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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Mar 07. 2021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나는 대기만성.. 나는 대기만성...



“탈락입니다.”



 최근, 글쓰기와 관련하여 도전했던 일에서 몇 번의 고배를 마셨다.


 ‘사실 저도 그다지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내심 기대했었나 보다. 다만, 그 도전의 과정에서 기대하는 한편으론 어쩐지 이번엔 아무래도 이건 안될 것 같다고 스스로 움츠러드는 자신 없는 내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나의 멘탈은 생각보다 심약했던지, 이 일들이 있었던 이후로는 사실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애초에 돈 받고 글 쓰던 사람도 아니었던 주제에, 이 상실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스스로가 건방지게 느껴지기까지 했고, 그래서 한동안은 좀 글쓰기를 쉬었던 것 같다.


 운동도 안 하고, 글쓰기도 쉬고. 2020년 코로나 시국에도 내 일상을 그럭저럭 지탱해주었던 큰 두 축을 모두 다 포기한 나는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가끔은 영화를 보기도 하고, 책을 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냥 밥 먹고, 누워 있다가, 잠들고, 또 다음날 하루를 시작하고. 그저 그렇게 보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마냥 시간을 흘려보내던 어느 날, 이말년 작가가 나오는 <말년을 행복하게>라는 유튜브를 보다가 문득 마음을 뜨끔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왔다.



‘만화 그릴 때마다 너무 긴장이 되어서 만화를 안 그린다’  그의 말이 내겐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최근의 나 또한 그러했으니까.


 글쓰기를 쉬면서부터는 왠지 모를 부채감에 브런치 앱을 아예 켜지도 않았고, 스마트폰을 만지다 어쩌다 바탕화면에 꺼내 둔 브런치 앱 아이콘이 눌리기라도 하는 순간엔 화들짝 놀라 눈을 질끈 감고 브런치 앱을 종료해 버리기도 했다.


 뭐랄까, 브런치 앱에 접속하면 보이는 ‘알림’을 의미하는 민트색 동그라미. 그것이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내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나, 내가 마지막으로 작가의 서랍에 들어갔던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게 되는 것이 무서웠고 마냥 회피하고만 싶었던 것 같다.


 사실 그것 자체가 자의식 과잉 아닌가. 가뜩이나 재능 있는 작가가 넘쳐나는 플랫폼인 브런치 안에서, 무명작가인 내 글 따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내게, 이말년 작가처럼 유명하고 성공한 작가도 똑같이 백지 앞에서 회피하고 싶을 정도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말년 작가는 20대 시절부터 천재라고 불리며,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일찍이 만화로 성공을 거둔 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 이른 성공이 부담이 된 것일까? 만화가라는 본업 대신 유튜버 침착맨이라는 세컨드 잡(?)으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그는 ‘만화’라는 단어에 극도의 거부감을 보인다. 오죽하면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에게 제안한 벌칙이 바로 ‘4컷 만화 그리기’이다. 그 벌칙이 공개되자 그는 말한다. ‘만화에 대한 내 열정은 차디차게 식었다’고.


 일찍이 작가로서 성공하지 못한 나로서는 그가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이 공감 가면서도, 부러운 마음이 앞서서인지 어쩐지 완벽하게 이해는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오늘 이렇게 다시 브런치에 돌아와 글을 다시 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덕분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말년 작가는 일찍 성공했고, 지금 만화를 더 이상 그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다만, 이 사실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내가 지금 이렇게 끊임없이 돈도 안되고, 언제 빛을 볼 수 있을지 기약도 없는 글쓰기를 지속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내가 아직 글로써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10대, 20대와 같은 인생의 초창기에 글로써 큰 성공을 거뒀다면 그 성공과 그에 수반되는 수많은 시선들이 나를 압박했을 것이기에, 내 성격상 나는 지금처럼 자유롭게 아무 글이나 쓸 수 없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정말 이말년 작가처럼 글쓰기가 무척 부담스러워져서, 생각보다 일찍 펜대를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말년 작가가 초창기에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 자유롭게 연재하던 시절처럼, 나 또한 그저 생각나는 대로 어떤 글이든 자유롭게 내 브런치에 쓸 수 있는 타이밍 아닌가. 다만,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시기가 조금 늦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문득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었다. 바로 아오노 슌주의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만화의 한 장면으로, 작업실에 빼곡히 ‘데뷔’라는 글자를 붙여놓고 창작에 몰두하는 42세의 늦깎이 만화 지망생, 오구로 시즈오의 뒷모습이었다.



 중년 초입의 나이에 직장을 나와 아버지의 집에 얹혀사는 오구로 시즈오. ‘자신을 찾겠다’며 회사를 뛰쳐나온 지 한 달, 정작 게임하고 밥만 축낼 뿐인 백수 생활을 하면서도 구박하는 아버지에게 ‘나를 42살로 보지 말고 아기로 보면 될 것’이라고 뻔뻔스레 일갈하는 그는 세간의 인식에 의하면 ‘루저’ 그 자체이다. 심지어 학창 시절엔 미술 과목에서 ‘가’라는 성적표를 받았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가족들에게 ‘난 만화가가 될 거야’라고 선언하는 장면을 보면 독자인 나조차 ‘농담이겠지...?’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결국 그 못 말리는 아저씨의 의외로 꾸준한 도전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맨날 공모전에서 떨어져 놓고 뻔뻔스레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그러니 이제부터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나는 대기만성...’이라는 변명같은 말들을 되뇌며,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어떻게든 다시 책상 앞에 앉는 그의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워진다.



