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도 같은 삶을 살고 싶나요?
2014년 9월 13일입니다. 서른한 살의 늦여름입니다. 저는 인생 2회차를 살고 있습니다. 제주도로 여행을 떠납니다. 첫 직장 동료와 함께이며, 그곳에서 또 다른 친구를 만날 예정입니다. 날짜와 일정은 첫 번째 인생과 같습니다. 오늘은 제 삶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이번 생에서도 이날을 놓칠 수 없습니다.
혹시 모를 변수를 피하기 위해 이번 생의 개인적 외연은 이전과 최대한 비슷하게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삶의 내면은 달라졌습니다. 더 반듯하고 깊어졌습니다. 같은 날을 살아왔지만, 그 길의 결은 전과 전혀 다릅니다.
가장 큰 변화는 가족에게서 일어났습니다.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번 인생에서 아버지는 건강하게 살아 계십니다. 놀랄 만큼 다정하고 가정적입니다. 적응이 안 될 정도입니다. 첫 번째 삶에서 그는 자주 술을 마셨고, 취기가 오르면 어김없이 어머니에게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저는 스무 살 무렵 그와 등을 돌렸습니다. 그렇게 단절된 관계는 제가 마흔둘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끝이 났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삶을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인생은 아버지의 결핍을 이해하는 일을 우선순위로 두었습니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아버지는 외롭고 거친 환경에서 자라며 감정을 조절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 직장에서 실패한 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반복하다 결국 무너졌던 삶을 이번에는 다르게 돕고 싶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외로움에 귀 기울였습니다. 아버지의 적성을 찾을 수 있도록 꾸준히 지지했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는 동네 오락실 주인이 아니라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수필가가 되었습니다.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글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것을 알아보는 독자들이 생겼습니다. 무엇보다 자신과 가족을 아끼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저는 더 이상 소년 가장이 아닙니다. 이제야 비로소 아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충분히 따뜻합니다.
어머니는 이번 인생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 삶에서도 어머니는 늘 책을 곁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시대적 분위기와 가정 형편의 한계 때문에 공부와는 인연이 멀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을 함께 살며 어머니의 진득한 태도와 조용한 지혜가 얼마나 깊은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인생에서 제가 시도한 가장 중요한 일은 어머니를 대학에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손사래를 치셨지만, 끝내 마음을 여셨습니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한 어머니는 자신의 적성을 찾았습니다. 국문학을 전공했고, 결국 박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감상만 나누는 모자가 아닙니다. 작품의 맥락과 시대를 함께 이야기합니다. 제가 읽은 책을 두고 어머니가 다른 해석을 보태고, 어머니가 연구한 작품에 대해 제가 질문을 던집니다. 이전 생에서 어머니는 저의 정서적 지주였습니다. 이번 생에서는 삶의 후반부에도 계속 확장해 가는 존재로서 저에게 자극을 줍니다. 그런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지금을 저는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동생과의 관계도 달라졌습니다. 첫 번째 삶에서 우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사소한 다툼을 계기로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집에서 연년생으로 자랐고 서로를 감쌀 여유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멀어졌고 결국 각자의 인생을 남처럼 마무리했습니다.
동생은 감수성이 깊어 미술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생에서 저는 지난 생에 다하지 못한 책임감과 미안함을 품고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동생의 적성을 찾도록 돕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제안한 길은 요리였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서 요리에 흥미를 느낀 동생은 천천히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인생에서 동생은 성실한 가장이었습니다. 그 모습도 충분히 대견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단단히 서 있는 모습이 더 흐뭇합니다. 아직 짝을 만나지 못해 외로움을 토로하지만, 그것 또한 동생의 삶의 한 장면일 뿐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입니다. 사실 첫 번째 인생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극적으로 삶을 바꾸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인생 역시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게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시작이 오늘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따가 밤 9시에, 제주도의 한 웨스턴 펍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첫 번째 인생에서 제 아내였습니다. 이번 생에서도 다시 제 곁으로 올 사람입니다. 아내와 함께한 시간은 지난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생에서도 단 하나,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아내를 다시 만나기 위해 서른한 해를 기다렸습니다.
