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리나 Dec 24. 2020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란다

실연 후에 다시 본 <당신이 잠든 사이에>

실연 후에 다시 본 <당신이 잠든 사이에>

 브런치의 인터페이스 중, 글 번호는 발행 순서가 아니라 작성 순서에 따라 매겨져 있다. 때문에 이 글 번호가 최근의 글들에 비해 상당히 앞번호인 것을 보고 눈치챈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은 내가 2018년 1월 17일에 마지막으로 수정했던 글로, 그동안 작가의 서랍에 오래도록 고이 잠들어 있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는 영화에서, 올리버와의 사랑의 끝을 확인하고 괴로워하는 엘리엇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그 슬픔, 그 괴로움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당시의 감정을 그대로 기억하는 마음으로, 조금 다듬어서 이 글을 내놓는다.





 최근,  나는 실연을 했다.


 살면서 그동안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해 왔지만, 이번의 상실은 한 여름에 찾아왔음에도 유독 뼈가 시리도록 아팠다. 그러면서도 나는 왜 이렇게까지 내가 힘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을 내가 여태까지 만났던 사람 중 가장 많이 사랑했던 것도 아니었고, 나중에는 함께 있는 것이 더 이상 행복하지도 않은 상태였는데도. 그런데 왜 이번 이별은 유독 이렇게 지독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사랑을 시작하고, 경험하고, 이별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과정 속의 나는 마치 영화를 촬영하는 배우와 같았다.


그 관계에 몰입해 있던 순간의 나는 해당 배역을 맡아 촬영하는 배우였고, 이별을 경험한 순간의 나는 영화 크랭크 업을 마친 배우였다. 그리고 이별의 고통을 벗어나는 과정은 내가 촬영한 영화의 완성본을 내가 다시 돌려보는 과정과 비슷했다.


 내가 그 관계 안에서 얼마나 불행한 모습이었는지, 내가 바랐던 안정적이고 익숙하고 편안한 관계의 실상이 실은 얼마나 얄팍한 지반 위에 위태롭게 세워져 있었던 것인지. ‘당연히’ 내 것이라 느끼며, 온 힘을 다 해 매달렸던 것이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내가 느낀 충격. 나는 나의 욕망에 속아 ‘그’를 보지 못했다. 그는 그의 기준에 맞는 나의 모습만을 사랑했다는 것을.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느낌으로나마 대강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촬영했던 영화를 다시 한번 돌려보던 첫 시사회였다. 시간이 내게 준 거리감은 나의 영혼을 당시의 나 자신으로부터 유체 이탈시켜 주었다. 나는 더 이상 그 배역의 주인공이 아니라,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영화 속 등장인물인 두 사람을 관찰했다. 나는 영화 속 내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그것은 이별 직후, 한창 관계에 몰입해 있던 내가 느낀 가슴 내벽을 송곳으로 샅샅이 긁는 고통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마치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듯 나 자신의 고통을 관조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안타까움과 먹먹함, 이미 예정된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주인공인 ‘나’를 향한 연민. 그때의 나보다 한 두 달이라도 더 ‘언니’가 된 내가,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나’를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그 관계에서 하루라도 빨리 끄집어내 주고 싶었던 마음 등.


 나는 그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돌려보고, 돌려보고, 돌려보다...  더 이상 그 영화를 본다 해도 내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쯤 다른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사랑에 대한 영화들이었다. 내 영화와는 다른 등장인물, 다른 배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배역 안에서 그와 내 모습을 보았다. 그 어떤 영화를 봐도 그것이 전부 우리 두 사람의 실패한 이야기 같았다.


 “나를 받아주는 클럽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애니 홀>의 우디 앨런.

연인에 대한 통제와 자연스러운 사랑의 갈구를 원하며 대립하는 <루비 스팍스>의 두 사람.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허무함을 느끼는 <뉴니스>의 주인공들.

 상대를 너무 좋아하지만, 같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좋아할 수 없다며 떠나버리는 <내 머릿속의 포이즌베리> 여주인공.

 '절대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건 없다'는 걸 깨닫게 하는 사랑이 진정한 의미의 '첫사랑'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는 <이니시에이션 러브>.