 그것은 아마도 그 놀라운 뻔뻔함과 굳센 성정이 바로 창작자로서 내가 갖지 못한 자질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전거를 타다 다리에서 굴러도, 창문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 2층 밑으로 떨어져도 그저 목에 깁스만 하면 다시 바로 아르바이트든, 만화 작업에든 착수할 수 있는 그의 회복 탄력성은 경이로울 정도다.


 고작 한두 번 거절당한 거 가지고, 나는 뭘 그렇게 다 끝난 것처럼 심각하게 청승을 떨고 있었던 걸까? 타인이 나를 평가한 결과에 상관없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그저 묵묵히 다시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세팅하고, 브런치 앱을 켜는 그런 심플한 행위 그 자체일 뿐인데.

 





 중년의 만화가 지망생, 오구로 시즈오는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우연히 한 젊은 여자가 자살하려던 장면을 목격한다. 본의 아니게(?) 그녀를 현장에서 구해낸 그는, 그녀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



“왜 사는 거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모르겠다’고, ‘내 인생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다’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나이를 3으로 나눠봐.
인생을 24시간이라고 치면 말이야.
난 이제 곧 14시야.
해님이 쨍쨍한 좋은 시간이지.”



 몇 번을 반복해 읽어도, 이 부분에서는 항상 위로를 얻는다. 아마도 내가 이 만화를 집어 드는 시기가 공교롭게도 항상 나 자신이 초라하거나, 아무것도 아닌 루저처럼 느껴질 때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장면을 보면 항상 뭐랄까, 희망적이고 진취적인 기분이 되는 것 같다.


 페이지를 넘기다 말고 잠시 멈춰 생각해본다. 나의 나이를 3으로 나눠보면, 이제 곧 12시가 된다. 평소의 내 일상에 비추어 봤을 때, 12시면 점심시간 직전이다. 정신없이 바쁘던 오전 시간은 지났고, 점심을 든든히 먹고 운이 좋아 시간이 남으면 커피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해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정도의 여유도 부려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점심시간에 뭔가를 부지런히 먹어두고, 속을 채워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오후 업무를 잘 보고, 사회인으로서 주어진 업무를 시간 내에 책임감 있게 완수하고 싶은 내 의지와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24시간 짜리 인생의 이 시기쯤에서도, 나는 지금 잠시 쉬어갈 운명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만큼, 12시의 내가 뭔가를 든든히 먹어두면, 14시의 나도, 16시의 나도, 퇴근 시간이 되었을 때의 나에게도 분명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단 한 편의 글도 쓰지 않았던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왓챠를 몰아 보면서, 각종 책을 쌓아두고 밤낮없이 파고들면서, 이건 어쩌면 일상 속에서 그러하듯 정신없이 달리는 오전이 아닌 ‘본 게임’인 오후의 후반전을 달려 나가기 위한 습득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지금 내 인생의 시계가 정오를 향해가고 있다면, 나는 평소 내 수면 시간대로 자정이 넘어서까지 내게 주어진 24시간을 충실하게  다 채워서 살 것이다. (<인생 300살>을 외치던 나카무라 퍼슨처럼 300살 까진 못 살더라도, 100살은 꼭 넘기고 말겠다.) 그렇다면 그 긴 인생 중에 설마 단 한 번의 기회도 더 없진 않을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안 되는 게 디폴트인데, 뭐 몇 번 안됐다고 이렇게까지 좌절하고 그럴 일인가. 오구로 시즈오는 42세의 나이에 그린 만화로 만화 잡지에서 력상을 받은 후 무려 2년 동안이나 계속 만화를 그렸음에도 단 한 편도 추가로 실리지 못하고 거절당했다. 그나마도 중간에 담당 편집자는 퇴사하고, 마지못해 그를 떠맡은 신임 편집자는 그에게 ‘때로는 포기하는 용기도 필요하다’며 포기를 종용한다.



그래서 오구로 시즈오가 포기했을까? 아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선택한 행동은 편집자를 다시 찾아가 ‘저와 함께 해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을 건넨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만화를 그렸다. 계속해서 그렸다. 작중의 묘사로는, 47세가 될 때까지도 여전히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렸다. 그가 이후로 만화 잡지에서 데뷔를 했는지, 혹은 아직도 지망생으로만 남았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단지, 그는 계속해서 만화를 그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만화를 그리고 있다는 것.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것.


그래, 42살 아저씨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늦었을 수도 있지만, 늦었기에 더 몰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늦었기에 더 유리한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 인생의 후반기에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레이트 블루머’라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나도 그런 부류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엉덩이를 붙이고 쓴다. 중구난방이고, 자기 완결로 귀결되는 나카무라 퍼슨의 만화들처럼. 오로지 나로부터 시작되고, 나로 귀결되는, 그 누구도 재미있게 읽어주지 않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열심히 세상에 던져본다. 오구로 시즈오처럼 ‘데뷔’라는 글을 잔뜩 써붙여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글을 쓸 때 보이는 맞은편 벽면에 마틴 에덴과 폴 오스터와, 그의 타자기의 사진을 붙여둔 채 말이다.


‘나는 대기만성.... 나는 대기만성....’을 읊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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