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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Jul 20. 2021

넘어진 김에 쓰는 이야기

어느 카이저쏘제의 고백


넘어진다는 느낌은 무척 천천히 왔다. 나는 내가 넘어지는 모든 순간을 생생하게 느꼈다.


아, 나 넘어질 것 같다.

지금 넘어지는 건가?

나 넘어지고 있네.

진짜 이렇게 넘어진다고?


 머릿속에서 이렇게 4단계에 걸쳐 내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 동안 나의 두 무릎은 착실하게 눈앞에 놓인 돌바닥에 닿았고, 본능적으로 앞으로 뻗은 손바닥 끝은 다른 축축한 돌부리에 닿았다.


철푸덕. 어이쿠.


 입에서 끙, 하고 앓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대낮에 야외에서 두 무릎을 모두 꿇은  OTL자세로 넘어져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최근 한 5년 정도를 자차로 출퇴근했던 나는 오늘 오랜만에 대중교통으로 출근했다. 자차 통근러로 살면서도 나름대로 꾸준히 운동을 해오긴 했는데, 역시 운동하고 실생활에서의 운동 능력은 하등 상관이 없는 것인지 나는 첫 출근날부터 서울 한복판에서 보기 좋게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자차 출퇴근을 시작한 이후로는 10분 이상 연속해서 걸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많은 계단을 올라볼 일도 별로 없었다. 그러는 새 나의 하체 근육과 걷기 능력은 착실하게 퇴화된 것 같았다.


어제(재택근무)와 오늘(대중교통 출근)의 드라마틱한 걸음 수 차이..


 지난 5년 간 내가 걷는 장소는 대부분 야외가 아닌 실내, 그것도 주로 집안이었다. 층간소음을 일으키지 않도록 발을 되도록이면 높이 들지 않고 슥슥 미끄러지듯 걷는 게 습관이 들어버린 나의 뱀 같은 걸음걸이로는 도저히 눈앞에 놓인 공원의 울퉁불퉁한 바윗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걷기를 등한시한 삶을 살아온 바, 발을 충분히 씩씩하게 높게 들어 올리지 못한 죄로 나는 아침 출근길 서울 도심 공원 한복판에서 쌍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도망치듯 사무실로 들어오자 그제야 바닥에 터치 다운했던 두 무릎이 잔뜩 부어오르며 성을 내기 시작했다. 처량하게 다리를 절뚝이며 사무실을 오가는 내 모습이 우스웠던지 누군가 '지팡이라도 짚고 다녀야 하는 거 아냐?'라는 농담을 건네 왔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나 진짜 지팡이 짚고 다녔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이건, 내가 한창 가열차게 두 다리로 걸어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9년 전 9월의 어느 날. 그날은 동생과 함께 했던 이탈리아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한 달 반 정도의 여정이 끝난 뒤 테르미니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


  주로 혼자 여행을 다녔던 내게 동생과 함께 했던 그 여행은 유독 힘들었다. 나와 달리 성격이 헐랭하고 느긋한 동생은 여행기간 내내 나 혼자 여행을 왔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역대급 에피소드들을 생산해낸 참이었다. 길거리의 집시들에게 뜬 눈으로 50유로를 뺏기질 않나, 하루 쇼핑에 여행 경비 절반 넘게 다 써버리질 않나. 나는 혹시라도 동생이 소매치기를 당하진 않을까, 어딘가에서 또 무슨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느라 스트레스 때문인지 뭔지 중간에 더위를 먹어 몸이 많이 아파서 일정의 절반을 날려먹기도 했다.


 그래도 천만다행이게도, 우리는 이 모든 여정을 마치고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러 가기 위한 열차 승강장에 서게 된 것이다. 이런저런 위기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어쨌든 무사히 이곳에 도달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뿌듯한 성취감에 취해 있었다. 이제 30분 내로 도착할 열차에만 무사히 탑승하면 지긋지긋한 소매치기와 온갖 돌발상황으로부터 해방되어 편한 마음으로 푹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난 왜 하필 그 순간 딱 그때 뭔가 마시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짐 잘 지키고 있어."