다만 이번 인생에서는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가졌던 몇 가지 결핍은 채우고 싶었습니다. 가장 컸던 것은 공부에 대한 갈증이었습니다. 더 좋은 학교나 직장을 원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읽지 못한 책들이 늘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번 생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첫 번째 인생 쉰 살 무렵에야 닿았던 독서의 깊이에 이미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내입니다. 직전 인생에서 아내를 알지 못했던 아버지와, 딸처럼 아꼈던 어머니는 오늘을 누구보다 기다렸을 것입니다. 아내 역시 고단한 삶을 통과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와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운 동생을 돌보았습니다. 저는 그 시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아내를 만나야 합니다.
이제 오늘 밤 아내를 만나기만 하면 됩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첫 번째 인생의 흔적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운명이 우리를 다시 이어 줄 것입니다. 지난 31년의 기다림은 앞으로의 삶을 더 단단하고 따뜻하게 만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꼭 바꾸고 싶은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2024년 3월 30일,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와는 오래전에 이혼하셨고, 저와 동생과도 교류 없이 지내셨으니 사실상 고독사에 가까운 죽음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챙긴 고모에게 연락을 받았지만, 저는 빈소를 끝까지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지금도 덤덤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괜찮은 일인지, 저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처음 밀려온 감정은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무책임함 때문에 가족이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가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피해자의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 자리는 편하기도 했습니다. 원망은 저를 버티게 했고, 분노는 저를 움직이게 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자 다른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는 생의 끝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돌아보셨을까. 장남인 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으셨을까. 그 말을 끝내 하지 못한 채 떠나신 것은 아닐까. 저는 그 질문의 답을 영영 들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사실이 뒤늦게 마음을 건드립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두 장면이 겹쳐 떠오릅니다.
하나는 제가 아버지와 정면으로 부딪쳤던 날입니다. 무능력한 가장 때문에 가족이 고생하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질문이라기보다 항의에 가까웠습니다. 아버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습니다. “나도 어릴 때 어렵게 컸으니 너희도 그렇게 자라도 괜찮다.” 그 말은 제게 치명적이었습니다. 가난 자체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죄책감의 부재였습니다. 무능력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적어도 가족 앞에서는 사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순간 저는 아버지를 더 이상 부모의 자리에 둘 수 없었습니다. 아주 미숙하고 유치한 어른으로만 보였습니다. 저는 그날 아버지를 마음속에서 밀어냈습니다.
다른 장면은 더 거칠고 더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술자리를 마치고 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밤이었습니다. 어둑한 골목에서 비틀거리며 걷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어디 가서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또 술이나 마시고 들어오는 모습에 화가 치밀었습니다. 끝내 참지 못했습니다. 달려가 원망을 쏟아냈고, 감정이 격해진 끝에 아버지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손을 거칠게 흔드는 순간, 아버지는 깃털처럼 가볍게 흔들렸습니다. 그때 제 손에 전해지던 가벼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분노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동시에 서글펐습니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휘청이던 그 모습이 너무 작고 초라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날의 일을 오래 후회했습니다.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흔들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 장면 만틈은 제 안에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으로 남았습니다. 제 손아귀에 붙들린 채 대롱대롱 흔들리던 존재의 가벼움도 지금까지 또렷합니다. 그때의 아버지는 이미 늙고 왜소해진 한 노인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남처럼 지내던 긴 시간 동안에도,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저는 그날의 일부터 먼저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돌아가신 뒤에야 저는 조금씩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좁은 방에 앉아 글을 쓰던 시간 동안, 의지는 있었지만 끝내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던 아버지의 시간을 자주 떠올렸습니다. 실패 이후 다시 일어서지 못한 사람의 자존심은 얼마나 깊이 무너졌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집 안에서만큼은 어떻게든 권위를 세우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용서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해하려는 마음만은 제 안에 남겨두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도 저와 다르지 않은,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아버지가 떠나신 뒤에야 인정했습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자소설』을 쓰며 삶을 돌아보는 동안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도 아버지입니다. 긴 단절의 시간, 존재의 공백, 끝내 해소되지 못한 감정은 제 안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비난하며 제 삶을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설명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판단만이 아니라, 저 자신의 두려움과 미숙함도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다면 꼭 바꾸고 싶은 한 가지는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단순히 다정한 부자가 되고 싶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이를 먹고 나서야 겨우 짐작하게 된 아버지의 외로움과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을 조금 더 일찍 이해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감수성이 예민했고 예술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질을 가꿔낼 환경이 없었습니다. 예술적 적성은 긴 시간과 꾸준한 지지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결과만 요구했습니다.
