 닮고 싶었던 작가들 대부분도 소설가였습니다. 사실 에세이를 쓰면서도 특별할 것 없는 자질구레한 일상을 이렇게까지 늘어놓는 제 글에 자신감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정여울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에세이 역시 충분히 문학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여전히 제 안에서 넘쳐납니다.

최근 가까웠던 사람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가족과 절연한 채 제 친척과 함께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야 저는 그의 아들, 형제, 부모, 이웃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서로 다른 모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알고 있던 그의 모습과 전혀 닿지 않는 얼굴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소설을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한 사람을 둘러싼 서로 다른 기억들이 겹치고 어긋나면서, 한 인간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남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생각은 제가 인상 깊게 읽었던 히라노 게이치로의 ‘분인’ 개념과도 닿아 있었습니다. 부모 앞의 나와 친구 앞의 나, 직장 동료 앞의 나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나의 일부라는 생각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관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 여러 얼굴을 하나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어 소설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타인을 이해하고, 또 타인이 저를 이해하는 데에도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직은 자신이 없습니다. 과연 제가 어떤 글을 쓸 수 있을지, 소설은 정말 쓸 수 있을지. 그러나 앞으로의 삶을 지금처럼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상하게도 확신이 있습니다. 어떤 삶이 저를 찾아오더라도 지금처럼 사람을 향한 관심을 잃지 않고, 세상을 차근차근 바라본다면 언젠가 또 다른 이야기가 제게 다가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소설』을 쓰는 동안 저는 제 삶을 여러 번 다시 살았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다시 들여다보았고,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마음을 뒤늦게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장면은 처음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고, 어떤 기억은 예상보다 따뜻하게 남았습니다. 그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쓰고 나니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저는 여전히 미완성이고, 그래서 아직 더 써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책의 마지막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크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까지 온 제가 이제 조금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삶은 끝내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글쓰기는 그 해석을 멈추지 않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소설』은 여기서 끝나지만, 저와 삶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다음 문장을 향해 걸어가 보려 합니다.


자소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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