 나는 동생에게 그렇게 단단히 말한 뒤 플랫폼 바로 옆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 이탈리아에서 쇼핑한 것들을 꽉꽉 눌러 담은 캐리어랑 가방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혹시 동생에게 소매치기가 붙을까 봐 항상 예민해져 있던 나는 이 마지막 순간 살짝 긴장을 놓치고 말았다. 설마, 음료수를 잠깐 사 오는 5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 게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나는 그런 내 방심이 이번 여행에서 길이길이 남게 될 최악의 실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매점에서 산 음료수를 손에 쥔 채 신나서 돌아오니, 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왜 저러고 있나' 하고 동생의 시선을 쫓아보니 우리 캐리어가 어쩐지 허전했다. 캐리어 위에 올려두었던 가방들이 없어져 있었던 것이다. 당황한 표정의 동생에게 물으니 누구가 자꾸 자기에게 갑자기 말을 걸어서 대답을 하다가 보니까 어느 순간 가방이 없었단다. 아무래도 우리 캐리어는 너무 무겁고 끌고 갈 때 티가 날 확률이 높아서 그 위에 얹어둔 손가방만 슬쩍 빼간 모양이었다. 우린 눈 뜨고 코 베어 간다는 테르미니 역에서, 2인 1조 소매치기에게 당한 것이었다. 그것도 여행 첫날이 아닌 마지막 날에.


"어쩐지 나한테 누가 자꾸 길을 물어보더라고..."

"아니 네가 이태리어도 영어도 못하고 누가 봐도 여행객인데 현지인이 너한테 길을 대체 왜 물어봐?"


 어이가 없고 화가 났지만, 거기서 미적거릴 틈이 없었다. 우리는 적어도 4시간 이내에 비행기를 타고 이곳을 떠나야 했으니까. 나는 재빨리 우리가 잃어버린 가방 속에 있던 소지품들을 따져봤다. 나의 경우 다행히 정말 중요한 것 - 여권 및 지갑 - 은 늘 몸에 지니고 다녔기 때문에 당장  큰 문제는 없었다. 잃어버린 가방 속에 아이패드를 포함한 100만 원 정도의 소지품이 있긴 했지만. 문제는 동생이었다. 동생이 잃어버린 가방 속에는 그의 여권이 들어있었다.


 급한 대로 역을 순찰 중인 경찰에게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했지만 오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아마 잡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한껏 흥분한 상태로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나의 서툰 이태리어로는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조차 없었다. 경찰은 우리를 보며 안됐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일단 시간이 없으니 공항에 가서 거기 경찰에게 상황을 신고하는 게 낫겠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허둥지둥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가자마자 경찰서를 찾아 신고를 했지만 이 단계에서 나는 이미 희망을 버린 상태였다. 어차피 가방은 못 찾을 것 같고, 이렇게 된 이상 여권을 잃어버린 동생이 문제였다. 여권을 잃어버리지 않은 나는 한국에 갈 수 있었지만 내 동생은 달랐다. 우리는 공항에 위치한 항공사 사무실을 찾아가 동생이 여권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항공사 직원은 여권 없이는 출국을 할 수 없다며, 한국 대사관에 가서 임시 여권이라도 받아와야 한다고 했다. 다만 오늘 받아온다 해도 항공편 중 자리 남는 게 없어서 오늘 내로 출국은 불가하고, 이틀 뒤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여기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대사관에 가기 위해서는 지금 둘이서 택시를 타고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이 부족해 나까지 출국을 못하게 된다. 우리 두 사람 모두의 항공권을 취소하고 다시 살 순 없었다. 그러기엔 손해가 너무 컸으니까. 그러니 일단 여권을 가진 난 출국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영어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여행 마지막 날이랍시고 전날까지 땡전 한 푼 안 남기고 가진 돈을 전부 탕진해버린 거지 동생을 이곳에 혼자 덜렁 남겨두고 갈 순 없었다.


