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

by 세템브리니

지금의 인생을 계절에 비유한다면?

사계절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입니다. 눅눅하고 더운 날씨가 대지의 습도와 온도를 끌어올릴 때, 저는 자연에서 스며 나오는 짙은 생명의 기운에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매미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소나기라도 한차례 지나가고 나면 몸 안에서 무언가가 다시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집 마루에는 한여름 숲을 배경으로 한 카미유 코로의 그림을 걸어 두었습니다. 한겨울이면 한여름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느린 영화를 틀어 놓고, 약간은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정서를 가만히 즐기기도 합니다. 제게 여름은 견뎌야 하는 계절이 아닙니다. 생이 가장 짙은 농도로 살아 움직이는 순간을 또렷하게 체감하는 시간입니다.

인생을 사계절에 빗대는 상상은 오래전부터 품어온 질문입니다. 어느 날 아내에게도 물었습니다. 저와 동갑인 그녀는 사십 대 중반을 바라보는 지금을 두고, 자신의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된 여름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를 만나 짙어진 삶이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답변이었습니다. 과분한 대답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 저는 나이를 기준으로 스스로를 늦여름쯤에 두고 있었습니다. 인생을 이십 년씩 네 구간으로 나누면 지금은 가을의 초입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몸은 건재하고, 달리기를 통해 단련해 온 체력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를 여름의 끝자락쯤에 놓아두고 싶었습니다.

육체의 나이를 기준으로 하면 그런 판단도 나름 설득력이 있습니다. 스무 살 언저리까지를 봄이라고 본다면, 청춘의 시행착오와 열기가 이어지는 시기는 여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실을 준비하는 지금의 시간을 늦여름으로 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자연의 시간표에 인간의 나이를 겹쳐 놓는 방식은 충분히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고 싶은 계절은 단순한 연령 구분이 아닙니다. 나이에서 비롯된 상투적인 비유를 넘어, 정신의 상태에 따라 계절을 다시 정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계절 역시 여름입니다. 다만 저의 계절은 봄이 아니라 겨울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다릅니다. 계절은 반드시 봄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씨앗을 품고 오래 버티는 겨울이 먼저일 수도 있습니다. 제 삶은 그 순서를 따랐습니다.

유년 시절은 제게 겨울이었습니다. 몸은 자라고 있었지만 정신은 아직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본능과 환경에 끌려다니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가정의 불안정함은 그 겨울을 더 길고 차갑게 만들었습니다.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조차 분명히 알지 못한 채 시간을 통과했습니다. 그 겨울은 얼어붙어 있었고, 정신은 아직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만큼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긴 겨울이 서서히 풀리던 시기를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저를 둘러싼 껍질이 갈라지는 소리를 처음 들은 때였습니다.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실감했고, 내가 여기에만 머물 수는 없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또렷해졌습니다. 그때부터 제 삶의 봄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무 살 이후 사회에 발을 딛고 자리를 잡기까지의 시간이 제게 봄에 가까웠습니다. 봄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대신 방향을 잡는 계절입니다. 저는 여러 번 부딪혔고, 여러 번 흔들렸습니다. 심오한 책을 붙들고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조직 안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과정은 한여름의 열기를 견디기 위한 뿌리내리기였습니다. 겉으로는 미숙했지만, 안쪽에서는 조금씩 밀도가 쌓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여름의 한복판에 서 있다고 느낍니다. 더는 푸릇푸릇한 신록의 빛은 아닙니다. 대신 짙은 녹음이 만들어내는 무게가 있습니다. 봄의 가능성 대신 여름의 책임이 놓여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이 단순한 준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삶이 여기서 한 번 더 방향을 틀 수 있다는 예감이 있습니다. 그 예감이 저를 긴장시키고, 동시에 설레게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긴 가을을 보내고 싶습니다. 서둘러 낙엽이 지는 가을이 아니라, 충분히 익은 열매를 천천히 거두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저 혼자만의 수확이 아니라 주변과 나눌 수 있는 결실이면 더 좋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분명 여름에 있습니다. 뜨겁고, 아직은 지치지 않았고, 무언가를 더 밀어 올릴 힘이 남아 있는 계절입니다. 그 힘이 다하기 전까지 저는 이 계절을 최대한 충실하게 통과하고 싶습니다.


나를 지탱하는 힘은 무엇인가요?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학창 시절 가장 또렷이 남아 있는 기억은, 저보다 무엇인가를 더 잘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느꼈던 열등감입니다. 누군가는 농구를 잘했고, 누군가는 야구를 잘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공부를 잘했고, 또 다른 친구는 옷을 잘 입었습니다. 돌아보면 사소한 비교였지만 당시의 저는 그 차이를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다른 친구들보다 제가 앞선다고 느낀 영역은 하나도 없다고 믿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런 감정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아들러는 인간의 성장에서 열등감을 중요한 출발점으로 보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결핍이나 부족함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보완하려는 마음 때문에 계속 움직이게 됩니다.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스스로의 부족함을 메우려는 노력 속에서 인간은 성장하고, 그 과정에서 타인과의 관계도 조금씩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그 개념을 알고 나서야 저는 오래 부끄럽게만 여겼던 감정을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제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무엇 하나 두드러지게 잘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어린 시절의 저에게 꽤 큰 열등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저를 아주 오래 주저앉혀 두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그것은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잘하는 것을 찾기보다, 잘해보고 싶은 것을 붙드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잘하지 못하더라도 계속해 보자는 쪽으로 방향이 잡혔습니다.