 그렇지만, 그 어떤 영화도 이번 이별에 대해서 내가 느끼는 이 특별한 고통을 유사하게 재현하지는 못했다. 내가 봤던 모든 영화들은, 내가 여태까지 겪어왔던 이별들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였을 뿐, 왜 유독 이번 이별에 있어서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슬퍼하는 도중에도 시간은 확실하게 흘러갔다. 어느새 연말이 되었고, 혼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영화를 틀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크리스마스에는 늘 봤던 영화. 그것은 바로 <당신이 잠든 사이에>였다.



 이 영화는 뉴욕의 기차역 티켓 부스에서 일하며 외롭게 혼자 지내는 여주인공이, 늘 짝사랑하던 남자가 열차 플랫폼에 빠진 것을 우연히 구하게 되며 펼쳐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 내에서 배경이 되는 시기가 크리스마스에서부터 연말연시 시즌인지라 매년 크리스마스에 혼자 있게 될 때면 보곤 했던 것이다. 흔히들 혼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땐 '아, 올해도 케빈(<나 홀로 집에>의 등장인물)과 함께인가~'라는 농담을 하곤 하는데, 내게 있어서 이 영화의 주인공 루시가 약간 그런 존재였던 것 같다. 매년 크리스마다 만나는, 언니 같던, 친구 같던, 그리고 이제는 내 어린 동생 같은 사람.


 주인공 루시에겐 가족이 없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파트 하나와 그 안에 살고 있는 고양이뿐이다. 그녀는 현재 뉴욕 한복판의 철도역의 한 부스에서 통행권의 코인을 받는 단순 업무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1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코트늘 입고, 혼자 사는 집에서 고양이와 함께 45불짜리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삶.


 

그런 자신의 처지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도 어릴 땐 커서 뭐가 되고 어디서 어떻게 살게 될까 상상하곤 했어요. 평범한 것들이었죠. 집과 가족.. 그런 거요. 불평하는 건 아니에요. 내겐 고양이도 있고 아파트도 있고 혼자 쓰는 리모컨도 있어요. 그건 중요해요. 다만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투명한 부스에 갇혀 기계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승객들에게 코인만 건네는 생활을 반복하던 어느 날, 그녀의 앞에 꿈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운명의 남자, 피터가 나타난다. 조금씩 혼자만의 짝사랑을 키워가며 그를 지켜보던 그녀는, 어쩌다 우연한 계기로 열차에 치일 뻔한 위기에 몰린 그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를 병원으로 옮기고 그의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병원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그의 약혼녀로 오해를 받게 된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피터가 쓰러져 뇌사 상태로 잠들어 있는 사이에 그의 가족들과 인연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피터가 하필 크리스마스날에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그의 가족들은 늦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다음날 열게 된다. 매년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바로 이 장면, 그녀가 처음 피터의 집에 초대되어 그의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는 씬부터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게 된다.




 피터의 가족으로부터 뜻밖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을 때, 루시의 그 감격했던 모습이란! 기쁘면서도, ‘내가 이런 걸 받아도 되나’ 하는 그 쭈뼛하면서도 당혹스러운 표정. 그러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를 보고, 문득 작년 이맘때쯤의 내 모습이 플래시백 되며 떠올랐다.






 작년 이맘때쯤, 그러니까 2017년의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그의 가족들을 만났었다. 그의 가족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내게 꽃과 선물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 선물을 받으며 조금 흥분해 있었다. 늘 혼자 보내왔던 크리스마스에, 그 사람과 함께, 그리고 그 사람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누군가의 ‘가족’의 일원이 되어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살면서 크리스마스라는 날에 그다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본 적이 없었음에도 그 날만큼은 나는 무척 감동했다. 비단 꽃과 선물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들이 내게는 뜻밖의 선물같이 느껴졌기에. 당혹스럽지만 기뻤던 순간들. 기분 좋은 긴장감, 행복함. 그 순간, 나를 가장 행복하게 했던 것은 그가 아닌 그의 가족이었다.