 위기의 상황에 사람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하던가. 전두엽을 굴려 최선의 방법을 찾아봤다. 떠오르는 것은 오직 하나, 로마에 널리고 널린 한인 민박집 사장님께 부탁을 해보는 것이었다. 사실 이번 여행 기간 내내 민박집에 숙박하지 않았어서 불쑥 부탁하기가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동생은 정말 영어를 못했으니까, 한국어를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절박하게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해외 로밍 인터넷을 켜서 피우미치노 공항 한가운데서 한인민박집 정보가 가득한 유럽 여행 카페를 뒤져가며 로마 민박집에 하나하나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그날이 세금 신고 날이라 로마 민박집의 주인들이 거의 다 도심을 비운 상태였다. 한 10군데 넘게 전화해봤을까. 자꾸만 전화 연결도 안 되고, 전화를 받아주는 주인도 없어 애가 탔다. 그때였다. 어딘지도 모를 민박집의 어떤 아저씨가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았던 것은.


 그것은 단연코 그때까지의 내 인생에서 들어본 중에 가장 감동적인 '여보세요'였다. 마음 놓고 여행의 마지막을 느긋이 즐길 예정이었던 나는 테르미니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이후로 줄곧 충격에 휩싸여 정신줄을 놓고 있었고, 이맘때쯤이면 아주 작은 자극에도 톡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그 아저씨의 '여보세요'를 듣자마자 내가 미친 사람처럼 눈물을 줄줄 쏟았던 것은 충분히 그럴만했다는 이야기다.


 나는 훌쩍훌쩍 울며 아저씨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오늘.. 여행 마지막.. 출국.. 날인데... 내 멍청한 동생이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이 자식이.. 여권을 잃어버렸는데... 어쩌고 저쩌고... 세금 신고하느라 꽤 바쁜 날이었을 텐데도 아저씨는 내 당황스러운 전화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눈물 콧물 질질 짜며 나는 아저씨에게 내 동생을 데리고 대사관에 가서 임시 여권 좀 만들어주고, 항공권 다시 끊어 올 때까지 민박집에서 재워달라고 부탁했다. 숙박비랑 수고비까지 드리겠다고 약속하며. 전화기 건너편의 아저씨는 그게 뭐가 그렇게 큰 일이냐는 듯 나를 달래며 걱정 말고 동생을 택시 태워 자기에게 보내라고 말씀해 주셨다. 완전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안도한 나는 공항 한복판에서 다시 한번 목놓아 울었다.



 "... 아저씨.. 감사합니다.... 제 동생이.... 동생 놈이.... 영어를.. 흑흑.. 한마디도 못해서요..... 흑흑..."



 내 동생은 왜 하필 영어도 못해가지고. 순간 그게 그렇게 서러웠다. 정작 내 동생은 울지도 않고 멀뚱히 옆에 서 있었다. 그게 또 그렇게 얄미운데, 얘를 놓고 갈 생각을 하니까 또 걱정돼서 또 울었다. 나는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 가진 돈을 몽땅 꺼냈다. 그리고 해외 결제 가능한 신용카드를 동생 손에 쥐어주었다. 내 핸드폰에 끼워져 있던 현지 통화 가능한 유심칩까지 빼서 동생 폰에 끼워주었다. 그리고 민박집 아저씨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꼭 여기로 전화하라고 신신당부하고는 다시 기차에 태워 동생을 다시 로마 시내로 보냈다. 마지막까지 동생 놈은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왠지 소매치기 두어 번 더 당할 거 같아 보여서 너무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제 곧 출국을 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처절하게(?) 동생을 보내고 겨우 진정이 된 나는 출국 수속을 밟으러 항공사 카운터로 향했다. 그런데, 항공사 카운터에 위탁 수화물을 맡기려던 순간 또 한 번 문제가 발생했다. 항공사에서 내 위탁 수화물을 맡아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전날에 캐리어에 꽁꽁 묶어둔 지팡이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캐리어에 꽁꽁 묶었던 지팡이...