제가 조금 더 성숙했더라면, 조금 더 단단했더라면, 아버지에게 어울리는 길을 함께 찾자고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아버지의 외로움을 조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족 모두가 조금만 더 오래 아버지의 가능성을 믿어주었다면, 비록 넉넉하게 살지는 못했더라도 서로 등을 돌린 채 늙어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바꾸고 싶은 것은 아버지 자체가 아닙니다. 이해하지 못한 채 밀어내고, 단절로 버텨 온 제 태도입니다. 저는 아버지를 미워하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도, 끝내 외면했던 태도도 제 삶의 책임으로 남겨 두려 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저는 아버지의 멱살을 잡는 대신 묻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괜찮으셨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을, 너무 늦기 전에 조금 더 일찍 건네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달이 들어가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입니다. 이십 대 어느 날,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다가 교보문고 빌딩 외벽에 걸린 이 시를 보았습니다. 신호를 기다리며 몇 줄을 읽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그때 제가 바로 그 대추 한 알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평범하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불우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타고난 조건을 원망했고, 뒤처진 삶을 따라잡으려 애썼으며, 보상 없이 책임만 먼저 주어지는 순간들을 자주 견뎌야 했습니다. 그런 삶을 쉽게 긍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시련이 없었다면 저는 삶의 깊이를 끝내 모른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남들이 마련해 둔 기준에 무심히 저를 맞추며 살았을지도 모르고, 제 삶을 정면으로 돌아보지 않은 채 흘려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모든 고난 덕분에 비로소 저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려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제가 오래 마음이 갔던 인물들 역시 대개 늦게 익고 천천히 완성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대기만성이라는 말도 떠올랐고, 니체의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문장도 다시 떠올랐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말이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돌아보니, 그 문장들이 마냥 공허하게만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한때는 그저 조금 더 편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어린 날의 제가 어쩐지 쑥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지금은 제 삶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무능력한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저는 이렇게 이른 나이에 책임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독한 사춘기가 아니었다면 더 늦은 시기에 더 크게 방황하며 더 많은 사람에게 걱정을 안겼을지도 모릅니다. 넉넉하지 않았기에 성실해질 수 있었고, 순종적이지 않았기에 회사를 여러 번 옮기며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끝내 제 가치를 알아봐 주는 아내도 만났습니다. 지나온 태풍과 천둥과 벼락과 번개가 저를 익혔습니다. 저는 그 시련을 통과하며 조금씩 세상과 연결되었습니다.
얼마 전 어머니께서 재미있는 영상을 하나 보내주셨습니다. ‘노후에 재물복이 폭발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사주와 관련된 이야기였고, 그냥 재미로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가볍게 넘길 수도 있었지만 한 문장이 오래 남았습니다. 복은 결국 사람을 통해 들어오고, 재물이 늘어나더라도 삶의 태도는 검소하게 유지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삶의 기준까지 달라질 필요는 없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노후의 재물운이 어떨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베풀고 절제하며 사는 삶이 결국 윤택함으로 돌아온다는 말에는 공감이 갔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가르침이라기보다, 제가 지나온 시간이 몸으로 익히게 한 깨달음에 더 가까웠습니다. 삶에서 지금 이 순간은 분명 중요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과거의 선택과 태도가 쌓여 만들어진 결과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가 오늘의 방향을 정하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의 삶에 만족합니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뿌듯함이 있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분명한 태도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지금의 저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굴곡까지 포함한 이 삶을, 저는 다시 한번 선택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