 나의 가족은 집안 사정상 어릴 때부터 뿔뿔이 흩어져 살았기에, 나는 친척 집에서 얹혀 살아왔고, 어른이 된 후로는 그마저도 독립하여 줄곧 혼자 지내왔다.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언제부터인가 그냥 눈뜨면 늘 혼자 있는 게 익숙해서, 그게 너무나 당연했으니까. 내 안에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한 열망이 이토록 강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미처 몰랐다. 그때까지 내게 있어서 ‘가족’이라는 것은 영화 속이나 쇼윈도 속에서나 보이는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타인들의 것일 순 있어도, ‘나’에게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던 그 무엇. 그랬기에 그 날 나는 그렇게까지 들떴던 것이다. 그 날의 나는 그 하루로 우쭐해서, 나도 마침내 그런, 가족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한껏 취해 있었다.


 그와 헤어지던 당시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나는 그를 잃었다는 사실보다, 그로 인해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에 더욱 절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보다, 그의 가족이 갖고 싶었다.  혼자 잘해 왔다고, 앞으로도 문제없을 거라고. 나는 ‘평범한’ 가정의 일원으로 평생 헌신하며 살아갈 수 있는 부류의 여자가 아니라고 부정해왔는데. 아닌 척 해왔고, 애써 외면해 왔지만, 내 안에는 따뜻하고 온전한 '완성된' 가족에 대한 이토록 뜨거운 열망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루시 : "그날 내가 당신 생명을 구했을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당신이 절 구한 거예요. 절 당신 가족의 일부분이 되게 해주셨어요."



 그동안 내가 남자로부터 받은 대부분의 상처는, '넌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될 사람이야.'라는 말과 태도로부터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족을 원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에 나오는 캘러핸 일가 같은 화목한 가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를 받아들여 주고,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줄, 나에게도 소속감을 느끼게 해 줄 '가족'을 간절히 원했다. 작년 이맘때쯤의 나는 그의 가족들을 만나며, 곧 나 또한 스스로 루시처럼 그 가족의 일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그래서 그와의 이별을 맞이한 순간, 그보다는 그의 가족이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나는 그토록 긴 시간 괴로워했던 것이다.


 차라리 그의 가족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그의 가족과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더욱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여기까지가 내가 2018년 1월에 썼던 내용이다. 그로부터 어느덧 2번의 크리스마스가 차례차례 지나갔고, 지금은 2020년의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나는 오늘도 연례행사처럼 이 영화를 봤다.


 그래도 오늘은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브런치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2018년이 마지막 수정 일자였던  글을 먼저 읽었다. 그동안 이 글이 계속 신경 쓰여서, 오늘만큼은 이 글에 끝을 맺고 싶었기 때문이다. 왠지 이 글을 완성해서 발행하고 나면, 곧 다가올 새해를 좀 더 홀가분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그로부터 3년 정도가 더 지나서일까? 1년에 한 번씩은 주기적으로 복습하는 영화인지라 대사까지 다 외울 지경이어서, 더 이상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늘도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마음껏 울고,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고, 또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는 등장하자마자 뇌사 상태에 빠지는 피터이다. 결국 루시가 그의 동생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페이크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평소에는 루시와 잭, 그리고 루시가 피터의 가족들에게 느끼는 감정에 집중해서 보다 보니 놓쳤던 그의 감정선이 오늘따라 눈에 들어왔다.


 뇌사 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의 약혼녀라 주장(?)하는 낯선 여자, 루시를 처음 보게 된다. 분명히 처음 보는 여자인데, 자신의 가족들 모두 이미 그녀에게 푹 빠져 있다. 존경하는 대부는 그녀를 사랑하라고 설득까지 한다. 심지어 가족들도, 의사도 피터를 기억상실증으로 몰아간다. 피터는 이 모든 상황에 확신이 없다. 의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신이 루시로부터 최소한의 호감을 느끼는지 여부뿐이다.


 그렇지만, 피터는 잘 모르겠다. 루시라는 사람이 괜찮은 것 같긴 한데 말이다. 그렇지만 가족들도 좋아하고, 자신도 슬슬 과거의 막살던 삶을 아예 리셋하고 다시 거듭나기에는 이 '루시'라는 여자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가족은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니 나도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My family loves you.. I might as well love you."


이건 대체 어떤 고백(?)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워하는 루시



 피터는 잭에게도 말한다. 그녀를 좋아하게 되는데 1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는 모를 일이라고. 그렇게 확신이 없는 상대와 덜컥 결혼을 결심하는 피터라는 인물의 우유부단함은 영화 속에서 피터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잭에 비해 억지로 떨어트리는 효과를 주지만, 그가 그렇게 루시에 대해 한 말을 곱씹어 보다 보면 문득 머릿속에 어떤 장면들이 겹쳐져 떠오른다.  