 갑자기 웬 지팡이냐고? 이 지팡이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이번 여행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한 중요한 지팡이다.  본격적인 이탈리아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크게 앓아누웠다. 동생만 내보내고, 나는 하루 종일 호텔방에서 관광도 못하고 누워있던 날도 대다수였다. 못 먹던 음식을 조금씩 먹게 되고, 조금씩 기운을 차려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장시간 멀쩡하게 걸어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동생에게 관광하고 오는 길에 슈퍼에서 대걸레 자루를 하나 사 오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대걸레 자루를 손에 넣은 나는 그것을 지팡이 삼아 짚고 동생과 함께 조금씩 관광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보기엔 다소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20대 중반의 젊은 여자가 대걸레 자루를 지팡이 삼아 짚고 로마 시내를 걸어 다니는 모습이 말이다. 그런데 정말 당시의 나는 지팡이 비슷한  없이는 한여름 로마의 폭염과, 병세로부터 완벽히 회복되지 못한 내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로마가 우리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였기 때문에 나는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했다. 그렇게 나는 대걸레 자루를 짚고 콜로세움도 가고, 베네치아 광장도 갔다. (심지어 대걸레 자루에 의지해 사진도 몇 장 남겼다) 내가 이 지팡이를 만나게 된 것은 바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당시에 내가 들고 다니던 대걸레 자루는 지팡이 대용이긴 했지만, 윗부분이 손잡이처럼 생기지 않아 꾹꾹 짚고 다니면 손바닥이 아팠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숙소에 돌아와 로비에 앉아 잠시 아픈 손바닥을 문지르고 있는데, 숙소 직원이 내게 다가와 혹시 지팡이가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왔다. 한두 달 전쯤엔가 노부부가 와서 묵고 간 적이 있는데, 지팡이를 두고 가서 찾으러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내게 제대로 된 지팡이가 필요해 보이니 원하면 가져도 된다고 했다.


 나는 두말없이 콜! 했고 그렇게 나는 인생 최초로 제대로 된 지팡이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리고 숙소 직원이 건네 준 심플한 형태의 지팡이를 처음 건네받아 손잡이를 쥐자마자 나는 그 지팡이에 온 마음을 쏙 빼앗기고 말았다.


봐도 봐도 예쁜 내 지팡이


 본래 지팡이 용도가 아니었던, 당시 궁여지책으로 들고 다니던 대걸레 자루와 확연히 비교되는 편안한 그립감. 체중을 아무리 있는 힘껏 실어도 그다지 손바닥을 찌를 듯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제대로 된 지팡이를 손에 쥔 후 나의 여행에는 더욱 탄력이 붙었다. 여전히 기운 없어 지팡이에 의지하고 절룩거리는 걸음걸이로 다녀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걸레 자루를 붙잡고 다닐 때보다는 한결 수월하게 다녔다. 다만 한 가지 민망했던 것은 길거리의 사람들이 나를 보고 길을 비켜주거나, 버스를 탈 때 자리를 양보해주곤 했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양심적인 사람이라, '나는 다소 기운이 없을 뿐이다'라고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긴 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이 지팡이가 있었던 덕분에 나는 로마 근교의 소도시도 다녀오고, 로마 시내 곳곳을 다니면서 마지막까지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점점 갈수록 기운을 차리게 되어 여행 마지막 며칠 무렵에는 지팡이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지팡이를 버리거나 다시 두고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지팡이는 캐리어에 꽁꽁 묶인 채로 나와 함께 피우미치노 공항까지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날따라 뭐 마가 끼었는지 유독 안 풀리던 일진에, 운명의 장난 같은 상황들을 하나씩 헤쳐서 겨우 선 출국 수속 창구에서. '지팡이나 장우산 등은 캐리어에 묶어도 파손 위험이 있기 때문에 위탁 수화물로 가져갈 수 없다'는 항공사 직원의 설명은 청천벽력 같았다.  다시 한번  난관에 부딪힌 셈이다. 내 나라 잃은 표정을 보고도 항공사 직원은 냉정했다. 위탁 수화물을 부칠 수 있는 방법은 캐리어에 단단히 동여매 둔 지팡이를 떼고, 지팡이를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9.11 테러 이후로 장우산이나 지팡이 같이 유사시에 무기로  쓰일 수 있는 물건들은 기내에 들고 탈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그 지팡이를 버릴 수 없었다. 그 지팡이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나의 이번 여행을 수월하게 도와주었던 일등 공신이었다. 나중에 내가 호호 할머니가 돼서도 이토록 편안한 그립감을 주는 지팡이는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정이 듬뿍 들어버렸단 말이다. 도저히 버리고 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한국은 가야 하고, 수화물은 부쳐야 하니까......



