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에게 다시 회사로 돌아가서 평범한 삶을 살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도전하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좋은 직장 다니던 애가 똑똑한 애가 왜 그러냐며 걱정하셨다. 맞다. 나는 똑똑하다. 그래서 이런 도전에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사실 모두 부모님 덕이다. 성공한 사람이 말하는 이야기에는 항상 ‘불행포르노’가 낀다. 미안하지만, 내 인생엔 그런 스토리는 없다.
내 성격과 가치관, 그리고 시선이 바뀐 시발점을 말하자면 대학교 시절의 봉사활동 경험이다. 친구가 이 강의를 들으면 학기말에 인터뷰를 해서 해외봉사를 보내준다고 하길래 신청해서 들었다. 당시 취미로 기타를 칠 수 알았고, 그걸 어필해서 인터뷰에 통과해 아프리카 르완다로 첫 해외 출국을 하게 된다. 그때 나는 1학년이었고, 같이 가는 팀원들은 모두 2~3학년 선배들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매일 저녁 서로 둘러앉아 나누던 이야기들이다. 그들 사이에서 비교적 어린 나는 선배들의 경험담이 너무 재미있었고, ‘난 정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부터 대학에서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 이후 학교에서 미국 교환학생을 모집하는데, 무슨 용기가 있었는지 덥석 지원을 했다. 그때 나의 영어실력은 아주 처참했다. 한국의 영어 실력의 기준인 토익으로 말하자면 500점 내외였다. 부모님은 한 학기만 다녀오라고 했지만, 철없던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한 것도 아니고 충분히 날 지원할 수 있는데 왜 안 보내주느냐며 고집을 부려 1년을 떠나게 된다. 그때 엄마가 대출을 받아가면서 나에게 생활비를 보내준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우리 부모님은 부자가 아니다. 부모님은 본인들이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자식들에게는 모든 걸 지원해 주셨다. 봉사활동부터 기타 취미, 미국 교환학생까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무조건적인 응원을 해주는 지원자, 그 존재만으로 나는 어떠한 도전에도 두렵지 않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미국 교환학생이야 말로 나를 온전히 변화시킨 계기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영어를 정말 못했다. 미국에서 첫 수업인 오리엔테이션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충격에 빠져서 시간표를 싹 수정했다.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영어 수업을 들으며 첫 학기는 영어에 익숙해져 갔다. 비자부터 학교 행정 처리까지 모두 혼자 해결해야만 했다. 관련 부서에 문의하거나 항의를 해야 할 때면 영어로 미리 대본을 만들어보고 방구석에서 연습하고 부딪혔다. 또 미국 학생들이 한두 시간이면 끝낼 과제를 나는 서너 시간 걸리면서도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두려움을 극복했다.
그때 깨달았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해내면 된다는 성취감을 얻었고, 그 성취감이 나를 또 다른 목표로 이끌었다. 그렇게 나는 도전이 두렵지 않게 됐다.
그 후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도전하면서 나의 도전 정신은 정점을 찍게 된다. 집을 구하기 전 에어비앤비에서 일주일을 묵었는데, 처음엔 에어비앤비에서 일주일을 묵으며, 호주 현지인 룸메이트들과 지냈다. 짐 정리를 하다가 “쓰레기통 어디 있냐”며 물었는데, 그때 ‘trash can’이 아닌 ‘bin’이라고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부터 머리가 띵했다. 그 이후로 호주식 영어 때문에 의사소통이 막힐 때마다 좌절감을 맛봤다. 동네를 다섯 바퀴 돌며 레쥬메를 돌리러 나갔고, 문 앞에서 용기가 나지 않아 한참을 머릿속으로 시물레이션을 돌리며 연습했다. 영어로 진행하는 잡인터뷰는 또 얼마나 떨리던지, 또 정착할 집을 찾으러 하루에도 세 번씩 집을 보러 다녔다. 태어나 처음으로 도전해야 할 일이 단기간에 쏟아졌고 타지에 연고도 없이 혼자인 나는 해내야만 했다. 해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경험과 도전은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부모님의 지원과 20대 초반의 도전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나는 또다시 새로운 시도를 시작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