 "우리 가족들도 너를 참 좋아하는데..."



 그것은 헤어지는 순간,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나와 이별하는 순간, 그가 내게 표현한 아쉬움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나와 연인 관계를 유지했던 그의 감정 또한 그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여태까지 만났던 여자들과 나는 조금 스타일이 다르다고. 나는 어른들이 좋아할 것 같았고, 결혼을 생각하고 만났을 때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이후로도 서로의 가족을 소개했을 때, 내게 몇 번이고 자신의 가족들과 잘 지내줘서 고맙다고 했다.


 비록 영화의 말미에 잠깐 나오는 정도에 그치지만, 피터에게는 사실 유부녀임에도 거리낌 없이 프러포즈를 하고, 코 성형과 가슴 성형 수술 비용을 대 주고, 깔끔한 아파트에 고양이를 키울 정도로 사랑하는 애슐리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유부녀인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하면서도 본인의 가족이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바로 그렇기에 바로 그녀가, 피터가 정말 인생을 함께 하고 싶었던 사랑하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루시가 아니라.


 그가 나에게 항상 '결혼하기에 괜찮을 것 같아서', '어른들이 좋아하니까'라는 말을 했던 것에 대해서 한창 그 관계에 빠져있던 당시의 나는 냉철하게 그 상황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저 좋은 말, 칭찬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안다. 3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겨우 그 상황을 남 일처럼 관조할 수 있게 된 내가 봤을 때, 그저 당시의 그는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했을 뿐, 사랑할 수 없었던 것뿐이다. 1년이든, 10년이든, '언젠가는 사랑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날 옆에 두었던 그는 결국 나와의 경험을 토대로 진짜 자신이 사랑할 애슐리를 찾게 된 것이 아닐까.


 나와의 만남과 이별 이후로 그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슬슬 결혼할 때가 되었으니까, 결혼할 만한 여자를 찾고, 그 여자를 좋아하려고 노력해야지.'그런 생각과 계획을 세워서 행동해봤자, 결국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사람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마련이고, 마음은 억지로 작동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왜, <당신이 잠든 사이에> 루시의 아버지도 루시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란다."







 어쨌든 올해도 크리스마스이브가 이렇게 끝나간다. <도쿄 후회 망상 아가씨> 만화책을 처음 볼 때까지만 해도 내가 2020년까지 솔로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뭐 어쩌겠나. 루시의 아버지가 말씀하셨듯이, 어차피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닌 것을.


 사실 어릴 때부터 계획하고 뜻한 건 웬만하면 다 이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결혼하고, 가족을 만드는 일만큼은 너무도 어렵고, 도통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나름대로 외롭게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 가족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루시는 밤늦게 피터를 찾아가 병동에서 뇌사 상태에 빠진 그를 앞두고 혼잣말을 늘어놓는다. "너무 외로워서 혼수상태에 빠진 남자를 찾아가 본 적이 있나요?"라고 조심스레 말하는 기가 죽어 있는 루시의 모습에 오늘만큼은 왠지 평소보다 마음이 더욱 강하게 동기화가 되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지금부터는 오히려 잘 모르겠다. 살면서 '가족'이라는 것을 꼭 갖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주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어쩌면 나는 가족이라는 것에 소속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다. 어차피 계획이라는 게 의미가 없다면, 그냥 조금은 더 이대로 살아볼까. 나 혼자 뿐인 집이지만, 그래도 썩 그럴싸한 트리도 있고. 새도 두 마리나 있고. 식물들도 있고. 이것이 나의 외로움을 상쇄해주진 못한다 해도.



루시의 상사 제리는 은근 효과적인 조언을 해준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속 루시 상사 제리의 말처럼, 가족은 뭐 '오늘부터 가족이야!' 하면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어디 군입대를 하거나 클럽 가입을 하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자기 전에 오랜만에 Serenity Prayer나 한번 외우고 자야겠다. (기독교는 아니지만 이 기도문은 좋아한다)



Serenity Prayer (평온을 구하는 기도)

God, grant me
주여, 저에게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평온과,

th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용기,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해낼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소서.
























매거진의 이전글 열심히 할게요, 6시까지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