 나는 잠시 다시 머리를 굴렸다. 위기의 순간에만 작동하는 뇌의 어느 부위가 바로 그 순간 기능했는지도 모르겠다. 순간,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내 모습을 보던 로마 시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아, 그거다!


 나는 신속하게 직원 앞에서 캐리어에 봉인해 둔 지팡이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캐리어만 위탁 수화물로 부치겠다고 말하며 그 앞에서 보란 듯이 지팡이를 짚었다. 그리고는 조용하고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이 다 낫기 전, 지팡이에 의존해 움직이던 내 동작을 기억해내려 애쓰며.


 그러니까, 나는 절뚝이고 있었다. 조금은 의도적으로. 오직 내 지팡이를 나와 함께 비행기에 태우겠다는 강한 집착이 그 순간 나로 하여금 일부러 다리를 절게 만든 것이다. 나는 근 2주간 지팡이를 짚고 다녔던 내공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그렇게 나는 당당하게(?) 지팡이와 함께 출국장까지 무사히 통과했다. 공항의 직원이 지팡이를 짚은 나를 보고 당황하며 패스트 트랙으로 안내할 땐 살짝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간신히 지켜낸 지팡이와 함께 출국장으로 들어선 내 걸음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정상적인 걸음걸이로 돌아왔다.


※스포주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반전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이미 다들 아실거라고 생각합니다.....(모르셨다고요?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마치 중요한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처럼 의기양양해 져서는 탑승구 앞까지 지팡이를 휘릭휘릭 휘두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1시간만 있으면 출국이었다.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카이저쏘제라니. 그게 파란만장한 상황 전개에 온갖 걱정과 안달만 가득했던 그 날 중 유일하게 내가 피식이나마 웃었던 최초의 순간이었다.






 언젠가는 이 시트콤 같은 여행기에 대해 꼭 기록하고 싶었는데, 마침 오늘 시트콤같이 넘어진 김에 쓴다. 긴 글이지만 오랜만에 재미있게 썼다. 아마도 글을 쓰는 동안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일 거다. 코로나 시국에 이제는 지구 상에서 사라져 버린 여행을 추억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20대 땐 어떻게든 여행을 최대한 많이 가고 싶어서 악착같았다. 나는 나의 성정을 잘 알았다.  나의 게으르고 안주하기 좋아하며, 쳇바퀴 같은 삶에서 평온을 느끼는 천성과 나약한 체력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었다. 나는 사실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20대 때 억지로라도 여행을 떠났다. '이 시기를 놓치면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여행을 안 갈 거야.' 그런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Now or Never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나를 전지훈련 보내듯이 강제로 티켓을 끊고 나를 다른 나라에 던져놨다. 적어도 내가 가보고 싶은 대륙들은 20대에 다 찍어봐야 한다는 절박한 목표의식으로. (실제로 나는 20대 때 내가 가보고 싶은 대륙들은 한 번은 다 찍어봤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나는 30대가 된 이후부터 여행을 거의 안 가게 되었다. 예기치 않게 코로나도 발생하고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역시 그 여행을 많이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거의 10년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생각나는 걸 보면. 지금의 내가 여행을 간다 해도 그때의 내가 느꼈던 그러한 극적인 감정의 흐름은 느끼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여행지에서만 부딪힐 수 있는 돌발 상황 속에서, 다시 떠올려 보는 20대의 내 모습은 때로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귀엽고 엉뚱하게 느껴진다. 