그래서 저는 잘하는 것을 찾기보다, 잘해보고 싶은 것을 붙들었습니다. 농구를 잘하고 싶었습니다. 친구들과의 게임이 끝나면 혼자 남아 드리블을 연습했고, 평소에는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며 민첩함을 길렀습니다. 수영도 잘하고 싶었습니다. 남들이 귀찮아하는 키판 발차기나 각 영법의 기본자세를 반복해 익혔습니다. 비교적 늦게 시작한 것도 있었습니다. 영어가 그랬습니다. 스무 살이 되어서야 중학교 수준의 단어와 문법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대신 마음속으로 정한 시간은 길었습니다. 10년 뒤에 외국인과 대화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잘하는 것을 찾지 못했던 저는, 잘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들였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농구는 어디서든 어울려 함께 뛸 수 있는 수준이 되었고, 친구들과 대회에 나가 순위에 들기도 했습니다. 수영은 어느새 가장 오래 이어온 운동이 되어 상급 레인을 돌게 되었습니다. 늦게 시작한 영어도 어느 순간 제 삶의 중요한 도구가 되어 카투사로 군 복무를 하고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는 경험으로 이어졌습니다. 처음부터 잘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래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 잘하게 된 것들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여기에는 일정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저는 재능을 발견한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익힌 사람이었습니다. 남들보다 빨리 성취한 적은 거의 없었지만, 쉽게 손을 놓지도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비교에서 비롯된 감정이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며 그 감정은 저를 계속 남아 있게 만드는 힘으로 바뀌었습니다. 뒤처진다고 느꼈기에 더 오래 해보게 되었고,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더 많이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저는 열등감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불필요하게 몰아세우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삶에서는 그 감정이 끝내 멈춤보다 지속 쪽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 부족하다는 자각, 그럼에도 조금 더 해보려는 의지가 겹쳐지며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한때는 저를 흔들던 감정이, 시간이 지나고 나니 저를 버티게 하는 쪽으로 작용한 셈입니다.

결국 지금의 저를 지탱하는 힘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특별히 뛰어난 재능도 아니고, 처음부터 자신 있었던 능력도 아닙니다. 부족함을 느끼는 순간에도 쉽게 물러서지 않고, 잘해보고 싶은 것을 오래 붙들고 있는 힘입니다. 어쩌면 그 시작은 열등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감정은 더 이상 저를 무너뜨리는 방향으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오래 견디고, 오래 반복하고, 오래 붙들게 만드는 힘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의 저를 지탱하는 것은 결국 그 조용하고도 끈질긴 힘입니다.


나만의 고유함은 무엇인가요?

‘분인’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dividual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개인’이라는 말부터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로 개인은 individual인데,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 우리는 인간을 대체로 이렇게 이해해 왔습니다. 하나의 일관된 자아를 지닌,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로서의 개인입니다.

하지만 일본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여기에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로 고정된 존재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는 인간의 자아가 하나의 단단한 덩어리가 아니라, 관계와 상황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친구 앞의 나, 가족 앞의 나, 직장에서의 나는 서로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서로 다른 나를 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주장은 단순합니다. 단 하나의 고정된 진짜 나만 존재한다고 믿는 태도 자체가 인간을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나만의 고유함’이라는 질문 앞에 꺼내면 조금 엇나간 대답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고유함을 묻는 질문에 오히려 고정된 자아를 부정하는 개념으로 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그 지점에서 제 답을 찾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고유함은 단 하나의 진짜 나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여러 모습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의 얼굴로 모든 관계를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나라는 것이 있고, 그것을 일관되게 지켜야 성숙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부모 앞의 나와 친구들 앞의 나는 같지 않습니다. 직장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나 역시 다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말투와 표정, 판단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다양한 모습을 하나로 묶어 설명하려 애씁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같은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모습은 늘 달랐습니다. 가족 앞의 저는 유별나고 엄격했습니다. 직장에서는 비교적 관대하고 사무적이었습니다. SNS에서는 감정이 풍부했고, 아내 앞에서는 모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저를 보며 한때는 스스로를 가식적이라고 단정하기도 했고, 연기한다고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분인이라는 개념을 접한 뒤 그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관계 속에서 드러난 여러 모습의 저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분인이 모여 전체로서의 저를 이룬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직장에서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 있어도 그것이 존재 전체의 실패는 아니었습니다. 그 관계 속에서 드러난 한 모습이 잠시 흔들리고 있을 뿐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은 그 사람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드러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타인에 대한 평가도, 저 자신에 대한 판단도 조금 느슨해졌습니다. 동시에 가능성도 보였습니다.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냅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은 더 이상 스스로를 가두는 문장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고유함은 하나의 고정된 본질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모습의 나를 인정하고, 그 비중을 스스로 조절하며 살아가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 마음에 드는 모습의 비율을 조금씩 늘려가는 일. 그것이 지금의 제가 붙들고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나만의 고유함은 하나의 얼굴에 있지 않습니다.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여러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다루며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저는 이제 그 방식이 제 삶의 고유함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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