  나를 짧은 순간이나마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쏘제로 만들었던 문제의 지팡이는 현재 나의 서재에 잘 모셔져 있다. 단순히 관상용으로 킵하는 건 아니다. 한국에 와서도 몇 번 발을 다쳐서 실사용한 적도 있다. 몇 안되는 연기 혼을 불태웠던 그 날의 기억을 생각하면 아직도 조금 뺨이 홧홧해진다. 마치 오늘 넘어졌던 그 순간처럼. 그래도 이 지팡이는 아마도 할머니가 될 때까지 계속 애지중지하며 소장할 것이다.



 넘어진 김에 나는 오랜만에 글을 쓰며 방구석 추억 여행을 했다. 아직 무릎은 띵띵 부어서 아프고, 며칠은 더 절뚝거리겠지만.


 뭐, 때로는 나쁘지 않지 않은가. 넘어진 김에 지팡이를 보며 추억에 빠지는 이런 시트콤 같은 인생도.

 


이탈리아에서 봤던 예쁜 지팡이들. 언젠가 다시 가게 된다 하더라도 아마 사 올 수는 없겠지. 내 인생에 카이저쏘제 에피소드는 한 번이면 충분하니까.




+

그날의 후일담



1. 영어 한마디 못하던 내 동생은 내가 울고불고 걱정한 것과 상관없이 무려 이틀을 무척 잘 지내다 한국 땅으로 돌아왔다. 내가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핸드폰을 처음 켰을 때 받은 문자가 그놈이 로마의 한 식당에서 40유로짜리 스테이크를 먹고 카드로 결제한 내역 알림 문자였으니까.


 나는 동생이 귀국한 이후로도 한 달 정도 동생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런데 걔도 나한테 연락 안 했다. 아마 미안해서였겠지. 그때 동생은 어려서 잘못했어도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곤 했다. 언젠가 얘 철들면 한 번쯤 물어보고 싶다. 그때 넌 내게 미안했는지.



2. 사실, 동생이 잃어버린 내 가방에는 아이패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귀국한 뒤 집에 가서 꺼내기 쉬우라고 내 집 키와 차 키를 모두 그 가방에 넣어놨었다. (심지어 내 차 키 중 스페어 키는 차 안에 있었다.)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친구 집에 맡겨 두었던 새들을 데리고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야 겨우 집에 도착했는데,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열쇠수리공을 부르려고 했는데 마침 배터리가 없던 폰이 푸슉 꺼져버렸다.


 집 바로 앞에 소방서가 있었지만 이런 일로 119에 신고하면 민폐라고 해서 참았다. 그렇지만 이 밤중에 이동장 안에 있는 새들과 함께 복도에서 밤을 지낼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잠시 고민하다 경비실 아저씨의 휴대폰을 빌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야... 미안한데... 근데 나 열쇠 수리공 하나만 불러주면 안 되겠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전화를 받고 당황해하는 친구 목소리에 안도하면서도 또 이 상황이 열 받아서 눈물이 나왔다. 미친 동생 놈, 가만 안 둬. 하면서. 그러고는 기다렸다.


 주말 밤 12시에 남의 집 문 따러 오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했는데 한 30분 기다리니까 그래도 누가 오긴 왔다. 그렇게 집 문도 따고, 차 문도 따고 스페어키도 무사히 꺼냈다.


 이 모든 소동을 끝내고 나니 시간은 새벽 2시였다. 정말 지긋지긋한 날이었다. 9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렇게 생생하게 생각날 정도로 말이다.


내게 활용할 지팡이를 준 숙소의 방명록에 남기고 온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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